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천태산 고승들의 기담(奇談)(1) 축담유 이야기

2018. 6. 21. 06:38경전속의 우화들

중국 천태산 고승들의 기담(奇談)(1)  축담유 이야기


중국에는 오악(五岳)을 비롯하여 이름난 산들이 많다.

그 중에서도 사천성의 아미산, 산서성의 오대산,

절강성의 천태산은 중국의 3대 명산으로 일컬어진다.

아미산은 보현보살의 성지요, 오대산은 문수보살의 성지이다.

우리나라 소백산에 천태종의 본산으로 알려진 구인사가 있듯이,

중국 천태종의 본산인 국청사(國淸寺)가 천태산에 있다.

중국 천태산 국청사는 지금은 한중 불교 교류로 한중 조사전에는

천태종의 종주인 지의대사(538~597), 대각국사 의천(1055~1053)와 더불어

구인사의 상월원각대조사(1911~1974)의 영전을 봉안할 정도로  한국 천태종과는 인연이 깊은 사찰이기도 하다.

천태종은 석가모니불이 영산회상에서 설한 경전이 법화경이고,

그 법화경을 소의경전으로 하는 지의대사(538~597)가 개창(開創)한 종파가 천태종이다.

 

천태산은 일찍부터 신성한 산으로 여겨졌으며 고대에는 도교와 연관이 있었다.

 11~12세기에 유명한 도교의 은사와 도사들이 이 산에 은거했다.

그러나 이 산이 널리 알려진 것은 도교보다 불교와 연관이 있다.

전해오는 바에 의하면 불교 사원들이 238~251년 이곳에 세워지기 시작했으나

 천태산이 유명해진 것은 576년 승려 천태 지의가 이곳에 정착한 뒤부터였다.

 

천태 지의대사가 38세에 천태산에 입산하기 전 200여 년 전에

축담유(竺曇猷)라는 선사가 이곳에 들어와 수행했다.

축담유 스님은 법유(法猷)라고도 부르는데, 원래는 천축의 사람으로

 돈황(燉煌)에 상인으로 왔다가 출가한 스님이라고 한다.

사람 이름 앞에 축()가 붙은 것은 인도사람이라는 것을 뜻한다.


축담유가 어느 날 섬주(剡州) 석성산에 머물면서 동냥을 나갔는데

찾아간 그 집은 공교롭게도 도술을 부리는 술사(術士)의 집이었다.

밥이 나오자 축담유는 축원을 드리고 먹으려고 하는데 밥에서 지네가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그래도 축담유는 아랑곳하지 않고 내어준 밥을 다 먹고 축원을 드리고 떠났다.

 

우리나라도 야사에 비슷한 이야기가 전한다. 어떤 남루한 스님이 저잣거리에서 동냥하는 데

 어느 괴팍한 사람이 고기를 시주하자 주저함이 없이 다 먹었다.

사람들이 아니, 스님이 그래 고기를 다 먹어. 돌중 아니냐.” 하고 비아냥거리다

 스님이 먹고 떠난 밥상 아래를 보니 자기가 시주한 고기가 그대로 있었다.

이렇게 스님이 환술로 사람을 속이듯이 축담유도 밥에서 지네가 나오도록 한 술사(術士)의 도술을 간파했던 모양이다.

 

그 후 강남을 떠돌다가 시풍(始豊)의 적성산(赤城山) 석실로 자리를 옮겨 앉아,

음식을 구걸하고 수행을 계속했다.

적성산은 천태산 가장 남쪽에 별도로 있는 구릉 형태의 산(306m)으로,

지금은 절벽 곳곳에 천연 동굴이 있고 층층이 절벽을 이용해

마치 제비집처럼 절집을 지어 특수한 건축군을 형성하고 있다.

소나무 숲 사이로는 붉은색 절벽과 절집이 매우 인상적인 풍경을 이루고 있어 단구(丹丘)로 불리며,

 또한, 산의 흙이 붉은빛을 띠고 있어 멀리서 보면

 붉은 바위가 성처럼 둘러싸고 있다고 해 적성(赤城)'이라 칭했다고 한다.

 

단구(丹丘)라는 말은 법화문구서품에도 등장하는 데

서품 맨 앞에는 관정(灌頂)이 다음과 같이 법화문구가 이뤄진 유래를 적고 있다.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시기 어렵고, 부처님이 이를 설하시기 어려우며,

이를 전하여 번역하기 어렵고, 스스로 깨달음 얻기 어려우며, 스승의 강의 듣기 어렵고,

(들은 것을) 한 편이나마 기록하기 어렵다. 내가 27세에 금릉에서 강의를 듣고

 69세에 단구(丹丘)에서 첨삭하여 후세 현인들에게 남겨주니

함께 부처님의 지혜에 이르기를 기약한다.”라고 했는데 여기에서 단구는 곧 이곳 적성산을 가리킨다.

 

적성산은 산이 깊고 숲이 울창하여 산짐승이 많았던 모양이다.

어느 날 축담유가 경을 읽고 있는데

사나운 호랑이 수십 마리가 몰려와서는 축담유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축담유가 경을 외는데. 한 호랑이가 졸자, 축담유는 짐짓 호랑이의 머리를 두드리며

 왜 경을 듣지 않느냐?”라고 꾸짖자 호랑이 무리는 모두 떠났다.

