(두륜산 대흥사기행 제6부) 유네스코지정 ‘한국의 산지승원' 해남두륜산 대흥사 제2부

2018. 10. 20. 16:44국내 명산과 사찰

(두륜산 대흥사기행 제6) 유네스코지정 한국의 산지승원' 해남두륜산 대흥사 제2부


제1부에서는 남원의 천불전을 비롯한 중요 전각을 포스팅 했고,

제2부에서는 북원의 중심 전각인 대웅전을 중심으로 포스팅한다.


<침계루>는 대둔사의 중심을 가로질러 남 북원을 구분짓는

계류 금당천(金塘川)에 면하여 우뚝 선 2층의 누각이다.

 침계루(枕溪樓)는 계곡을 베개 삼은 누각이라는 의미다.


침계루는 북원 일곽의 정문과 같은 기능을 하며

심진교를 건너 누하의 어칸 통로를 통해 내정에 들어서게 되어 있다.

보통 주불전 앞 누각이 지면에서 반층 정도 높인 누마루인데 비해

침계루는 완전한 중층 누각으로 하층은 돌담과 판벽으로 막은 광이고

상층 전체가 하나의 홀(hall)로 이루어진 강당류의 건물로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30평 규모이며

누다락 위엔 큰 북과 종 목어가 걸려 있고 양측 벽에 사천왕 탱화가 걸려 있다.


 

법당을 향한 내벽은 트여 있고 삼면 벽을 판벽과 판문으로 처리했다.

상층의 기둥이 층귀틀 층보 위에 얹혀져 위아래 기둥이 서로 분리되고

이익공과 내부 기둥이 없는 오량 가구를 구성하여 큰 풍판을 붙인 박공지붕이다.



@대웅보전 현지 안내문에 따르면

이 건물은 조선 현종 8(1667) 심수대사가 중건하였다 하나 그 후에도 중수가 있었던 듯하다.

전면에 장대석으로 높이 쌓은 단위에 기단을 마련하고,

전면 5, 측면 4탄의 다포계 팔작지붕 건물을 지었는데,

귀기둥을 제외한 전면 기둥 상부에는 용두를 새기고

 쇠서에도 연꽃을 새겨 조선후기적 특징을 보였다.

건물전면에는 각 칸마다 빗살무늬의 이분합문을 달았으며,

가운데 현판은 조선후기의 명필인 원교 이광사(1705~1777) 선생의 글씨이다.

건물안에는 목조삼존불을 봉안하고 있다.


@해남 대흥사 대웅보전(海南 大興寺 大雄寶殿)은 조선시대의 건축물로

2008919일 전라남도의 유형문화재 제296호로 지정되었다



대웅보전을 오르는 좌우계단에 사자상 두각이 조성되어 있다.




대흥사(大興寺) 가람은 금당천 개울을 경계로 크게 '북원''남원'으로 나뉘는데,

북원은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한 영역이고,

남원은 다시 천불전 일곽, 표충사(表忠寺), 대광명전 일곽의 세 영역으로 구획된다.

 

대웅보전은 1665(현종 6)부터 1667년에 걸쳐 심수(心粹)가 중창했는데

앞면 5, 옆면 3칸의 다포집으로 조선중기의 다포계 건축이나

정면의 화려한 용두장식 등 여러 장식요소가 다분히 혼합되어 있는 등

조선후기의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대웅보전의 현판은 조선 후기의 명필인 이광사(李匡師)가 쓴 것이며,

내부에는 조선 후기에 만든 목조삼존불과 광무연간에 조성된 후불탱화(後佛幀怜)를 비롯해서

감로탱화·삼장탱화·신중탱화·칠성탱화가 있다.

 

대웅전 앞에 있는 금당천 가에 침계루(枕溪樓)가 있고,

좌우에는 승사인 백설당(白雪堂세심당(洗心堂)이 있다.

백설당에는 김정희가 무량수각(無量壽閣)’이라고 쓴 편액이 있으며,

이 건물은 현재 큰방으로 사용되고 있다.

대웅 동쪽 응진전 앞에는 대흥사응진전전3층석탑(大興寺應眞殿前三層石塔보물 제320) 1기가 있다.

 

대웅전 현판에 얽힌 일화

추사 김정희는 제주도로 유배를 가던 중 대흥사에 들렀다.

당시 대흥사의 주지는 차의 선인이라 불리는 초의선사(1786~1866)였다.

 대웅전에 걸린 이광사의 글씨를 본 김정희는 그 자리에서 글씨를 써주며 자신이 쓴 현판을 걸게 하였다.

 그로부터 9년 뒤, 유배가 풀려 돌아가던 김정희는 다시 대흥사에 들렀다.

그는 예전의 일을 후회하며 자신의 현판을 떼어내고 이광사의 현판을 다시 걸게 했다고 한다.





(아미타불/석가모니불/ 약사여래)

@대웅전 삼존불좌상은 보물 제1863호로 지정되어 있다.

