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0. 10. 21:48ㆍ국내 명산과 사찰
(두륜산 대흥사기행 제5부) 서산대사를 모신 사당 표충사
@전라남도 기념물 제19호로 지정된 표충사는
임진왜란 때 승병대장으로 활약한 휴정(休靜)과 제자 유정(惟政)·처영(處英) 등
3인의 영정을 봉안한 사우(祠宇)로서,
사찰 경내에 사당을 겸한 특별한 형식이다.
표충사는 절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유교 형식의 사당(祠堂)이다.
호국문
@표충사 입구는 내삼문이 세워져 있다. 내삼문은 정면 3칸의 맞배지붕 솟을삼문이며,
중칸 위에 ‘禮齋門(예재문)’이라 쓴 현판이 걸려 있다.
표충사에는 내삼문(內三門) 안에 보련각(寶蓮閣), 의중당(義重堂),
사당(祠堂:표충사), 조사전(祖師殿), 비각(碑閣) 등 건물이 들어서 있다.
<조사전>
조사전은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우물마루를 깔았다.
낮은 기단 위 막돌 초석에 두리기둥을 세운 3량 가를 얹었고,
2 익공 양식에 방풍판을 단 맞배집이다. 전각 안에는 16분의 조사 영정이 모셔져 있다.
표충사는 절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유교 형식의 사당으로
1788년(정조 12) 대둔사 7세 법손(法孫)인 천묵(天默)이
세 분 스님의 영정을 모시고자 조정에 상소하자,
정조는 세 승려의 충정을 크게 치하하며 친히 표충사라 사액하였고,
이듬해 사우를 건립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표충사 사당에는 <어서각(御書閣)>이란 편액이 또 하나가 걸려 있다.
건립 당시는 대웅전을 바라보는 곳에 있었는데,
1836년(헌종 2) 잠시 동남쪽의 주산(主山)으로 옮겼으나
1860년(철종 11) 원래 사우지로 이전 상량하였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내부는 마루를 깐 통칸이다.
장대석으로 단출한 낮은 기단 위에 막돌 초석을 놓고 민흘림의 원주를 세웠으며, 5량 가구를 얹었다.
공포는 1출목을 둔 주심포계의 2 익공(翼工) 양식이며, 지붕은 방풍판(防風板)을 단 고기와의 맞배집이다.
이 건물은 조선 정조 12년(1788)에 세웠으며 전면과 측면 모두 3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인(人)자 모양의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표충사비각
비각에는 1791년에 세운 서산대사표충사기적비(西山大師表忠祠紀蹟碑)와,
1792년에 건립한 표충사건사적비(表忠祠建事蹟碑)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표충비각은 정면 2칸, 측면 2칸의 팔작집이며,
내부에는 서산대사 표충사 기적비와 건사사적비(建祠事蹟碑)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서산대사 표충사 기적비는 높이 364센티미터이며 사각형 받침대에 비 몸과 사각형의 머릿돌을 올렸다.
건립연대는 비 몸 측면에 ‘숭정 기원후 삼신해월립’이라는 명문이 있는데
이는 1791년(정조 15)에 세운 것임을 알려준다.
건사사적비는 높이 316센티미터로 사각형 받침대에 비 몸과 머릿돌을 갖추었다.
건립연대는 ‘성상 십육년 임자 오월 일, 서산육세법손 연담유일 근찬,
응운등오 근서(聖上十六年壬子五月日, 西山六世法孫蓮潭有一謹撰, 應雲登旿謹書)’라는 내용으로 보아
1792년(정조 16)이며, 찬자는 연담 유일, 글씨는 응운 등오가 썼다.
@서산대사 표충사 기적비
서산대사의 이름은 휴정 속성은 최씨 호를 청허자(淸虛子)라 하며 묘향산에 있었으므로 또 서산대사라 하였다.
1520년에 출생하여 어려서 양친을 여의었다. 이때 불교의 경전을 읽고 삶과 죽음에 대한 학설에 감동되어
머리를 깎고 불문에 들어가서 1540년에 일선화상(一禪和尙)에게서 계(戒)를 받았고
뒤에 영관대사의 문하에 들어갔다. 30세에 선과(禪科)에 합격하여
대선(大選)에 양종판사(兩宗判事)까지의 승직을 받았으나 곧 이를 사임하고 산으로 들어갔다.
