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0. 20. 15:01ㆍ국내 명산과 사찰
(두륜산 대흥사기행 제6부) 유네스코지정 ‘한국의 산지승원' 해남 두륜산 대흥사 제1부
해남 두륜산 대흥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로
대둔사(大芚寺) 또는 '한듬절'이라 부르기도 한다.
《만일암고기(挽日菴古記)》에 따르면 신라의 승려였던 정관(淨觀)이
서기 426년에 창건했다고 전해지며, 《죽미기(竹迷記)》에는 544년 아도화상이
창건한 것을 자장과 도선(道詵)이 중건했다고 되어 있다.
이로보아 창건자는 분명하지 않으나 공통된 점은 신라 말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대흥사의 창건연기를 전하고 있는 자료로는
『죽미기(竹迷記)』, 『만일암고기(挽日菴古記)』, 『북암기(北菴記)』 등이 있으며, 1
823년(순조23) 간행된 『대둔사지(大芚寺志)』는
이들 자료를 종합한 내용과 함께 이때까지의 사찰역사를 총정리해 놓은 중요 자료로 여겨지고 있다.
이러한 자료에도 불구하고 대흥사의 창건설에 대하여 검토할 것이 많다.
첫 번째로 426년(백제 구이신왕7)의 신라 정관존자(淨觀尊者) 창건설이다.
신라의 정관스님이 426년 대흥사 산내 암자의 하나인 만일암을 창건한 후
508년(무령왕8)에 이름을 알 수 없는 선행(善行) 비구가 중건하였다고 하나
안타깝게도 이 자료에서 창건주로 소개한 정관존자는
생애나 활동 내용이 전혀 알려진 바가 없는 인물이다.
둘째로, 『죽미기』는 544년(신라 진흥왕5) 아도화상(阿度和尙)의 창건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또한 자장(慈藏)스님과 도선(道詵)스님이 계속해서 중건하였다는 기록도 함께 실려 있다.
김천 직지사의 〈사적기 事蹟記〉에 의하면 「신라 시대인 418년(눌지마립간 2)
아도화상(我道和尙)이 선산 도리사를 개창할 때 함께 지었던 절이라고 한다.」 라는 기록이 있는데
연대로 보아 아도화상이 동일 인물인지 의심이 간다.
대흥사 창건설 연대는 물론 창건주에 대한 이설(異說)이 있지만,
현재 사찰 내에서는 대체로 아도화상의 창건설을 따르고 있다.
따라서 현재로써는 대흥사의 정확한 창건 시점을 밝히기가 매우 어려운 점은 있지만
분명한 것은 응진전(應眞殿) 앞에 세워져 있는 삼층석탑의 제작 연대가
통일신라 말기 경으로 추정되고 있어 대흥사는 늦어도 통일신라 말기 이전에 창건된 고찰임은 분명하다.
~홈피~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로 대둔사(大芚寺)라고도 한다.
《만일암고기》(挽日菴古記)에 따르면 신라의 승려였던 정관(淨觀)이 서
기 426년에 창건했다고 전해지며, 《죽미기》(竹迷記)에는
544년 아도화상이 창건한 것을 자장과 도선(道詵)이 중건했다고 되어 있다.
이로보아 창건연대는 분명하지 않으나 대흥사 창건은 신라말기로 추정할 수 있다.
대흥사의 대웅전은 1665년부터 1667년에 걸쳐 심수가 중창했으며,
현판은 조선 후기의 명필 이광사가 썼다.
대웅전 앞 백설당에는 김정희가 쓴 '무량수전'이란 편액이 있고,
동쪽 응진전 앞에는 대흥사응진전전3층석탑(보물 제320호)이 있다.
대흥사는 2018년 6월 30일 유네스코 제42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산사(山寺), 한국의 산지승원'이라는 명칭으로 1천 년 넘게
우리 불교문화를 계승하고 지킨 종합승원 7곳 가운데 하나로
그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한국의 13번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함께 등재된 다른 여섯 곳은 양산 통도사, 영주 부석사, 안동 봉정사,
보은 법주사, 공주 마곡사, 순천 선암사이다.2018
년 6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창건연대는 분명하지 않으나 신라말로 추정되는 대흥사는
지금까지 13명의 대종사(大宗師)와 13명의 대강사(大講師)를 배출한 명찰로
임진왜란 이후 승군의 최고지도자이며 선교양종 도총섭이었던
서산대사 휴정(1520~1604) 의 의발(衣鉢)을 모시면서 선교 양종의 대도량으로 발전하였다.
1667에 대웅전을 중건하였고(현재 의 건물은 화재 후 1901년 중수), 1669년에는 표충사를 건립하였다.
