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위에 버섯이 움직인다.

2018. 3. 5. 21:31해학의 경귀들

말 위에 버섯이 움직인다.

 

조선 후기 재야 선비 조재삼이 엮은 <송남잡식(松南雜識)>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느 더운 여름날 선비가 길을 가다가 더위를 피하고자 강변 한 모퉁이에서 쉬고 있었던 데

 뒤편 골짜기에서 동네 아낙네들이 모여 더위를 식히려고 멱을 감으면서 수다를 떨고 있었다.

호기심이 발동한 선비는 말을 매어두고 몰래 숨어서 이를 엿보고 있는데

마침 지나가는 스님 한 분에게 그만 들키고 말았다.

(빨래터/김홍도)  

선비는 이 겸연쩍은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스님을 불러 세우고

 川邊紅蛤開(천변홍합개)” 라 읊으면서

자기의 시()에 대구(對句)를 달아달라고 요청했다.

하나의 시제(詩題)를 놓고 서로 대구(對句)를 다투는 것은

선비들이 즐기는 일종의 풍류요 멋이기에

이를 빙자하여 겸연쩍음을 모면하려 한 것이다.

스님은 시를 모른다고 거절하자 선비는 그래도 강요했다.

앙탈 부리는 여자가 더 사랑스럽다고 했던가.

싫다는 사람 억지로 시키는 것은 그 또한 쾌감을 느끼는 인간의 속성이 아닌가.

계속 밀어붙이는 선비의 요청에 스님은 마지 못해 이렇게 대구(對句)를 달고는 줄행랑을 쳤다.


馬上松栮動(마상송이동)

 

첫 귀의 川邊紅蛤開(천변홍합개) 는 강변의 조개가 입을 벌리고 있다는 의미이고

스님의 대구 馬上松栮動(마상송이동)는 말 위에 송이가 움직인다는 뜻이다.

 

어느 날인가 초등학생 여러 명이 모여 이런 넌센스 퀴즈를 하면서 깔깔거리며 놀고 있었다.

호기심으로 어떤 이야기인가 싶어 몰래 들어봤더니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 녀석이 왈 <소시지에 털 난 것이 무엇이게?> 하니

다른 놈이 되받아 <그럼 햄버거에 털 난 것 아니?> 하는 것이 아닌가.

어린 초등학생조차 이런 정도의 농을 할 정도이니 작금의 기성세대야..

각설하고, 스님이 말한 송이(松茸)가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구태여 설명하지 않아도 잘 알 것이다.

 

남자는 시각(視覺)에 약()하고 여자는 청각(聽覺)에 약하다고 했던가.

선비들이 여인들이 멱감는 풍경을 몰래 엿보는 풍경은 옛적부터

익히 춘화나 민화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몰래카메라에 의한

성범죄 쫌에 해당하겠지만 당시의 선비들은 해학(諧謔)이나 풍류의 멋 정도로 생각했지

오늘날처럼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해학이던, 풍류의 멋이던, 자명한 것은 이성에 대한 애욕(愛欲)의 발동이다.

요즘 매일 매스컴에 오르내리는 <미 투> 열풍도 본질은 애욕 때문이 아니겠는가?

(계림 인상유삼저)

  

지나친 애욕은 재앙을 불러오는 씨앗이다.

 일찍이 성경에서 십계명의 하나로 간음하지 말라.고 했듯

부처님 또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지금 깨끗하다는 생각을 버리고 더럽다는 생각을 깊이 생각하라.

덧있다는(항상하다는) 생각을 버리고 덧없다는 생각을 깊이 생각하라.

<>가 있다는 생각을 버리고 나가 없다는 생각을 깊이 생각하라.

 즐겨할 만하다는 생각을 버리고 즐겨할 것이 없다는 생각을 깊이 생각하라.

왜 그런가 하면 만일 비구가 깨끗하다는 생각을 생각하면

곧 욕심이 불꽃처럼 일어나고 만일 더럽다는 생각을 생각하면 곧 욕심이 없어지기 때문이니라.

 

비구들이여, 알아야 한다.

 욕심은 더럽기 똥 무더기 같고, 욕심은 앵무새처럼 말이 많으며,

 욕심은 은혜를 갚을 줄 모르기 저 독사와 같고, 욕심은 허망하기 햇볕에 녹는 눈과 같다.

