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6. 6. 11:41ㆍ국내 명산과 사찰
천년의 불향기 영주 봉황산 부석사(1/2)
부석사(浮石寺)는 경상북도 영주시 소백산 국립공원의 봉황산에 있는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인 고운사(孤雲寺)의 말사이다.
신라 문무왕 16년(676년)에 승려 의상대사가 왕명으로 창건한 뒤 화엄종(華嚴宗)의 중심 사찰로 삼았다.
고려 시대에는 선달사나 흥교사로도 불렸다는 기록이 남아있으며
공민왕 21년(1372년)에 주지가 된 원응국사(圓應國師)에 의해 크게 증축되었다.
한국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 중 하나인 무량수전과 조사당 또한 이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유사』에 수록된 이 절의 창건설화를 보면,
의상대사가 당나라로 불교를 배우기 위하여 상선(商船)을 타고 등주(登州) 해안에 도착하였는데,
그곳에서 어느 신도의 집에 며칠을 머무르게 되었다.
그 집의 딸 선묘(善妙)는 의상을 사모하여 결혼을 청하였으나,
의상은 오히려 선묘를 감화시켜 보리심(菩提心)을 발하게 하였다.
선묘는 그때 “영원히 스님의 제자가 되어 스님의 공부와 교화와 불사(佛事)를 성취하는 데
도움이 되어드리겠다.”라는 원을 세웠다. 의상은 종남산(終南山)에 있는
지엄(智儼)을 찾아가서 화엄학을 공부하였다.
그 뒤 귀국하는 길에 의상은 다시 선묘의 집을 찾아
그동안 베풀어준 편의에 감사를 표하고 뱃길이 바빠 곧바로 배에 올랐다.
선묘는 의상에게 전하고자 준비해 두었던 법복(法服)과 집기(什器) 등을 넣은 상자를
전하기도 전에 의상이 떠나버렸으므로,
급히 상자를 가지고 선창으로 달려갔으나 배는 이미 떠나가고 있었다.
선묘는 의상에게 공양하려는 지극한 정성으로 저만큼 떠나가는 배를 향해
기물 상자를 던져 의상에게 전하고는,
다시 서원(誓願)을 세워 몸을 바다에 던져 의상이 탄 배를 보호하는 용이 되었다.
용으로 변한 선묘는 의상이 신라에 도착한 뒤에도 줄곧 옹호하고 다녔다.
의상이 화엄의 대교(大敎)를 펼 수 있는 땅을 찾아 봉황산에 이르렀으나
도둑의 무리 500명이 그 땅에 살고 있었다. 용은 커다란 바위로 변하여 공중에 떠서
도둑의 무리를 위협함으로써 그들을 모두 몰아내고 절을 창건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일주문 뒤 편액)
의상은 용이 바위로 변하여서 절을 지을 수 있도록 하였다고 해서 절 이름을 부석사로 하였다고 한다.
지금도 부석사의 무량수전(無量壽殿) 뒤에는
부석(浮石: 뜬 돌) 이라는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가 선묘용이 변화했던 바위라고 전한다.
창건 후 의상은 이 절에서 40일 동안의 법회를 열고 화엄의 일승십지(一乘十地)에 대하여 설법함으로써
이 땅에 화엄종을 정식으로 펼치게 되었다. 특히, 의상의 존호를 부석존자(浮石尊者)라고 칭하고
의상의 화엄종을 부석종(浮石宗)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모두 이 절과의 연관에서 생겨났다.
의상 이후의 신라 고승들 가운데 혜철(惠哲)이 이 절에서 출가하여 『화엄경』을 배우고 뒤에 동리산파(桐裏山派)를 세웠고,
무염(無染) 또한 이 절에서 석징(釋澄)으로부터 『화엄경』을 배웠으며,
절중(折中)도 이 절에서 장경(藏經)을 열람하여 깊은 뜻을 깨우쳤다고 한다.
고려 시대에는 이 절을 선달사(善達寺) 또는 흥교사(興敎寺)라고 하였는데,
선달이란 선돌의 음역으로서 부석(浮石)의 향음(鄕音)이 아닐까 하는 견해도 있다.
또, 고려 정종 때의 결응(決凝)은 이 절에 머무르면서 대장경을 인사(印寫)하고,
절을 크게 중창한 뒤 1053년(문종 7)에 이 절에서 입적하였다.