 그러자 얼마 후에는 커다란 뱀들이 다투어 나왔다.

길이가 10여 아름이나 되는 뱀들이 축담유의 주위를 빙빙 돌면서 오갔다.

 머리를 치켜들고 축담유를 향하다가, 축담유가 놀란 기색이 없자 반나절이 지나서 모두 떠났다.

 

그러던 어느 날 산신이 나타나 스님의 위용과 덕이 높아 이 석실을 스님에게 공양드리겠습니다. ” 하였다.

축담유는 이 소리를 듣고 어찌 함께 기거할 수 없습니까?” 하니

 산신이 이르기를 신과 사람이 살아가는 길이 다르고,

또한 나의 부하 권속들이 법화에 젖지 않아 다스리기 어렵고,

 모르는 이가 왕래함에 부딪히게 되므로 그리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축담유의 앞에 나온 호랑이와 뱀들이 산신의 권속이었다.

 축담유가 산신은 어떤 신이냐고 묻자, 산신이 답하기를

 저는 하() 임금의 아들로 이곳에 2,000여 년을 머물고 있습니다.

스님이 지나온 석상산은 집안의 외삼촌께서 다스리는 산이라 그리로 옮겨 갑니다.”라고 했다.

그리고 향 세 상자를 주면서 산신묘로 돌아가 북을 치며 나팔을 불며 구름을 헤치고 떠나갔다.

 

천태산에는 하늘에 닿을 만큼 우뚝 솟은 거대한 바위가 많았다.

축담유는 돌을 치고 사다리를 만들어 그 바위에 올라가 좌선하였다.

그러면서 대나무를 이어 물을 옮겨, 일상생활에 공급하였다.

축담유의 기행이 소문을 타고 전해지자 선을 배우려고 찾아온 사람이 10여 명이 있었다.

그중에는 동진의 서예가로 이름을 떨치던 왕희지(王羲之; 307~365)도 소문을 듣고 찾아와

 봉우리를 우러르며 높이 인사하여 경의를 표하고 돌아갔다고 한다.

 

적성암(赤城巖)은 천태산의 폭포와 영계(靈溪) 사명산(四明山)과 나란히 서로 연속되어 있었다.

그 가운데 천태산은 까마득한 절벽과 드높은 산마루가 하늘을 끊는다.

축담유는 적성암 위에는 아름다운 정사(精舍)가 있어 득도한 이가 산다.

비록 돌다리가 개울을 걸쳐 있지만, 바위가 가로막아 사람의 접근을 끊는다.

 또한, 이끼가 푸르고 매끄러워 먼 옛날부터 지금까지 그곳에 오른 이는 없다.”라는

 옛 노인들의 이야기를 상기하면서

걸어서 개울에 이르자 허공에서 그대의 정성이 도타운 것은 알지만

 아직 득도하지 못했으니 10년 후에 오라고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 소리를 들은 축담유는 마음으로 한탄하면서 그날은 산속에서 자고

이튿날 다시 길을 나서는데 머리와 수염이 하얀 사람을 만났다.

그 사람이 어디를 가느냐고 묻자 축담유가 자세히 설명하자 그 사람이 말하였다.

 “그대는 윤회하는 몸인데 어찌 갈 수 있겠느냐?

나는 이곳의 산신이기에 알려줄 뿐이네하고 떠나갔다.

축담유가 그곳에서 물러나 길을 가다 작은 석실을 하나 발견하고

안으로 들어가 쉬어가려고 하니 갑자기 검은 구름이 몰려오고

 안개가 서리더니 석실이 울리기 시작했다. 축담유는 정신을 잃지 않고 밤을 새우니

다음날 홑옷을 입은 사람이 나타나 이르기를

 이곳은 산신인 제가 거처하는 곳입니다.

어제는 집을 비웠는데 그런 소란이 일어나 부끄럽습니다. ” 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축담유가 이르기를 이곳이 그대의 집이라면 당연히 돌려드려야지.” 하니

산신이 이르기를 저는 이미 거처를 옮겼으니 이곳에 머물러도 됩니다.” 하는 것이다.

 축담유는 산신이 양보한 그 석실에 머물면서 늘 돌다리를 건너지 못한 것을 한탄하면서 지내다가

 며칠을 몸을 재계하여 다시 가보니 막혔던 바위가 환하게 열려 있었다.

 정사(亭舍)에 이르니 노인이 말한 그대로 한 신승(神僧)이 있었다.

함께 공양한 후 신승이 이르기를

 지금은 물러가게. 10년이 지나면 저절로 이곳에 올 것이야. 지금은 머물러 수 없네.” 라고 하였다.




축담유는 산 오르는 것을 포기하고 하산하여 여러 곳을 수행하다가

 태원 연간(376396) 말기에 석실에서 세상을 마쳤다.

시신은 그대로 편안하게 앉아 있었으나, 몸이 온통 녹색이었다.

 

그 후 진()의 의희(義熙) 연간(405418) 말기에 은둔한 선비 신세표(神世標)

이 산에 들어가 바위에 올라갔다. 그기에서 축담유의 시신을 보았는데 썩지 않고 그대로였다.

그 후 그곳에 가서 다시 보고자 찾아갔지만 구름과 안개에 가려 엿볼 수가 없었다고 전한다.

 

추신: 이글은 고승전 제11권에 나온 이야기를 필자 임의로 편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