가람의 배치는 『대둔사지(大芚寺誌)』(1823)의 기록에 나타나듯이
절을 가로지르는 금당천을 사이에 두고 북쪽과 남쪽으로 나누어 당우들을 배치하였는데,
현재 북원에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명부전, 응진전, 산신각, 백설당, 청운당이 자리잡고 있으며,
남원에는 천불전을 중심으로 용화당, 가허루, 봉향각,
동국선원, 종무소 등이 또 하나의 군을 이루어 배치되어 있다.
또한 남원의 오른편에는 표충사와 부속건물, 성보박물관이 있고
그 뒤편에 대광명전 영역이 별원을 형성하고 있다.
부도전은 일주문을 막 지나 오른편에 자리하고 있다. 나지막한 담장 안에 다양한 모습을 갖춘
부도(浮屠)와 탑비(塔碑)가 모두 80여기(부도 54기와 탑비 27기 )에 이르고 있다.
부도의 배치는 일정한 간격을 두지 않고 3~4열을 이루고 있어 무질서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무질서 속에서 조화로움을 느낄 수 있다.
이곳의 부도는 대부분 조선시대 후기에 건립된 것이다.
부도와 탑비의 주인공들은 모두 임진왜란 이후 대흥사를 중흥시키고 크게 빛낸 스님들로서,
서산대사를 비롯하여 풍담(楓潭)ㆍ취여(醉如)ㆍ월저(月渚)ㆍ설암(雪巖)ㆍ환성(喚惺)ㆍ
호암(虎巖)ㆍ설봉(雪峯)ㆍ연담(蓮潭)ㆍ초의(草衣) 등의 대종사와, 만화(萬化)ㆍ
연해(燕海)ㆍ영파(影波)ㆍ운담(雲潭)ㆍ벽담(碧潭)ㆍ
완호(琓虎) 등의 대강사, 그밖에 고승대덕들의 부도이다.
서산대사 부도는 현재 보물제1347호로 지정되어 있다.
@임진왜란 이후 서산대사의 의발이 전수되면서 17~18세기 서산종의 종찰로
선·교 양종의 대도량 역할을 한 사찰인 대흥사 경내에는 국보 제308호 대흥사북미륵암마애여래좌상을 비롯하여
국가지정문화재 7점과 시도지정문화재 6점, 그리고 13대종사와 13대강사 등의 부도와 비석들이
소재한 역사적·학술적으로 중요한 유적지이다.
1975년 9월 2일 명승 제4호 '해남 대둔산'으로 지정되었다가
1998년 12월 23일 사적 및 명승 제9호 '해남 대둔산 대흥사 일원'으로 재분류되었다.
부도밭을 지나 대흥사에 들어서면 천왕문 대신 해탈문이 나타난다.
2002년에 건립된 대흥사 해탈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로, 겹처마 맞배지붕을 올렸다.
내부에는 사자를 탄 문수동자와 코끼리를 탄 보현동자가 있으며,
현판 ‘두륜산대흥사(頭輪山大興寺)’와 ‘해탈문(解脫門)’의 글씨는
해사(海士) 김성근(金聲根, 1835~1919)이 쓴 것이다.
외부에는 협칸 3면에 도륜(道倫) 박태석(朴泰錫)이 그린 ‘부모은중(父母恩重)’ㆍ‘염화신중(拈花神衆)’ㆍ
‘점성가제도(占星家濟度)’ 등이 주제별로 장엄되어 있으며,
2002년 해탈문 건립 당시 단청과 함께 조성되었다.
(보현동자)
문수동자
대흥사에는 특이하게도 사천왕상이 없다.
사천왕상이 없는 이유는 북으로는 영암 월출산, 남으로는 송지 달마산,
동으로는 장흥 천관산, 서로는 화산 선은산이 대흥사를 감싸고 있기 때문에
풍수적으로 완벽한 형국을 취하고 있어 사천왕상이 세워져 있지 않다고 한다.
비로자나불의 지권인(智拳印)을 상징하듯 올연(兀然)한 두륜산 가련봉의 위용
관음33응진전
문수전
심검당
표충사(본방두륜산기행5부참조)
표충사는 절에서는 흔하지 않은 유교형식의 사당으로, 서산대사를 중심으로,
사명당 유정, 뇌묵당 처영스님의 화상을 봉안하고 있다.
표충사 옆에 초의선사 동상이 있고 그 옆에 승보박물관이 있다.
초의선사 동상
초의(草衣)선사는 한국의 다성(茶聖)으로 불리며, 조선의 다경(茶經)으로 불리는 《동다송(東茶頌)》을 써서
조선 차의 우수성을 알렸고, 다도의 정신과 선(禪)이 하나라는 다선일미설(茶禪一味說)을 강조했고,
또 찻잎을 따서 덖고 우리고 마시는 법을 상세히 기록한 《다신전(茶神傳)》을 남겨
조선의 다도를 정립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초의선사의 본명은 의순(意恂)이다. 의순(意恂: 1786~1866년)스님은
조선 후기의 승려로, 호는 초의(草衣), 성은 장(張), 자는 중부(中孚)이다.