1372년(공민왕 21)에는 원응국사(圓應國師)가
이 절의 주지로 임명되어 퇴락한 당우를 보수하고 많은 건물을 다시 세웠다.
그 뒤 조선 시대의 역사는 자세히 전하지 않으나 1580년(선조 13)에 사명당(泗溟堂)이 중건하였으며,
1746년(영조 22)에 화재로 인하여 추승당(秋僧堂)·만월당(滿月堂)·서별실(西別室)·
만세루(萬歲樓)·범종각 등이 소실된 것을 그 뒤에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국보 제18호인 부석사 무량수전과 국보 제19호인 부석사 조사당(浮石寺祖師堂)을 비롯하여
조선 시대 후기의 건물인 범종루(梵鐘樓)·원각전(圓覺殿)·안양루(安養樓)·선묘각(善妙閣)·
응진전(應眞殿)·자인당(慈忍堂)·좌우요사(左右寮舍)·취현암(醉玄庵) 성보전시관 등이 있다.
이들 가운데 범종루와 안양루는 대표적인 누각이고, 원각전·응진전·자인당은 법당이며,
선묘각은 부석사의 창건연기와 인연이 있는 선묘의 영정을 봉안하여둔 곳이다.
중요문화재로는 국보 제17호인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앞 석등과 국보 제45호인 영주 부석사 소조여래좌상,
국보 제46호인 영주 부석사 조사당벽화, 보물 제249호인 영주 부석사 삼층석탑,
보물 제255호인 영주 부석사 당간지주, 보물 제735호인 영주 부석사 고려 목판,
보물제 220호인 석조비로자나불좌상 2기와, 보물 제1636호로 지정된 석조석가여래좌상이 있고,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27호인 영주 부석사 원융국사비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원융국사비는 절의 동쪽 500m 지점에 있으며 1054년에 건립한 것이다.
그 외에 삼층석탑 두기와 동쪽 언덕에는 1기의 고려 말 부도를 포함한 10여 기의 부도가 있다.
이 밖에도 이 절에는 석룡(石龍)을 비롯하여 대석단(大石壇)·선묘정(善妙井)·녹유전(綠釉塼)·
선비화(禪扉花)·석조(石槽)·맷돌 등이 있다. 석룡은 절의 창건과 관련된 것으로
현재 무량수전 밑에 묻혀 있는데, 머리 부분은 아미타 불상 바로 밑에서부터 시작되며,
꼬리 부분은 석등 아래에 묻혀 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 이 절을 개수할 때
이 거대한 석룡의 일부가 묻혀 있는 것이 발견되었으며, 자연적인 용의 비늘 모습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선묘정은 절의 동쪽에 있는데, 가뭄이 있을 때는 기우제를 드렸다고 한다.
대석단은 신라 시대에 축조한 것으로 절의 입구에 있다.
거대한 축석(築石)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크고 작은 면석(面石)을 섞어 쌓은 것이 특징이다.
이 석단은 3단으로서 극락세계의 구품연화대(九品蓮花臺)를 상징한다는 설이 있으나 명확한 근거는 없다.
비파를 든 북방수호신 다문천왕, 칼을 든 동방수호신 지국천왕
용과 여의주를 든 남방수호신 증장천왕, 탑과 창을 든 서방수호신 광목천왕
회전문
이 건물은 범종루와 안양루라는 두개의 편액이 있다.
범종루는 사찰의 중문(中門)에 해당하며, 본전을 향하는 입구 쪽에서는 팔작지붕을 하고
반대 방향은 맞배지붕이므로 일반 사찰건축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특이성을 보이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4칸의 2층 누각으로서,
누각에는 ‘鳳凰山浮石寺(봉황산부석사)’라는 편액이 있을 뿐 범종은 없다.
안양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집으로서, 누각 안에는 부석사의 현판기문을 모아두었는데,
그 안에는 사명당이 쓴 「안양루중창기」가 있다.
@안양루(安養樓)
안양(安養)이란 말은 불교에서는 마음을 편하게 하고 몸을 쉬게 함을 의미하는
서방정토의 주인인 아미타불이 살고 있다는 정토를 일컫는 말이다.