그러므로 그것을 버리기를 시체를 무덤 사이에 버리듯 하라.

욕심이 스스로 해지기는 독사가 독을 품은 것 같고,

욕심이 싫증 나지 않기는 짠 물을 마시는 것 같으며,

욕심을 채우기 어렵기는 바다가 강물을 머금은 것 같고,

욕심이 두렵기는 야차 마을과 같으며,

욕심은 원수와 같으므로 항상 멀리 떠나야 하느니라.

욕심의 맛이 무섭기는 칼에 바른 꿀과 같고,

욕심을 사랑할 것이 못 되는 것은 길에 버려진 해골 같으며,

욕심이 얼굴에 나타나기는 뒷간에서 꽃이 나는 것 같고,

욕심이 참되지 못한 것은 그림병 안에 더러운 물건을 담아둔 것같이 번드르르한 것과 같으며,

욕심이 튼튼하지 못한 것은 물거품 덩이 같으니라.

그러므로 비구야, 마땅히 탐욕을 멀리 떠나고, 더럽다는 생각을 깊이 생각하여야 하느니라.

(增一阿含經 42권 제46結禁品

 

불교는 애욕을 멀리하는 수행법으로는 아미달마시절부터 부정관(不淨觀)과 백골관(白骨觀)을 두고 있다.

부정관(不淨觀)은 우리의 몸은 깨끗한 것이 아니라 더러운 것임을 알게 하는 수행법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여인이라 할지라도 피부 한 꺼풀만 배겨내면 더럽고 추악한 모습이다.

 우리 몸은 피와 똥 고름의 덩어리이며,

우리 몸의 칠공(七孔)에서 쏟아내는 것들은 더러운 오물투성이뿐이다.

부정관은 이렇게 인간의 몸이 더러운 것을 깨달아 탐욕을 없애는 마음을 수행하는 방법이다.


백골관(白骨觀)은 무상함을 깨닫고, 오온이 몸에 화합되어 집착한 생각을 없애기 위해,

송장의 피부와 근육이 모두 없어져 백골만 남아 있거나,

흩어져 산만한 모습을 관하는 수행이다.

옛적에는 주로 묘지에서 썩어가는 시체를 보고 명상 수행을 했다고 한다.

우리 몸의 뼈는 신생아일 때 약 450개에 달하지만

자라면서 서로 뭉치고 합쳐져서 어른이 되면 206개가 된다고 한다.

 살이 썩어 문드러진 구멍 속에 벌레들이 우글우글 데는 것을 생각해 보라.

상상만 해도 소름이 끼칠 것이다.

 

아름답다고 여긴 우리의 몸이 이렇게 더러운 것인 줄을 알게 된다면

애욕의 늪, 그 허망한 음심(淫心)에서, 미망(迷妄)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욕망은 마음에서 일어나고 생각은 분별에서 일어난다.

근묵자흑(近墨者黑)이라 했던가. 숯등걸을 가까이하면 검은 숯등걸이 묻게 된다.

생선가게를 가까이하면 비린내가 몸이 배고 꽃밭에서는 꽃향기가 밴다.

이는 처신을 바르게 해야 한다는 말이다.

(비천도) 

꽃밭이나 향수 가게에서는 코를 막는 사람이 없다.

그러나 영안실이나 생선가게에서는 코를 막게 된다.

그런데 그보다 몇백 배 심한 악취는 풍기는 이런 시체나 백골을 본다면 어떨까.

살이 썩어 문드러지고, 피고름이 말라버린 앙상한 이런 백골(白骨)을 바라보면

소름이 끼쳐서도 애욕이 사라질 것이다. 아무리 절세가인이라 할지라도

언젠가는 이렇게 백골로 변할 몸이다. 내장에는 똥과 오줌이 있고,

또 질병과 늙음으로 고통스러운 이 육신을 생각한다면 어찌 가까이할 수 있으랴.

 

애욕이란 칼날 위에 묻은 꿀처럼 그 맛은 달지만, 몸을 상하기 때문이다.

 <사십이장경>에서는 애욕은 감옥보다 더 무서운 것이라고 했다.

 감옥은 풀려 나올 기한이라도 있지만, 애욕의 늪은 한번 빠지면 나올 길이 없기 때문이다.

 

줄행랑친 스님! 뭘 떨구고 가신 것 없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