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천태산 고승들의 기담(6) 한산사와 풍교야박(楓橋夜泊)

2018. 6. 29. 21:34경전속의 우화들




중국 천태산 고승들의 기담(6) 한산사와 풍교야박(楓橋夜泊)

 

@ 한산사는 중국 강소성 소주시(蘇州市)에 있는 사찰이다.

우리나라보다 일본에 더 잘 알려진 유명사찰로 이 절은

남북조 시대의 남조 양나라 천감 연간(502- 519), 무제 시대에 창건되었다.

창건 당시는 조그마한 암자였으며 사찰명도 묘리보명탑원(妙利普明塔院)’이었는데,

천태산 국청사의 삼은(三隱)으로 알려진 한산과 습득스님이 이 절에 와서 주지로 부임하면서

사세도 커지고 이름도 한산사(寒山寺)로 바뀌었다.

대가람으로서 규모를 갖추기 시작한 것은 8~ 9세기이며,

조계6조 혜능의 법맥을 이은 석두희천(石頭希遷 : 700~790)에 의해 진행되었다고 전한다.

전성기의 한산사의 면적은 광대하였고,

당시에는 말을 타야 절의 정문을 본다고 말해질 만큼 넓었다고 전하며,

중국의 10대 사찰 중 하나로 꼽힌다.

 

그 후 한산사는 전란과 화마(火魔)로 여러 번 소실되었다가

 보명선원(普明禪院)이라고 개명되기도 했다.

청나라 강희제 50, 1711년과 함풍 101860년에 태평천국의 난으로 다시 소실되었다.

지금의 한산사는 청나라 광서제 321906년에 정덕전이 재건한 것이라고 한다.

 

한산사가 세인(世人)의 입에 오르내리게 된 것은

 당()나라 때 시인 장계(張繼)가 풍교(楓橋) 및 한산사를 배경으로 지은

 풍교야박(枫桥夜泊)이라는 시로 말미암은 것이다.

이 시는 중국인민초등학교 교과서에도 등재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당대의 유명한 시로 회자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한산을 기리는 고려 때 사찰로 추정되는

한산사지(漢山寺址)와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63호로 지정된 한산사지삼층석탑이 전남 화순에 남아있다. 

 

(풍교가 있는 한산사 옛풍경)

  

@楓橋夜泊(풍교야박) / 밤에 배를 풍교에 대다

~ 장계(張繼)~

 

月落烏啼霜滿天(월락오제상만천)

달은 지고 까마귀 울며 하늘엔 찬서리 가득한데

江楓漁火對愁眠(강풍어화대수면)

강가의 단풍 고깃배 등불 마주 대하니 근심 속에 잠이 안 오네

姑蘇城外寒山寺(고소성외한산사)

고소성 밖 쓸쓸한 한산사에서

夜半鐘聲到客船(야반종성도객선)

깊은 밤 종소리 뱃전까지 들려오네!

 

당나라 때 오로지 과거시험에만 희망을 걸고 준비하며 평생을 가난하게 산

장계(張繼)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56세 때 과거에 세 번째 낙방하고 실의에 빠져

운하를 따라 배를 저어 고향으로 돌아가다가 소주의 한산사 근처를 지나게 되었다.

날은 저문 지 오래되어 달마저 서산에 진 깊은 밤 한산사에서 얼마 멀지 않은

풍교라는 다리에 배를 대고 피곤한 몸 쉬고자 하나 여러 근심 걱정으로 잠을 이루기 어려웠다.

그때 한산사로부터 종소리가 들려 더 서글픈데

그 심사를 시를 지어 달랬다고 하며 이 시로 인하여 한산사는 유명해졌다.

 

장계가 머물렀던 소주(蘇州)에서 당시 당나라 수도였던 장안까지는

 어림잡아도 족히 수천 km가 떨어진 곳이다. 그 먼 거리를 과거를 보러 걸어서

3번씩이나 오르내리면서도 낙방한 장계의 슬픔이 오죽했으랴.

당나라에서도 당시 음서(蔭敍)가 유행했었는데 장계는 그런 운도 없었던 모양이다.

 음서(蔭敍)제도란 사대부와 같은 특권 신분층인 공신·양반 등의 신분을 우대하고

 유지하기 위해 친족·처족 등의 음공에 따라 그 후손을 관리로 서용하는 제도를 말한다.


이 시는 중국 교과서는 물론이요, 일본의 교과서에도 실려 모르는 이가 드문 명시라고 한다.

 지금 한산사와 풍교는 출세를 바라는 젊은이들이나 시험을 앞둔 수험생들이 많이 찾아와

한산사에 있는 시비(詩碑)나 종, 인근 운하의 풍교에 있는 장계의 동상에 기원하거나

 만져보고 가는 명소가 되어있다고 한다.

이 시는 중국, 일본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하지만,

 장계의 다른 시는 아마 전해지는 것이 없는 것 같다.

장계는 이 시 한 편으로 당나라 시대의 대시인 두보, 이백, 백거이 등과 함께

당을 대표하는 시 300선에 올리는 시인 중의 하나가 되었다고 한다.

 



이 시에 대하여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으로 알려진 구양수(歐陽脩, 1007~ 1072)

()는 뛰어나지만, 밤 중에 종을 치지는 않는다 하여,

 밤에 친 종을 둘러싸고 다양한 논쟁이 있었다.

그러나 당()의 시선(詩仙)으로 칭하는 백거이(白居易:772~846))의 시에서

 반야종이라는 단어가 보이는 등 밤 중에도 종이 울렸다고 읊은 한시의 예가 많다는 반론이 있었다.

당나라 때는 밤중에 시각을 알리는 종을 쳤으며,

송나라 때 그러한 제도가 없어서 논쟁이 격발한 것이다.

구양수는 송대의 시인이다.






장계의 생몰연대가 밝혀지지 않아 아쉬움이 남는다.

장계의 시 한수를 더한다.

@재박풍교(再泊楓橋)/ 장계

白髮重來一夢中(백발중래일몽주)

靑山不改舊時容(청산불개구시용)

烏啼月落寒山寺(오제월락한산사)

欹枕尙聽半夜鐘(의침상청반야종)

 

풍교에 다시 배를 대다./장계

백발이 되어 꿈속에 다시 여기 오니

청산은 바뀌지 않아 옛 모습 그대로구나.

까마귀 울고 달이지는 한산사

베개 기대어 밤 중의 그 종소리 옛적대로 듣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