이 극락정토를 의미하는 여러 이름이 있다. 극락(極樂), 극락정토(極樂淨土), 금색세계(金色世界),
무량청정토(無量淸淨土), 안락국(安樂國), 안락세계(安樂世界), 안락정토(安樂淨土),
연화세계(蓮花世界). 유사어로는 안양계(安養界), 안양보국(安養寶國), 안양세계(安養世界),
안양정토 (安養淨土) 등이 있으며 부석사 안양루는 극락의 이명(異名)을 사용하여
무량수전을 마주하고 있는 2층 누각으로 범종루를 겸하고 있지만
불전사물(佛殿四物: 종, 북, 목어, 운판)은 안에 두지 않고 새로 지은 범종각에 안치되어 있다.
무량수전 앞 석등과 안양루
석사 무량수전 앞에 있는 통일신라 시대 석등. 국보 제17호. 높이 297cm.
방형의 지대석 위에 기대받침이 있으며, 기대석의 각 면에는 안상이 2구씩 장식되었고
윗면에는 8각의 연화 하대석이 있다. 연화 하대석에는 귀꽃이 뚜렷한 8개의 복련이 돌아가며 조각되었고
복련 가운데에는 간주석을 받치는 3단 받침이 있다.
팔각형의 간주석은 가늘고 높은 편이며 상대석에는 보상화무늬가 장식된 앙련이 비교적 입체적으로 표현되었다.
화사석은 8각으로 8면 가운데 4면에 화창을 냈는데 그 주위에 창문을 고정시켰던 작은 구멍이 남아있으며,
다른 4면에는 연화좌 위에 보살 1구씩을 조각했다. 옥개석은 끝부분이 약간 위로 올라가 가벼운 느낌을 주며
그 아래 받침은 2단으로 되어 있다. 상륜부에는 일부 파손된 연꽃 모양의 보주가 남아있다.
이 석등은 전반적으로 장식성이 약화된 간결한 모습이나 상하 비례가 조화를 이루고 있는 점으로 보아
통일신라 시대의 전형적인 8각 석등임을 알 수 있다.
3층탑 옆에 배례석이 안치되어 있다.
배례석(拜禮石)의 정확한 용도는 확실하지 않지만, 불교의 행사에 사용되는 일종의 판석으로
불을 켜거나 향을 피우고 음식을 차려놓는 판돌로 그 앞에서 자리를 펴고 배례한 것으로 생각된다.
‘불국사고금창기(佛國寺古今創記)’에 따르면 불국사의 석등 앞에 있는 배례석은
본래 향로를 올려놓는 봉로대(奉爐臺)라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예불을 위한 향로를 얹었던 곳으로 보아야 할 것이며,
때에 따라서 음식을 올려 공양하기 위함이 틀림없을 것 같다.
배례석은 대부분 야외의 법당 정면이나 석등 바로 앞에 놓이는 것이 보통이나
사리신앙(탑신앙)이 성행하던 시기에는 탑 앞에도 배례석을 두었다.
형태는 직사각형인 것이 대부분이나 간혹 정사각형에 가까운 형태도 있으며 대부 법당과 평행으로 놓여있다.
부석사의 배례석은 무량수전 앞 석등이 있고 그 앞에 조성되어 있다.
배례석의 윗면에는 화려한 연꽃으로 장식된 것이 있는가 하면 아무런 장식이 없는 것도 있다.
부석사의 배례석에는 연꽃이 부조(浮彫)되어 있다.
정면과 측면에는 상의 다리 즉 상각(床脚)을 의미하는 안상(眼象) 무늬로 새겨져 있는 것이 일반적인데
안상은 석탑, 승탑, 석등, 석비. 당간지주 등 여러 석조물에 나타나는 문양이다.
국보 제18호. 부석사 무량수전은 고려 시대 목조 건물로서
내부에 무량수불(無量壽佛: 무한한 수명을 지닌 부처)인 아미타불(국보 제45호)을 봉안하고 있다.
정면 가운데 칸에 걸린 편액은 고려 공민왕이 썼다는 기록이 있다.
공민왕이 홍건적의 침입 때 안동으로 피난 왔다가 귀경길에 부석사에 들러 쓴 것이라고 전한다.
한편, 부석사 무량수전 서쪽에는 부석(浮石, 일명 뜬바위)이 있는데 이 바위는
의상대사를 흠모하던 당나라 선묘(善妙)낭자가 변한 것이라는 전설이 깃들어 있다.
@부석사의 무량수전은 국보제 12호로 지정된 안동 봉정사의 극락전과 더불어
남아있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로 곱하고 있다.
