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천태산 고승들의 기담(2) 국청사의 기인 삼은사(三隱士) 이야기

2018. 6. 23. 14:08경전속의 우화들

중국 천태산 고승들의 기담(2) 국청사의 기인 삼은사(三隱士) 이야기

 

중국 절강성 천태산 국청사(國淸寺)는 천태지의 대사를 개조로 하는

중국 천태종의 본산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걸출한 많은고승을 배출하기도 하였지만,

알려지지 않은 많은 고승들의 괴담(怪談)이나 기행(奇行) 그리고 선시(禪詩) 등도 전래 되고 있다.

 

천태산에 산문을 연 천태종의 개조(開祖) 천태대사 지의(智顗: 538~597)

수나라(581~618) 시대의 승려로, 선사 나이 38(576) 때에 천태산에 들어와

 11년 동안 수행 정진하였으며, 52세 때 진나라가 수나라에 의해서 망하자 여산에 은둔하였다.

 

천태지의가 여산에 칩거하고 있을 때 수나라 진왕 광의 간곡한 초청을 받아드려

 591년 양주로 내려가 진왕 광에게 보살계를 주고 <지자대사>란 칭호를 받았다.

이후 고향인 형주로 돌아가 옥천사를 건립하고 그곳에서 자신의 사상을 펼쳤다.

옥천사는 대통신수(大通神秀:606~706)가 거주하며

자신의 선법을 펼치던 사찰이며, 그의 사리탑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천태지의는 595년 진왕 광의 초청으로 다시 양주를 방문하게 되며,

이곳에서 진왕을 위해 정명현의를 저술하여 증정했다.

이후 천태산으로 은퇴한 후 597년 선사 나이 60세로 열반하였다.

 

<천태산지에 의하면, 천태산의 사찰은 정식 사찰만 62개소, 암자가 14개소, ()9개소,

그밖에 당() 2개소, () 5개소, () 5개소 연사(蓮社) 1개소가 있었다고 한다.

이중 천태대사가 세운 천태산 사찰만 18개나 된다고 한다(王士性入天台山志).

그중에서도 천태대사의 12 사찰이 유명했다고 하는데, 어떤 사찰이 여기에 속하는지 현재는 알 수 없다.

 현재 천태산에는 국청사를 비롯해 진각강사, 화정사, 만년선사, 고명사 등이 남아 있다.

 

@ 국청사(國淸寺)의 창건 유래를 보면 국청사는 천태대사가 설계를 완성하고

그 둘째 상자인 장안 관정이 수양제에게 불사를 부탁하였으나 양제가 거절하였는데

대사가 열반에 들자 뒤늦게 양제는 후회하고

대사에게 보은의 의미로 보은사(報恩寺)를 지어 올렸다.

보은사가 국청사의 전신인데 국청사로 개명된 유래는

천태대사가 산에 들어와 선정을 닦을 때 정광(定光) 선사가 꿈에 나타나

 사찰이 완성되면 나라가 곧 맑아지니 국청사(國淸寺)라 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한 定光선사가 定光佛化身을 의미하는지 지 분명치 않다.

정광불(定光佛)은 연등불, 등광불(燈光佛), 정광불(錠光佛) 등으로 의역하며,

음역으로는 제화갈라(提和竭羅), 제원갈(提洹竭)로 표기한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천태대사가 절을 지으려고 이곳을 유람할 때

 항상 석교(石橋)에서 지냈는데 어느 날 검은 두건을 쓰고

붉은 옷을 입은 세 노승을 만났는데 그중 한 노승이 이르기를

선사가 절을 짓고자 한다면, 황태자의 절터가 있으니 우러러 희사할 것이라고 했다.

 천태대사는 띠 집 하나 짓는 것도 어려운데 어느 때에 절을 짓겠느냐?” 고 한스럽게 되받자,

 그 노승이 답하기를 아직은 때가 되지 않았습니다. 삼국이 통일되면 한 세력가가 이 절을 일으킬 겁니다.

 절이 이루어지면 나라가 맑아질 것이니 이름을 국청사라 하십시오라 했다는 것이다.

 

그의 예언대로 국청사는 천태대사가 입적한 바로 이듬해인 개황 18(598)

진왕 광(, 훗날 수양제가 됨)의 시주로 불사를 시작하여 인수 원년(601) 건립됐다.

처음에는 天台寺(천태사)'로 사명(寺名)을 정했다가,

지조(智璪)가 나서서 천태대사의 꿈이야기를 내세워

 605년 정광선사가 알려 준 대로 국청사(國淸寺)라 개명했다고 한다.

(국청사한중 조사전에는 중앙에 지의대사를, 좌우에 상월원각대조사와 대각국사 의천 영존상이 모셔져 있다)

   

국청사는 그동안 몇 차례의 훼손과 중수를 거쳤다. 회창의 법난(841~846) 땐 모두 불타고,

대중 5(851) 중건된 뒤 송대 경덕 2(1005) 경덕국청사(景德國淸寺)라고 절 이름이 바뀌기도 했다.

