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 국사암 석조여래입상

2018. 6. 1. 07:09국내 명산과 사찰



안성 국사암 석조여래입상

 

안성 국사암 석조여래입상은 궁예미륵이라 불리는 석조여래 삼존불이다.

궁예미륵불상은 향토유형문화재 불상 제42(2002219일 지정) 로 지정되어 있으며

국사암은 경기도 안성시 삼죽면 텃골길 80-10에 국사봉 기슭에 있다.

가는 길은 삼죽리 텃골길 막다른 길까지 깊이 들어가면 Y자로 갈라지는 두 길을 만나게 되는 데

왼쪽은 조금 가파른 언덕길로 쌍미륵불이 있는 쌍미륵사로 가는 길이고

오른쪽은 경운기가 겨우 다닐 정도의 비포장 편도길이 나오는 데 이 길이 국사암 가는 길이다.

국사암은 탐방객이 뜸하긴 하지만 가는 길이 폭이 좁은 비포장 도로로

쌍방 교차가 어렵다는 것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막다른 지점에 <진입금지 주차장>이라는 표말이 공터에 보이는데

이곳에 주차하고 도보로 15분 정도 올라가면 절 입구에 다다른다.

이곳 주차장 표말이 있는 곳에서 사찰까지는 승용차로 올라갈 수도 있지만

경사가 심하여 힐링 겸 걸어 올라 가는 것이 좋다.

 







안성은 예로부터 충청, 전라, 경상도의 삼남과 서울을 이어주는

 교통의 요충지이자 군사 전략적인 요새였기 때문에 후삼국때부터

이곳을 아군의 기지로 삼으려고 전시마다 치열한 전투를 벌려던 곳이다.

특히 고려시대나 임진왜란 때에도 지금의 죽주산성을 둘러쌓고 전투가 치열했듯이

 후삼국 중 후고구려의 건국을 꾀했던 궁예가 이 지역의 비뇌성(현 죽주산성)전투에서

양길에게 대승을 함으로서 북원, 국원, 청주까지 한반도 중부권을 제패할 수 있었기에,

이 전투의 승전 기념으로 궁예를 기리는 석조미륵불이 많이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가장 두드러진 미륵불로는 쌍미륵사의 쌍미륵불과

이곳 국사암의 궁예미륵으로 역사학자들은 평하고 있다.

비뇌성은 현재 죽주산성(竹州山城)이며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에 있는

고려시대의 산성으로 1973710일 경기도의 기념물 제69호로 지정되어 있다.


가파른 고갯길을 20분 정도 오르면 국사봉 아래 위치한 국사암이 눈에 들어온다.



이 5층석탑은 최근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국사암 대웅전이다. 국사암은 전각을 신신각등 자연석을 이용한 석조물로 대신하고 있다.







국사암 대웅전은 석가모니불을 본존불로 좌우에 지장보살과 관음보살을 봉안했다.


칠성탱. 치성관 여래를 중심으로 한 탱화다. 좌우의 작은 군상은 28수를 상징하고,

남극성을 상징하는 머리 뽀족한 수성노인과

맞은 편 홀을 든 자미대제도 보인다. 좌우에 칠여래는 칠원성군이다.

원안에 좌우 두 여래는 일광, 월광보살이다.


법륜을 든 치성광여래


위태천(동진보살)을 중심으로  한 신중탱인데 고상스럽게 표현했다.






대웅전 앞은 수각을 두었다.


수각 위에는 관음상를 봉안했다.


붉다. 궁예의 혼이 물들었나..


한개의 자연석을 그대로 부조하여 산신을 조성했다.










국사봉 아래 위치한 궁예미륵이라 불리는 국사암 석조여래상은 3개의 석조여래입상으로

가운데 돌부처를 궁예미륵이라고 하며, 협시불로 약사여래와 지장보살이 조성되어 있다.

이설로는 가운데 석불은 스스로 미륵이라고 일컬던 궁예를 상징하고,

두 협시불은 청광(靑光) 보살로 칭했던 궁예의 큰 아들을,

다른 하나는 신광(神光)보살이라 칭했던 막내 아들을 상징한 것으로 말해지고 있다.

(중앙본존)


(우협시불)


(좌협시불)  

국사암의 석조미륵불은 미륵이라기보다 석인상에 걸맞을 정도로

몸의 전체적인 비례에 비해 모자가 거대하고 손 모양도 수인이 아니라

선비들이 합장을 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목도 지나치게 짧으며 얼굴의 윤곽에는 불상이 주는 이미지나 친근미가 나타나 있지 않다.

 

석불의 발목 이하는 땅에 매몰되어 있어며, 지상에 노출된 본존의 높이는 320cm이고,

3단의 원형보개를 육계부분에 끼워 놓았다. 얼굴은 타원형으로 두 귀가 어깨까지 늘어져 있으며,

수인은 오른손을 가슴에서 손가락을 안으로 모으고, 왼손은 배에 대고 손가락을 쫙 펴고 있다.









  

법의는 양어깨를 덮은 통견으로, 양팔에 도식적인 주름을 도시적으로 새기고 있다.

하반신에 U자형으로 주름에 있는 것으로 봐서 군의를 가슴 부위에서 묶은 것으로 보는데,

허벅지 위에 커다란 연화문을 새겨놓았다.

우협시와 좌협시 역시 둥근 보개를 쓰고,

본존과 동일한 표현자세를 하고 있는데 크기가 약간 작고,

우협시는 석장을 들고, 좌협시는 약병을 들고 있다. 불상의 후면에는 아무런 조각을 가하지 않았다.

이 석조삼존 입상은 고려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본존불의 뒤모습









석가모니불도 한개의 자연석을 그대로 부조했다.




석가여래가 있는 쪽에서 바라본 풍경. 맨위에 보이는 전각이 대웅전이고 아래 보이는 전각이 극락전이다.



석조석가여래을 내려와 올려다 본 풍경




궁예미륵의 머리에는 배광(背光) 대신 둥글고 펀펀한 모자를 머리 바깥으로 넓게 나오도록 씌워 놓았는 데,

이런 형상은 경기도 지역의 석조불상에서 많이 보이지만 정읍, 아산 등 아래지역에서는 드물게 보인다.

국사암의 궁예미륵이 궁예의 지배 시기에 조성되었는지,

그가 죽은 뒤에 조성되었는지는 자료가 없어 알 수 없지만

안성지역이 궁예와 미륵불이 연결된 역사적 의미가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극락전




아미타불








올려다 본 극락전


불두화가 피는 계절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