석가불 높이 196.6, 약사불 높이 136,7, 아미타불 높이 168.3,

재질은 목조에 소조로 마감되어 있다



석가불·아미타불·약사불로 구성된 삼세불좌상은 중앙의 석가불과

좌우 약사·아미타상은 양식이 서로 다른데 각각의 조성 시기가 다르기 때문이다.

약사·아미타상 복장에서 발견된 법당당주석가약사미타삼존소성복장기에 의하면

 약사와 아미타불은 1612년에 태전(太顚), 사인(思印) 9명의 조각승이 제작하였고,

석가불은 그 뒤 십수 년이 지난 다음에 조성되었다고 한다.

 

본존인 석가불의 높이는 196.6, 약사불은 163.7, 아미타불은 168.3로서

석가불이 좌우 불상에 비해 크다. 먼저 제작된 좌우 두 불상은 상체가 다소 긴 비례이고,

목도 길며, 얼굴은 달걀형이다. 머리에는 정상계주와 중간계주가 표현되어 있다.

착의법은 통견이며 오른쪽 어깨는 가사로 덮여있다. 드러난 가슴은 양감이 없이 평평하다.

수인은 모두 엄지와 중지를 맞댄 하품중생인을 결하고 있는데, 두 손의 위치는 대칭적이다.




약사불과 아미타불은 이처럼 유사한 양식을 보이지만 세부적인 표현에는 차이가 있다.

 약사불의 경우는 옷자락이 더 굵고 간격이 넓고 내의의 표현도 끝단에 주름이 있는 데 비해

아미타불은 옷자락이 얕고 촘촘하며 내의는 한 번 반전된 형식을 보인다.

 

본존인 석가불은 신체보다 머리가 큰 편이어서 조형 감각이 양옆의 불상과는 현저히 다르다.

얼굴은 방형에 가깝고 입술은 짧다. 편단우견이지만

오른쪽 어깨를 덮은 가사 자락이 넓게 내려오면서 거의 통견처럼 보인다.

다만 촉지인을 결한 오른손의 팔뚝이 드러나 있어서 편단우견임을 알아볼 수 있다.

 드러난 가슴에는 은근한 양감을 주었고, 가슴 아래를 지나는 내의의 상단은 주름지게 표현되었다.

무릎이 높은 편이고 가부좌한 다리 사이에서 바닥으로 흘러내리는

부채꼴 모양의 주름을 중심으로 옷자락을 표현했다  



이 삼세불상은 조성 기록이 있으며 작품성도 우수한 편이다.

더욱이 과학적인 조사방법으로 제작기법과 결구 방식을 조사한 바 있어 중요성을 갖는다.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하나의 나무를 깍아서 통째로 불상을 만든다고 알려져 왔다.

그러나 이들 삼세불상에 대한 X선 조사를 통해서 여러 조각의 나무를 이어 붙여 만들어졌음이 밝혀졌고,

특히 어떤 구조로 결합했는지에 대한 점이 면밀히 조사되었다.

아울러 목조각이지만 불상 표면의 최종 마무리를 소조로 처리하였음이 확인되었는데,

이를 목조불상이라고 해야 할지 소조상이라고 해야 할지에 관한 논의가 이어졌다.



복장에서 발견된 조성기에는 소성복장기라고 명기되어 있어 소조적 성격을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조선시대 목조불상에 대한 조사가 활발히 전개되면서

이와 같은 양식이 대흥사 삼세불상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조선 후기 불상의 보편적인 현상임이 알려지게 되었다.

한편 복장에서 발견된 조성기에는 불상제작을 위해 시주된 물목과

여기에 참여한 380여 명의 사부대중을 모두 기록하고 있는데

당시 사회상을 살필 수 있는 유용한 자료이다.

또한, 이 조성기를 통해 그동안 금산사지(金山寺誌)에서만 언급된

수조각승 태전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칠성탱


감로탱


삼장탱


대웅보전 옆에 응진당과 산신각이 한 전각 안에 나란히 있다. 


응진전




산신각.



@해남 대흥사 삼층석탑

보물 제320. 높이 430cm. 응진전 앞에 있는 탑으로

기단부는 4매의 돌로 짠 지대석 위에 하대석과 중석을 붙여서

4매의 긴 돌로 하층기단을 형성했는데, 중석의 각 면에는 2개의 탱주와 4개의 우주를 모각했다.

대흥사 북미륵암석탑과 함께 신라 하대에 석탑양식이

 우리나라의 서남단지방에까지 전파되었음을 알려주는 작품으로 주목된다.

 19671월 해체·수리 때 상층기단 내부의 자연 판석 위에서

 동조여래좌상(銅造如來坐像) 1구가 발견되었다.




북원을 나와 남원으로 대흥사투어를 마감한다.  


범종루


저멀리 노승봉, 가련봉, 두련봉을 바라보면 일주문으로 나선다.


일주문 뒤  선림교해만화도량이란 편액이 걸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