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5. 27. 23:13ㆍ국내 명산과 사찰
안성 쌍미륵사 기솔리석불입상
충주, 천안, 안성 등 중부지역권에는 고려 시대 많은 크고 작은 마애미륵불상들이 발견되고 있는 데
이는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격렬한 격전지가 주로 이곳에 많았고,
또한 지방호족을 기반으로 나라를 수립하였기 때문에 고려 시대의 미륵불은
미륵신앙의 중심이 왕실과 사찰에서 민간 계층으로 이동하여
평안과 구복을 바라는 민초들의 염원의 주된 대상이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일반사찰에서도 미륵하생경변상도의 도상이 그려졌는가 하면,
민간에서는 계곡과 야산에 대형 미륵불과 마애불을 조성하여 미륵하생을 서원하였든 것이다.
또한, 고려 시대에는 풍수도참 및 비보신앙과 미륵신앙이 교섭되면서
비보사찰(裨補寺刹)과 비보석불(裨補石佛)이 조성되면서,
마을이나 계곡에 미륵상을 조성하는 데 일조하게 되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고려 시대의 대표적인 마애미륵불은 안동 제비원, 파주 용암사, 고창 선운산 도솔암 미륵 등
지방 세력들이 조성한 대형의 미륵석조불상들이나 마애불도 있지만,
안성에서는 무려 16기나 되는 미륵불상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안성지역은 특히 미륵신앙과 인연이 깊은 지역으로 보인다.
안성 기솔리석불은 보물로는 지정되지 않았지만
파주 용암사의 미륵불상과 같이 2기의 대형 미륵석불상으로 쌍벽을 이룬다.
옛적 사진을 보면 쌍미륵불상 앞에 천수관음상을 두었던 것으로 보이는 데
지금은 반가사유상으로 교체되어 있다. 미륵보살상이라 하면
보관을 쓴 머리에 화불(化佛)을 주로 생각할 수 있지만 미륵보살의 중요한 도상적 특징 중 하나는
백제의 미소라 불리는 서산용현리 마애삼존의 협시불인 미륵불에서 보듯이
한쪽 발을 다른 쪽 발의 허벅지 위에 올리고 한쪽 팔을 허벅지에 기대어
손가락을 뺨에 대어 깊이 사유하고 있는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이다.
반가사유상은 싯다르타 태자의 사유상(思惟像)에서 유래한 것인데,
점차 미륵신앙이 크게 유행하면서 반가사유상에도 미륵의 성격이 부가되기에 이르렀다.
즉 싯다르타 태자의 생노병사에 대한 고뇌에 찬 사유와 석가모니불이 구제하지 못한
모든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미륵보살의 사유는 시간과 공간만 다를 뿐
같은 것이어서 동일시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우리나라 삼국시대, 특히 신라에서는 미래의 주역인 화랑과 결부시켜 크게 유행하였으나
통일신라 이후에는 쇠퇴하였다. 통일신라 이후에는
미륵보살을 주존으로 하는 법상종(法相宗)이 융성하면서
국제적인 감각을 갖춘 감산사지 미륵보살상과 같은 새로운 형식의 미륵보살상도 만들어졌다.
@쌍미륵이라 불리는 2기의 미륵불이 나란히 서 있는 안성 가솔리석불입상은
안성시 삼죽면 텃골길 105 대한불교 법상종 본사인 쌍미륵사에 있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6호로 지정된 이 미륵석불은
멸망한 고구려를 재건하려던 궁예가 태봉 911년 경에 조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대한불교법상종은 통일신라때 성립된 불교종파로서
유식사상(唯識思想)과 미륵신앙(彌勒信仰)을 기반으로 하는 종파이다.
전북 금산사(金山寺)의 개산자(開山者)인 신라의 고승 진표(眞表)를 종조(宗祖)로 삼는 불교종단이다.
기솔리 석불입상은 쌍미륵사 요사 뒤편의 2단 석축 위에 있다.
각각 10m의 간격을 두고 동·서로 2기가 세워져 있는데 높이는 약 5.7m이다.
마을 주민들은 동쪽의 것을 ‘남미륵’, 서쪽의 것을 ‘여미륵’이라 칭하고 있다.
석불입상은 양쪽 모두 나발이 표현되지 않은 육계를 갖고 있으며 육계 위에는 판석형 보개가 있다.
두 석불은 얼굴의 크기와 상호의 표현에서 차이가 있지만,
높은 육계, 반개한 눈, 상대적으로 짧은 코 등에서는 유사점을 찾을 수 있다.
남미륵이라 불리는 동쪽 석불입상은 입을 벌리고 있으며
입술의 중앙 부분에는 윗입술부터 아랫입술까지 세로의 도드라진 선이 새겨져 있다.
기솔리 석불입상은 그동안 고려시대 전기 또는 중기에 조성된 지방 양식의 불상으로 소개되었다.
하지만 근래의 연구 성과를 통해서 보다 앞선 시기인 궁예(弓裔) 정권기에 조성되었음이 규명되었다.
우선 기솔리 석불입상은 신체의 모양, 옷 주름, 발 형태 등에서 개태사 석조삼존불입상과 매우 유사하다.