(생애)
15세에 병으로 죽을 고비를 넘긴 뒤 남평(南平) 운흥사(雲興寺)에서 승려가 되어
금담(金潭)에게서 선(禪)을 닦고, 윤우(倫佑)의 법을 이어받았다.
산스크리트어 및 신상(神像: 신령의 화상이나 초상)에 능했고,
정약용에게서 유학과 시문(詩文)을 배웠다. 신위(申緯) · 김정희(金正喜) 등과 사귀면서
해남의 두륜산(頭輪山)에 일지암(一枝庵)을 짓고 40년간 지관(止觀)을 닦았다.
서울 봉은사(奉恩寺)에서 《화엄경》을 새길 때 증사(證師)가 되었고,
달마산(達摩山) 무량회(無量會)가 창립되자 강석(講席)을 주재하였다.
의순은 자신의 저서 《선문사변만어(禪門四辨漫語)》를 통해
긍선(亘璇)의 《선문수경》의 주장을 반박하여,
여래선 이외에 의리선이 따로 있을 수 없으니 두 가지 선밖에 없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초의 스님은 해남 대흥사(大興寺)에 오랫동안 주석하면서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대선사로서 선의 법맥을 이어 갔다.
시(詩)·서(書)·화(畵)·다(茶)에 뛰어나 사절(四絶)이라 불렸는데,
특히 그림을 잘 그려 불화나 인물화 등 대흥사에 있는 그림은
거의 대부분 초의 스님이 그렸을 정도였다고 한다.
스님은 남종화의 거두인 소치 허유를 길러 내기도 했다.
초의 스님은 ‘한국의 다승’으로 우리나라의 다도를 정립했다.
대흥사를 중심으로 직접 차를 기르고 좋은 종자를 개발하는 데도 힘써
그 지역을 차 문화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또한 <동다송(東茶頌)>과
<다신전(茶神傳)>을 비롯해 수많은 다시(茶詩)를 지어 다도의 이론적 확립을 모색했다.
스님의 선 사상 역시 다선삼매(茶禪三昧)라는 명칭이 붙을 정도였으니,
스님에게 있어 차는 “불가의 오랜 음다풍(飮茶風)을 넘어서서
예술과 선 수행의 경지로까지 승화했다”는 말로 표현할 수 있겠다.
유물전시관인 성보박물관에는 서산대사의 가사와 발우, 친필선시,
신발, 선조가 내린 교지 등 유물과 정조가 내린 금병풍 등이 보관돼 있다.
<무염지(無染池)>
초의선사가 조성한 연못이다. 초의선사가 조성한 무염지(無染池)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항상 깨끗한 곳‘ 너무나 아름다운 이름의 연못,
실용면에서는 '향로봉의 화기를 막는다'는 풍수에 근거하고 있으며
실제로 화재시 물 공급지의 역할도 가능하다고 한다.
특히 무염지의 전체적인 배치는 절묘한 굴곡모양 연못과
중심에 위치하지 않은 작은 섬을 만들어 놓아 보는 위치에 따라 모양이 다르게 보이며,
특히 절에서 바라보면 마음 '심 (心)자 모양으로 보인다고 한다.
봉향각, 천불전 계단 아래 좌측에 위치하고 있다.
천불전 좌우에는 학승들이 기거하는 용화당(龍華堂)은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93호로 지정되어 있다.
천불전은 대흥사 남원(南院)의 중심 불전이다.
큰 대문채와 같이 평범한 단층 5칸 맞배집으로 구조된
가허루의 중앙 문간을 거쳐 천불전 안마당에 들어서면
정면의 높은 장대석 축단 위에 서향하여 자리한 천불전이 마주보이고
왼쪽에는 봉향각이, 오른쪽에는 옛 강원이던 용화당이 마당을 둘러싸고 있어 독립된 공간을 구성하고 있다.
대웅전에 비하여 마당은 크지 않지만 공간에 맞게 각 건물의 규모와 형식을 갖추었고,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 팔작집인 천불전은 높은 장대석 축단 위에 자리하고 있어
남원(南院) 공간의 중심건물로서 격식과 품위가 느껴진다.
천불전은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48호로 지정되었다가 보물 제1807호로 지정되어 있다.
1811년(순조 11)에 불탄 것을 1813년 중건한 것으로,
6년에 걸쳐 경주 옥돌로 만든 천불상(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52호)이 봉안되어 있다.
천불전은 1811년에 실화로 소실된 것을 1813년에 다시 지은 건물이다.
