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문(龍門)에 얽힌 잡다한 이야기

2018. 2. 8. 00:15해학의 경귀들


(하남성 용문석굴)


용문(龍門)에 얽힌 잡다한 이야기

 

중국의 석굴이라 하면 돈황석굴과 운강석굴

그리고 허난성[河南省] 뤄양[洛陽] 남쪽 강기슭에 조성된 용문석굴이다.

용문석굴은 육조시대의 북위(北魏386~536) 때에 건축을 시작하여

6세기와 당대(618~907)에 걸친 긴 공사로 이룩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같은 이름을 가진 용문석굴이 또 있다.

운남성 곤명시의 남쪽에 위치한 중국에서 6번째로 큰 담수호인 곤명호를 끼고 있는 용문석굴이다.

곤명의 용문석굴은 서산에 있는데 서산은 미인이 누워있는 형상을 닮았다 하여 미인산(美人山)으로 불리기도 하고,

부처가 누운 상을 닮았다 하여 와불산(臥佛山)이라고 불리는 산이기도 하다.

이 용문석굴은 불교의 석굴이 아닌 도교의 석굴이며 1840년부터 1853년까지 13년에 걸쳐

 70여 명의 석공들이 밧줄에 매달려 돌을 조각하고 길을 뚫고 석굴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 석굴을 오르면 산허리에 도교 사원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우리네 사찰의 일주문 격인 용문(龍門)이 세워져 있다.

(곤명의 용문석굴)  

흔히 과거에 급제한 사람을 등용문(登龍門)에 올랐다고 하는데

이 말은 용문(龍門)에서 유래된 말이라고 한다.

후한서(後漢書)이응전(李膺傳)에 따르면

선비로서 그의 인정을 받은 사람을 용문에 올랐다고 했다(士有被其容接者, 名爲登龍門)라고 했다.

 

이응은 후한(後漢)의 관리인데 후한(後漢, 25~220)은 전한이 왕망에 의하여 멸망한 이후,

한 왕조의 일족인 광무제 유수가 한 왕조를 부흥시킨 나라이다.

수도를 낙양에 두었는데 그 위치가 전한의 수도 장안보다 동쪽에 있기에 동한(東漢)이라고도 한다.

 

후한의 4대 황제인 화제(和帝)가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모후(母后)인 황태후(皇太后)가 수렴청제를 하게 되었는데,

이로 인해 황태후의 외척 세력과 후일 성인이 된 황제(皇帝)가 친정을 도모하기 위해

이용한 환관 세력과 권력 쟁탈이 심각하여 타락해 갈 때 비록 실패했지만

이응(李膺)은 퇴폐한 환관들과 맞서 싸우며 기강을 바로잡으려고 분투한 관료였다.

 

이응전의 주해(註解)에 의하면 용문(龍門)’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황하(黃河) 상류의 하진(河津)을 일명 용문이라 하는데,

흐름이 매우 빠른 폭포가 있어 고기들이 오를 수가 없다.

강과 바다의 큰 고기들이 용문 아래로 수없이 모여드나 오르지 못한다.

만일 오르면 용이 된다.

(一名龍門, 水險不通, 魚鼈之屬莫能上. 江海大魚, 薄集龍門下數千, 不得上. 上則爲龍.)

 

여기에서 유래하여 용문은 과거에 급제하는 것을 가리키게 되었고,

오늘날에는 어려운 관문을 통과하여 출세의 문턱에 서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 인용된 용문(龍門)은 곤명의 용문이 아니라

황하 상류의 산서성(山西省)과 섬서성(陝西省)의 경계에 있는 협곡을 말하며

 이곳 용문의 하류에 질할현(膣割縣)이라는 제법 넓은 고을이 있다.

전거(典據)는 알 수 없지만 용문에 얽힌 이런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중국 요순 시절 쌍십절(음력 1010), 용문을 오르는 대회를 개최한다는 방이 붙었다.

그러자 질할현 하구에 있는 모든 고기들이 용문에 모여 들었는 바,

당일날 모여든 고기들이 기쓰고 용문을 넘어보려 애썼지만 전부 실패하고 말았다.

그리고 용문을 오르다 탈진한 고기들은 모두 갈매기의 먹이가 되었다.

이를 본 지나던 과객이 한탄하며 이런 시를 남겼다고 한다.

 

膣割河溝(질할하구) 雜魚全來(잡어전래) :

微稚健來(미치건래) 魚走鷗利(어주구리)

라고 했다. 번역 하자면

 

질할 하구에 각종의 물고기가 모두 왔구나.

치어까지 모여들었지만 (용문에 오르지 못하고) 갈매기만 이롭게 하는구나!

하는 의미인데 훗날 장난끼 좋아하는 사람들이

지랄하고 짜바졌네, 미치겠네 어주구리라는 육두문자를 만들었다.

다만 魚走鷗利(어주구리)란 말은 어부지리(漁父之利)라는 말과 같은 의미로 다음과 같은 고사에 연유한다.

 

()나라가 연()나라를 치려 하자 때마침 소대(蘇代)

연나라 왕의 부탁을 받고 조나라의 혜문왕(惠文王)을 찾아가 말했다.

오늘 오면서 역수(易水)를 지나는데 민물조개가 입을 벌리고 햇볕을 쪼이고 있었습니다.

 황새가 조갯살을 쪼아 먹으려 하자 조개가 입을 오므려 황새의 주둥이를 물어 버렸습니다.

황새가 말했습니다.

오늘도 비가 안 오고 내일도 비가 안 오면 죽고 만다.’

 조개 역시 황새에게 말했습니다.

 ‘오늘도 못 빠져나가고 내일도 못 빠져나가면 너도 역시 죽고 만다.

둘이 서로 놔주려 하지 않자, 마침 지나가던 어부가 그 둘을 한꺼번에 잡아 버렸습니다.

지금 조나라가 연나라를 쳐 두 나라가 오래 대치하면 백성들을 피폐하게 만들게 됩니다.

 신은 강한 진()나라가 어부처럼 두 나라를 한꺼번에 취하는 이득을 얻게 될까 우려됩니다.

그러므로 왕께서는 연나라 치는 문제를 심사숙고하시기 바랍니다.”

혜문왕은 과연 옳은 말이라 하여 연나라 공격 계획을 중지하였다.

(趙且伐燕, 蘇代爲燕謂惠王曰, 今者臣來, 過易水, 蚌方出曝, 而鷸啄其肉,

 蚌合而鉗其喙. 鷸曰, 今日不雨, 明日不雨, 卽有死蚌. 蚌亦謂鷸曰,

今日不出, 明日不出, 卽有死鷸. 兩者不肯相舍, 漁者得而幷禽之.

今趙且伐燕. 燕趙久相支, 以弊大衆, 臣恐强秦之爲漁父也.

故願王之熟計之也. 惠王曰, . 乃止.)

 

이 이야기는 전국책(戰國策) 연책(燕策)〉》에 나오며, ‘어부지리라는 말은

 어옹지리(漁翁之利)’, ‘방휼지쟁(蚌鷸之爭)’, ‘휼방상쟁(鷸蚌相爭)’이라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