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제통문(羅濟通門)

2018. 9. 18. 18:34명승지

 

 

 

 

나제통문(羅濟通門)

김제 청암사를 마지막으로 귀경 하는 길 석문을 통과하게 되었다.

차에서 내려 둘러보니 나제통문(羅濟通門)이었다.

나제통문(羅濟通門)은 전라북도 무주군 설천면에 있는

석모산 인근에 기암절벽을 뚫어 만든 통문으로,

높이 3m, 길이 10m의 인공동굴로 무주구천동 입구에 위치하며 덕유산국립공원에 속해 있다.

윗부분에 '羅濟通門(나제통문)'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 지역은 신라와 백제의 국경 관문으로,

 옛적에는 이 통문을 중심으로 동쪽은 신라 땅이고 서쪽은 백제 땅이었다.

나제통문이란 이름은 이러한 연유로 유래되었고,

신라와 백제 양국에게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점이었다는 사실은 삼국사기를 통해 추측할 수 있다.

 

 

 

지금도 동굴 양쪽에 위치한 자연부락인 무풍 방면의 이남(伊南)

무주 방면의 새말新村1정도 떨어져서 행정구역으로는 모두 소천리에 속하지만

언어와 풍속이 서로 다르고 통혼(通婚)도 하지 않는다고 한다.

러므로 삼국시대부터 지금까지 각기 풍속과 전통이 판이하게 유지되어왔음을 알 수 있다.

 

 

 

 

 

이곳에는 삼국시대와 관계된 유적이나 전설이 많다.

부근의 야산에 산재한 약 3백여 기의 고분은 신라와 백제간에 벌어진 전투에서

전사한 장병들의 무덤이라고 전해지며, 파리소()라는 연못은

양국의 격전시에 시체가 산처럼 쌓여 파리가 모여들었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귀경길이나 들리지 못해 다소 아쉬움이 남았던 곳이다.

 

 

나제통문은 삼국통일 전쟁시에

신라의 장군 김유신(金庾信)이 왕래했다고 하여 통일문(統一門)’이라고도 불린다.

인근의 무산성지(茂山城址) 근방 사선암(四仙巖)이라는 크고 평평한 바위는

 김유신 등 4명의 화랑이 바둑을 두며 놀던 장소라고 전해지며, 지금도 바위에 바둑판이 새겨져 있다.

이러한 전설의 사실여부는 확인할 수 없으나,

확실한 것은 이 지역이 신라·백제 양국의 전쟁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는 점이다.

 

 

신라·백제 양국은 5세기 이전에는 주로 조령·죽령 방면과 추풍령 방면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그 뒤 가야 제국(加耶諸國)이 신라에 흡수되어

소백산맥을 경계로 백제와 맞대게 되면서부터 양국은 육십령(六十嶺)을 넘나들며 전투를 벌였다.

 

 

 

통문은 육십령 부근에 위치하고 있어 실제로 신라군과 백제군이 자주 내왕했을 것이고,

 삼국사기에 김유신이 백제의 장군 의직(義直)

무산성(茂山城 : 지금의 전라북도 무주)에서 싸웠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김유신에 관한 전설도 근거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통문은 삼국시대가 아닌 후대에 통문의 역사적 의미가 전해져 내려오다가

이를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혹은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졌다고도 한다.

 

 

 

이 통문이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삼국시대 당시에 만들어진 것은 아니라고 추정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일제강점기에 일제가 수탈을 위해

김천과 거창을 잇는 신작로를 내면서 뚫은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우리나라에서 석문으로서 유명한 곳은 이곳 외에도 태백의 구문소 석문이 있다.

 

 

구문소

 

 

 

 

 

 

 

 

 

나제통문을 벗어나면 바로 옆에 동상과 정자가 있다. 편액을 보니 의병장 강무경 동상이다.

강무경(姜武景)은 강윤수라고도 하며, 1878(고종 15)에 출생하여 1910년 사망했다.

전라북도 무장 출신. 필묵상을 경영하던 중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1906년 심남일(沈南一, 또는 沈守澤)로부터 의병을 일으키자는 서신을 받고

기삼연(奇參衍), 김준(金準),김율(金聿) 등과 협의하여

김율의 의진에 입대, 심남일과 더불어 부장으로 활약하신 분이다.

 김율이 전사하자, 심남일을 통수로 추대하고 전군장(前軍將)이 되어

의병을 거느리고 전라남도 일대에서 크게 활약하였다.

 

 

 

1907년 김율이 죽자, 심남일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선봉장이 되었다.

그의 부대는 19083월부터 10월에 걸쳐 강진 오치동, 장흥 곽암, 남평 장담원, 능주 노구두,

영암 사촌, 나주 반치, 능주 돌정 등지에서 일본군과 싸웠다.

이듬해 봄부터 전투를 재개하여 3월부터 5월에 걸쳐

남평 거성, 능주 풍치, 보성 천동 등지에서 일본군에 큰 타격을 주었다.

그러나 7월 장성 동치(洞峙)전투에서 일본군에 대패하자,

순종이 내린 해산 조칙(詔勅)에 따라서 부대를 해산했다.

그뒤 풍치의 바위굴에서 은신생활을 하던 중 826일에 일본군에 붙잡혀,

12월 광주에서 대구감옥으로 이감된 뒤, 32세의 젊은 나이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1962년 건국훈장국민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