 그 후 전란으로 전각이 훼손됐다가 건담(建炎) 2(1128) 다시 중건했다.

2년 후인 1130년부터는 선() 사찰로 바꿔 강남 10사찰 중 하나로 꼽히기도 했다.

()대에는 선과 함께 천태종의 활약이 두드러지면서,

원나라 정원 원년(1295) 고승 성징(性澄)의 노력으로 마침내 국청사는 천태종 사찰로 회복됐다.

그리고 명나라 융경 4(1570) 재차 중건되고,

현재의 모습은 청나라 옹정 연간(1723~1735)에 지은 것이다.


(한산 습득도)


당나라 때 국청사에 풍간(豊干)이라는 선사와

그의 제자로 알려진 한산(寒山)과 습득(拾得)이라는 두 스님이 있었다.

이 세 명은 모두 괴팍한 성격을 지닌 기인(奇人)으로

그들의 기벽(奇癖)과 기행으로 국청사 삼은사(三隱士)로 불리었으며,

 그들의 기벽(奇癖)과 기행(奇行)

오늘날 선종화(禪宗畵)의 테마가 되어 단골 주인공으로도 등장하기도 한다.

이들 삼인이 모두 실존 인물인지 아닌지는 알려진 것은 없다.

세 사람은 시를 잘 지었으며 그 중 한산은 중국 선시(禪詩)의 일인자로 불릴만큼 잘 알려져 있는데

 이들 삼인이 지은 시를 삼은시(三隱詩)라 일컬는다.

이들은 또한 한산은 문수보살(文殊菩薩), 습득은 보현보살(普賢菩薩),

풍간선사는 아미타불의 화신(化身)으로 거론되기도 한다.

 

@세사람의 행적을 살펴보면

한산(寒山)은 속가(俗家)에서의 성씨나 법호 등 아무것도 알려진 것이 없어서

사람들이 그를 한산(寒山), 한산자(寒山子), 빈자(貧子) 등으로 불렀다.

() 태종(太宗) 정관(貞觀: 연간627~649) 절강성(浙江省) 천태산(天台山)

한암동(寒巖洞: 寒山)에 은거했다고 전하지만 자세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일설에는 당나라 말기의 인물들이라고도 한다.

 

현재까지 확인된 한산에 관한 행적기록은 모두 여구윤(閭丘胤)의 서문에 근거한 것으로,

문헌의 성질에 따라 다소 윤색이 가해지고 있다.

 예를 들면조당집(祖堂集)16이나 송고승전11에는

 위산선사(潙山: 771853)가 천태산에서 한산을 만났던 일이 기록되어 있다.

 고존숙어록(古尊宿語錄)14과 지남(志南)

 천태산국청선사삼은집기(天台山國淸禪寺三隱集記)에는

조주(趙州)화상(778897)도 그를 만나 문답을 했던 것으로 되어 있다.


 

한산은 중국 선시(禪詩)의 일인자로 꼽히는 데 그 이름의 유래는

 국청사가 있는 천태 시풍현(始豊縣)의 서쪽 70리쯤 떨어진

 한암(寒巖)이라 불리는 바위굴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렇게 불린 것이다.

몸은 바싹 마르고, 미친 사람처럼 보였다고 하며,

늘 국청사에 와서 습득(拾得)이 대중이 먹고 남은 밥을 모아 가져다 주면

이를 대나무통에 넣어서 둘이 서로 어울려 먹었다고 한다.

또 시를 잘하였는데 특히 세 인물 가운데 한산이 대표격인 시인으로서

그의 시는 세상 풍자가 심하고 인과응보의 내용을 담은 특이한 형태의 시들이다.

그의 시는 흥에 겨워 나뭇잎이나 촌가의 벽에 써놓은 것을 모은 것이라 한다.


(한산과 습득/한산습득도)

그의 시집에는 314수가 들어 있으며, 습득의 시 60, 풍간의 시 6수도 포함되어 있다.

어느 날 태주자사(台州刺史) 여구윤(閭丘胤)이 한암(寒巖)에 찾아가서 옷과 약 등을 주었더니,

 한산은 큰 소리로 도적놈아! 이 도적놈아! 물러가라하면서

굴속으로 들어간 뒤에는 그 소식을 알 수 없었다 한다.

그가 죽은 연월도 당 현종의 선천 때(712~713), 태종의 정관 때(627~605),

현종의 원화 때(806~820) 등 여러 설이 있다.

 

@습득(拾得)은 한산과 같이 중국 당나라 때 사람으로 이름이 없다.

다만 천태산 국청사에 있던 풍간(豊干)선사가 산에 갔다가

 적성도(赤城道) 부근에서 우연히 강보에 싸인 아이를 거두어 길렀다 하여 습득(拾得)이라 불렀다.