정여립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어떤 자가 대사가 이들과 관련이 있다고 무고하였으나
선조(宣祖)는 그의 억울함을 알고 풀어주었을 뿐 아니라
그의 시고를 보고 크게 감탄하여 임금이 대를 그리고 거기에 시까지 써주는 영광을 얻었다.
임진왜란 때 선조가 의주에 피란했다함을 듣고 대사는 칼을 집고 왕을 가서 뵈옵고
승려의 의병을 일으킬 것을 자청하여 왕은 곧 대사를 팔도 십육종 도총섭에 임명하였다.
대사는 곧 제자인 유정, 처영과 승병을 모집하여 5천여 명을 얻고
순안 법흥사에서 첫 모임을 갖고 중국군대를 도와 싸워서 모란봉에서 승리를 거두고
평양과 개성을 수복하고 용사 7백여 명을 뽑아서 왕을 호위하여 서울에 환도하였다.
이때에 대사는 왕에게 이제는 늙어서 더 이상 힘을 낼 수 없사오니
이 군사사무를 유정과 처영에게 넘겨주고 자기는 묘향산으로 돌아가게 하여 달라고 청하였다.
왕은 이를 허락하고 국일도대선사선교도총섭부종수교보제통계존자의 칭호를 내렸다.
대사는 한국의 불교를 중흥시킨 고승으로 제자가 천여 명이며
그 가운데는 불교의 영수급에 해당되는 인물이 4~5명에 달하였다.
그의 저서로는 ‘선가귀감’ 외에 몇 가지 단행본과 ‘청허집’이 있다.
그가 죽기에 앞서 유언으로 그의 유물을 해남 대둔사에 보관하라 하며
“이곳은 남에 달마산, 북에 월출산, 서에 선운산이 있어 자기가 마음으로 즐기던 곳이기 때문이라” 하였다.
대사가 세상을 떠난 후 185년인 1788년에 그의 7세손 천점(天點) 등이
대둔사 남쪽에 사당을 짓고 대사의 화상을 모시기 위하여 임금에게 진정을 올렸고
호조판서 서유린이 왕에게 적극적으로 진언하여 나라에서 사당의 칭호를 내려주기를 청하였다.
정조는 대사가 임진란에 세운 공적을 생각하여 특별히 표충(表忠)이라는 명칭을 내리고
대사의 직계를 더 높이 추증하고 이듬해 4월에는 예조의 관리를 보내어 제사를 지냈다.
이에 앞서 경상도 밀양에 유정(惟政)을 모신 사당으로 표충사가 있었는데
이제 대사의 사당도 같은 이름을 붙인 것은
스승과 제자가 함께 나라에 충성을 바친 것을 나타내는 영예로운 특전이었다.
서유린이 지어 1791년에 세운 비는 한문으로 되어 있으므로
박정희 대통령 각하의 분부를 받들어 한문을 해독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한글로 요약 편술한 이 비를 따로 세워 후세에 전한다.
1979년 12월, 임창순 짓고 김병남 쓰고 전라남도 세움
조사전, 표충사, 비각이 나란히 세워져 있다.
상사화(꽃무릇)가 피어 있는 표충사, 호랑나비가 쉬어가고 있었다.
'국내 명산과 사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두륜산 대흥사기행 제6부) 유네스코지정 ‘한국의 산지승원' 해남 두륜산 대흥사 제1부 (0) | 2018.10.20 |
---|---|
가벼운 나들이 수락산 매월정으로 (0) | 2018.10.16 |
(두륜산 대흥사 기행4부) 대흥사 사내 암자 진불암(眞佛庵) (0) | 2018.10.09 |
(두륜산 대흥사기행 제3부) 노승봉에서 두륜봉으로(2/2) (0) | 2018.10.07 |
(두륜산 대흥사기행 제3부) 노승봉에서 두륜봉으로(1/2) (0) | 2018.10.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