「千佛造成略記」에는 1811년 (嘉慶16년) 2월에 화재가 발생하여
지장전, 팔해당, 용화전, 적조당, 천불전, 대장전, 약사전,
가허루 가 하룻밤에 모두 불에 탔다고 기록하고 있다.
2년 후에 다시 건물을 지었는데 당시 중건주는
1813년에 초의선사의 스승인 완호(玩虎)대사와 제성(濟醒)대사이었다.
완호대사는 건물의 중건뿐만 아니라 경주 기림사로 가서 화원들에게 천불을 조성토록 하였다.
@『대둔사지(大芚寺誌)』에 의하면 천불전은 조선시대인 1811년(순조 11)에 화재로 불탔으나
2년 뒤인 1813년에 중건되고, 1817년에 조성된 천불상(千佛像)이 봉안되어 있다.
이 천불상은 경주 옥석으로 조성되어 해남 대흥사로 옮기기 위해
1817년 11월, 2척의 배에 실렸으나 1척이 풍랑으로 표류해 일본까지 갔다가 돌아와
1818년 8월 15일 천불전에 추가로 봉안되었다. 이에 대한 자세한 경위는
전라남도 화순 쌍봉사(雙峰寺)의 화원승(畵員僧)으로 대흥사 천불전의 천불 조성을 담당했던
풍계현정(楓溪賢正)이 기록한 『일본표해록(日本漂海錄)』(1821년)에 기록되어 있어,
천불전의 중건과 천불 조성 및 봉안의 역사에 대해 명확히 알 수 있다.
천불전은 자연석 주초 위에 흘림이 있는 두리기둥을 사용하였으며,
전면 우주는 유난히 굵은 기둥에 흘림을 강하게 주어 사용하였다.
간살은 정면 협칸, 측면의 3칸이 2,490mm으로 동일하고,
정면 어칸만 이보다 큰 3,470mm이다. 공포의 배열도 정면 어칸에만 2조의 간포를 배치하고
나머지는 모두 하나씩 배치하고 있어 동일한 공포의 간격에 따라 주간을 설정한 하였다.
천불전은 천불조상을 모시기 위하여 처음부터 계획된 건물로
충분한 내부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평면도 거의 정방형에 가까우며, 내진주 없이 통칸으로 처리하였다.
이에 맞추어 가구구조는 전후 평 주위에 대들보를 걸친 무고주 5량가이다.
대들보는 자연스럽게 휘어진 곡재를 사용하였고, 종보 위에 판대공을 설치하여 종도리를 받는다.
공포는 외3출목, 내4출목 구조이며 살미첨차는 간결하면서 강직하게 구부러져
끝에서 예리하게 솟아오르며 연봉으로 장식하였고, 내부는 초각이 화려하다.
내부는 전체가 하나의 닫집과 같이 불단 위를 장엄하고 있으며,
평면의 반을 경사진 불단을 설치하고 그 위에 목조삼존불과 옥석으로 만든 천불상을 봉안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불단 상부는 제공의 연 봉이 천장까지 이어지면서
충량 머리를 장식하는 용두, 우물반자, 빗반자의 장식들과 함께 일체화 되어 법당 안을 화려하게 장엄하고 있다.
불전의 장엄은 외부에서도 나타나는데, 어칸의 기둥 상부에는
내외부로 연결되는 용두형 안초공을 설치하였으며, 전면 창호는 모두 아름다운 꽃살창으로 장식하였다.
이와 같은 불전의 장식적 수법은 조선 후기 사찰건축의 시대적 특징이다.
천불전은 1813년에 중건된 건물로 대흥사 남원의 중심건물로서 격식을 갖추고 있으며,
「일본표해록(日本漂海錄)」(楓溪 賢正, 1821) 등을 통해
건물의 중건과 천불 조성 및 봉안의 역사를 명확히 알 수 있다.
건축적으로는 평면 비례, 공포 배치, 상부가구 등에서 천불을 봉안하기 위한 합리적인 계획수법을 볼 수 있으며,
공포의 구성과 세부적 조각수법, 빗천장과 우물천장의 장식과
구성, 창호 등은 화려하지만 지나치지 않고 구조 또한 견실하다.
이러한 공포, 빗천장, 우물천장 등의 구성 및 세부적 수법은
인근의 국가지정문화재(보물)인 미황사 대웅전(1754), 불갑사 대웅전(1764),
불회사 대웅전 (1808) 등과 유사한 수법을 보여주고 있어 비교되어 가치가 높다.
이처럼 대흥사 천불전은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천불전 건물을 대표할 수 있는 건물로서
역사적, 학술적으로 국가지정문화재(보물)의 가치가 충분한 것으로 평가된다.
연리지
~제2부에서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한 북원의 전각들이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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