 한산(寒山)과 친히 사귀었고 풍간이 산에서 나온 뒤에 한산과 함께 떠난 뒤로 소식을 알 수 없었다고 한다.


(풍간선사/한산습득도)  

@풍간(豊干)선사 당나라 때 국청사에 머물렀다는 것 외에 어떤 사람인지 알려진 것은 없다.

다른 야사에서는 국청사 장경각 뒤편에 전각에 머물렀다고 하며,

그의 방에는 사람은 없고 호랑이 발자국만 남아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국청사에 머물고 있을 때는 머리카락은 눈썹과 가지런하게 자랐고

늘 다 떨어진 베옷을 입고 다니며 누가 불법(佛法)이 무어냐고 물으면

 수시(隋時:형편대로)라고만 대답했다.

한번은 노래를 부르면서 범을 타고 산문으로 들어와 많은 대중이 경악했다고 한다.

그에 대한 이런 일화가 전해진다.



풍간(豊干)선사가 만행을 떠났다가 3년 만에 남방으로 돌아왔다.


그때 마침 당()나라 때 태주자사(台州刺史)를 지낸 여구윤(閭邱胤)

 일을 보러 단구(丹丘: 적성산)로 길을 떠나려다가 두통이 일어났는데

의원을 부르고 좋다는 약을 다 써보았으나 차도가 없었다.

러다가 우연히 국청사에 계시는 풍간스님이란 분이 영험하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그를 찾아갔다.

 풍간스님은 자사의 병세를 듣고는 산으로 들어가 깊은 골짜기의 깨끗한 물을 떠다가

그의 몸에 뿌리니 씻은 듯이 병이 나았다.

자사는 고마운 마음에 보답하려 했다.

스님의 고마운 은혜를 갚고 싶습니다. 어떻게 해드리면 되겠습니까?” 하니

풍간선사가 이르기를 그렇다면 지금 국청사에 계시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찾아가 물어보시오.”라고 했다.

자사는 풍간선사의 말대로 국청사로 가서 전각이란 전각과 누각들을 모두 돌아보았으나

풍간선사가 말한 문수와 보현보살은 보이지 않았다.

한 참 돌아다니다 보니 다리도 아프고 목이 말라 공양간을 발견하고 들어갔는데.

 마침 불을 때고 있던 불목한 두 사람이 자사가 들어오자 물을 떠 공손히 드렸다.

 물을 마시면서 자사가 그들의 생김새를 보니 몸꼴이 남루하고 생김새도 우스꽝스럽게 보였다.

끝내 풍간선사가 말한 문수와 보현보살을 찾지 못하고 돌아와 풍간선사에게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스님이 일러주신 국청사에 가서 전각이란 전각은 다 찾아보았는데

어디에도 두 분 보살은 찾을 수 없었는데 도대체 그 보살님들은 어디에 계신다는 말씀입니까?”

 이 소리를 들은 풍간선사는 웃으면서,

허허 이미 만나 뵙지 않았습니까?”

자사는 풍간선사의 이 말을 듣자마자 아차! 하고 마치 꿈에서 깨어난 듯

 공양간의 두 사람이 생각나서 벌떡 일어나 뛰어나갔다.

한산과 습득은 자사가 허겁지겁 달려오는 오는 것을 보고는

풍간이 쓸데없는 말을 했군. 그가 바로 아미타불이라네하는 말을 남기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달려나갔다.

자사가 말을 타고 그들 뒤를 쫓아갔지만 둘은 바위굴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얼마 후 자사도 두 사람이 사라진 바위굴을 찾아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돌문이 닫혀 들어갈 수가 없었다.

 

원효선사가 관음보살을 친견하려고 양양 낙산사로 가다가 냇가에서 빨래하는 여인을 만났지만,

그 여인이 바로 관음인 줄 몰랐다가 뒤늦게야 알고 후회하였다는 우리네 고사가 있듯,

 자사도 성인을 알아보니 못한 것을 못내 안타까워하면서 발길을 돌렸다.

이를 인연으로 대나무, 돌벽, 절이나 인가의 흙벽 등에 써놓은 세 분의 시를 모아

여구윤(閭邱胤)이 편찬한 것이 한산자시집전(寒山子詩集傳인데

이는 송대(宋代)의 승려 찬녕(贊寧)이 지은 송고승전宋高僧傳에 전하고 있다.


<풍간(豊干)선사 시>

本來無一物(본래무일물)-본래 하나의 물건도 없는것인데,

亦無塵可拂(역무진가불)-털어버릴 티끌 또한 어디 있는가,

若能了達此(약능료달차)-만약에 이러함을 꿔 뚫어 깨닫는 다면,

不用坐兀兀(불용좌올올)-꼼작 않고 앉아서 집중할 필요 없네.


  @추신: 천태산국청사의 고승들의 기담 전 6편에 인용된 모든 사진은 펌한 것임을 밝혀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