부석사 무량수전은 1376년에 중수된 기록이 있고, 봉정사의 극락전은 1363년 중수기록이 남아있는데
학계에서는 봉정사의 극락전이 조금 더 오래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봉정사 극락전이 한국 건축의 구조적 아름다움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라면,
부석사의 무량수전은 한국 건축의 형태, 비례미를 잘 보여준다고 평가받고 있다.
순수하게 건축물로서의 완성도를 본다면 무량수전이 더 급이 높고 훌륭하다고 할 수 있다.
참고로 현재까지 창건 연대가 정확히 밝혀져 있는 것으로는
1308년(충렬왕34년)에 지었다는 수덕사 대웅전이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이라 할 수 있다.
@무량수전은 원래 입식용 건축이었다는 것이다. 현재 무량수전 실내에 있는 나무 바닥 아래에는
원래 녹색의 유약을 칠한 벽돌인 녹유전이 깔린 바닥이 있다.
즉, 고려 시대에는 마치 중국의 건축물처럼 사람이 신발을 신고 서서 지내는 입식 생활이 일반적이었고,
무량수전 역시 그러했다는 것이다. 이후 조선 시대에 들어와 온돌 등 때문에
좌식생활이 일반화되고, 절에서는 엎드려서 절을 하는 것이 널리 퍼지자 새로 나무 바닥을 깔게 된 것이다.
부석사 안의 박물관(유물관)에 녹유전을 재현해 놓았다.
녹유전은 유리같이 광택이 뛰어나며,
이는 불국토의 수미산 바닥이 유리로 되어 있다는 말을 형상화한 것이다.
부석사 무량수전에 봉안된 고려 시대 소조불좌상은
국보 제45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불상 높이 278cm, 광배 높이 380cm이며
〈무량수전불상개금기문 無量壽殿佛像改金記文〉에 따르면
1723년(경종 3)에 정상주를 비롯한 신도 94명에 의해 개금되었으며,
1975년에 또 1차례 개금 되었다고 한다.
불상이 동쪽을 향해 앉아 있다는 점에서 아미타불로 볼 수 있으나
손 모양이 석가불을 상징하는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어 이 상의 명칭을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다만 이 절의 동쪽에 있는 원융국사탑비의 비문에 협시보살이 없는
아미타불을 조성하여 모셨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나발이 표현된 머리 위에는 커다란 육계가 얹혀 있고,
얼굴은 양감이 있는 편이나 길게 올라간 눈꼬리라든가 작고
두툼한 입의 표현 등에서 고려 시대 불상의 특징이 나타나 있다.
넓고 당당한 어깨에 걸쳐진 법의는 우견편단으로,
옷 주름은 가슴 앞에서 비교적 촘촘하게 흘러내려 몸의 곡선을 드러내었고
결가부좌한 양 다리 사이에서 부채꼴 형태로 모아져 있다.
광배는 목조로 따로 만들어졌는데 화려한 당초무늬와 화염무늬가 장식되어 있고,
두광과 신광에는 7구의 화불을 붙였던 흔적이 남아있다.
이 소조불상은 의상대사가 676년 이 절을 창건했을 때 모셨던
본존의 불상 형식을 그대로 따랐을 것이라는 설이 있다.
그러나 근엄한 얼굴표정, 당당하면서 안정감 있는 모습,
옷 주름선의 표현 등은 8세기 중엽의 석굴암 본존불을 충실히 따르고 있어
고려 초기에 많이 만들어진 촉지인 계통의 한 예라고 볼 수 있다.
부석 바로 아래에 조성된 석불이다. 안내표시판이 없어 조성시기는 알 수 없다.
다만 좌우에 조성한 석등이 마모된 것으로 보아 상당한 연대가 된 것 같기도 하다.
<선묘각>
선묘각은 무량수전 북서쪽 모서리에 위치하고 있는데
의상 조사의 창건 설화와 관련된 인물인 선묘를 모신 건물이다.
규모도 작고 기단도 없이 초라하여 마치 작은 사찰의 산신각 같은 느낌을 준다.
정면과 측면이 각각 1칸 규모의 맞배집인데
가구 방식이나 부재를 다듬은 수법으로 보아 최근세의 건물인 듯하다.
내부에는 1975년에 그린 선묘의 영정이 걸려있다
~제2부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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