논산의 개태사 석조삼존불입상은 태조 왕건의 명으로
후삼국 통일을 기념하기 위해 조성된 불상으로 936년에서 940년 사이의 시기에 조성되었다.
그런데 기솔리 석불입상은 안성·이천 지역의 석불 및 고려전기 석조불상과 양식적 특징을 비교해 보면
개태사 석조삼존불입상보다 먼저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기솔리 석불입상의 법의 착용 방식과 옷 주름 표현 등은 통일신라 금동불상을 직접 모방하였는데,
이는 이 석불입상이 새로운 외래 양식을 적극 수용하고 있는
개태사 석조삼존불입상보다 조성시기가 앞선 것을 보여준다.
한편, 기솔리 석불입상은 조성 규모 면에서 볼 때 200명 이상의 인력이 동원되어 만들어진 석불이다.
고려시대 석불입상은 일반적으로 노동력의 효율성을 고려해
여러 개의 돌을 쌓아 올려 한 개체의 불상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 석불입상은 머리부터 발까지 하나의 돌로 불상을 조성하였다.
이는 석불 제작 시 대규모 지원이 가능한 후원 세력이 있었다는 점을 의미하는데,
당시 도적이 발흥하고 전쟁터가 되기도 하였던 죽주지역에서
200명 이상의 사람을 동원하여 대규모 석불을 조성하도록 지원한 세력은 궁예일 것으로 추정된다.
기솔리 석불입상이 궁예 정권기 조성되었을 가능성은 상호를 통해서 보다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두 개의 석불입상 중 ‘남미륵’으로 불리는 동쪽 석불입상의 상호는 입을 약간 벌리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여래의 상호가 입을 벌린 채 조각된 경우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동아시아는 물론 인도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당시 사람들에게 최고의 신성한 존재로 숭배되었던
불상의 입을 벌릴 수 있게 한 사람은 스스로 미륵이 된 궁예로 여겨진다.
불상의 입을 벌려 상호를 조각한 모습은 궁예 정권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철원 동송읍 마애불입상에서도 확인된다. 동송읍 마애불입상의 입술은
마모가 심하여 선명하게 파악하기 어려우나 잔존해 있는 입술 모양을 보았을 때 입을 벌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근래의 연구를 통해 궁예 미륵으로 밝혀진 나주 철천리 석불입상 역시 입을 살짝 벌리고 있으며
기솔리 석불입상과 같이 입술 중앙에 도드라진 선이 가로 지르고 있다.
궁예 정권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석불과 마애불이 모두 입을 벌리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우연의 일치라기보다는 무언가 상징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궁예가 스스로 미륵이라 칭하였던 점을 상기하면 불상이 입을 벌리고 있는 모습은
하생한 미륵이 설법하는 장면일 가능성이 있다.
이 밖에 화살이 걸쳐진 활 모양의 입을 통해서
활의 후예라는 ‘궁예’의 이름을 반영하고자 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기솔리 석불입상이 궁예 정권기에 조성된 궁예 미륵일 가능성은 구비전승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현재 이 석불입상과 관련해서는 궁예의 설법을 듣고 그를 존경하게 된 사람들이
미륵상을 세웠다는 구비전승이 전하고 있는데,
이러한 궁예 관련 설화는 집중성과 구체성, 통일성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궁예 관련 설화는 궁예가 활동한 지역에 집중되어 있으며 그 내용도 매우 구체적이다.
또한, 궁예 설화는 서로 중복되지 않는다는 통일적 성격을 갖고 있다.
이러한 설화의 특징과 더불어 궁예 미륵이라 불리는 명칭적 성격 또한
기솔리 석불입상이 궁예 정권기에 조성되었음을 보여주는 근거가 된다.
전국에 궁예 미륵으로 불리는 불상은 기솔리 석불입상과 포천 구읍리 석불입상이 있다.
구읍리 석불입상은 마모가 심하여 정확한 조성 시기 파악이 어려우나
나말여초기 제작된 불상으로 여겨진다. 궁예 미륵이라 칭해지며
통일신라 불상조각의 전통이 강하게 남아있는 기솔리 석불입상은
실제 궁예에 의해 조성되었기에 지금까지 궁예 미륵으로 전칭되어 왔다고 볼 수 있다.
궁예가 기솔리 석불입상을 현재의 장소에 건립한 이유는 비뇌성 전투와 관련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비뇌성 전투는 궁예와 양길의 전쟁으로 궁예가 중부지역의 패권을 장악하는 데 있어
결정적인 계기가 된 전투이다. 기솔리 석불입상은 비뇌성 전투의 승전을 기념하기 위해
궁예가 승전지에 조성한 불상이라고 할 수 있다.
수각
산신각
오백나한전
중앙에 석가모니불을 모시고 좌우에 V자형 계단에 오백나한을 안치한 것이 특이하다.
용화전
지장보살
항마촉지인을 한 본존불이 미륵보살이면 협시불은 법화림보살과 대묘상보살이 된다.
용화전의 이 여래는 중앙에 석가모니불, 좌우 협시불로 제화가라보살과 미륵불을 모셨다.
보살인지 나한인지 판별이 불가하다.
용화전에서 바라 본 쌍미륵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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