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신명11구) 지동귀지(止動歸止) 지갱미동(止更彌動)

2018. 2. 10. 22:31신심명


(중국 운남성 원통사 대웅전. 아난과 가섭존자가 협시하고 있다.)


(심신명11) 지동귀지(止動歸止) 지갱미동(止更彌動)

 

움직임이 그처서 그침으로 돌아가면 그침이 다시 더크게 움직인다.

그침이란 고요함을 의미한다. 그침에서 고요함으로 돌아간다는 말은

()에서 정()으로 돌아간다는 의미다.

씨앗이 뿌려져 뿌리가 나고 잎과 줄기가 나서 꽃을 피우는 것도 동()이요,

홍안(紅顔)의 얼굴이 빨래판처럼 주름이 잡히고 검은 머리가 백설처럼 하얗게 변하는

무상한 우리네 육신 또한 동()이다.

이렇게 모든 객관적 형상 곧 물()이 변천해 가는 것을 천류(遷流)라 한다.

()이란 움직임의 그 본성으로 돌아감을 의미한다. 곧 중도의 의미다.

일체의 사물은 천류하지만 그 자성은 본래 움직임이 없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다.

 

모든 사물은 인연으로 생한 것임으로 인연으로 생한 제법은 자체가 자성이 없다. 성공(性空)이다.

 일체 사물은 천류하지만 그 자성은 본래 움직임이 없다는 말은

만법마다의 당체가 본래 스스로 천류하지 않은 것이지

현상의 차발적인 모습은 천류하나 그 자성은 천류하지 않는다 함은 아니다.

그럼으로 조론(肇論)에 이르길

반드시 제법의 움직임 가운데서 본질의 고요함을 구하면

현상의 모든 움직임이 목전에 나타난다 해도 마음의 세계가 湛然하다.

그 때문에 움직이지만 항상 고요하다(必求靜於諸動 故雖動而常靜 不釋動而求靜 故雖靜而不離動)”라고 했다.

모든 경계는 보는 주관이 있기 때문에 보이는 객관이 있는 것이다.

보는 자가 없다면 보이는 것이 없는 것이다.

객관도 주관도 의타기성(依他起性)이라 자성이 없다. 법이란 것이 없는 것이다.

번뇌 또한 마찬 가지다. 그럼으로 취할 법도 버릴 법도 없는 것이다.

 중도란 모든 물()이 의타기성임을 알기에

굳이 움직임을 버리지 않고 고요함을 구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과 세계가 둘이 아닌 하나의 중도는 텅 비고 한가하여,

마음에 감응하는 세계가 어지럽게 뒤섞였다 해도 중도에 화합함을 잃지 않는다.

이는 화엄경에서 보리의 도량을 떠나지 않고 일체의 세계에 보편하다말한 것과 같다.

 이른바 부처님의 法身은 법계에 충만하여 일체 중생 앞에 보편하게 나타나네.

빠짐없이 인연 따라 감응하시나 항상 보리좌(菩提座)에 계시네라고 한 것 경우와 같다.

이러한 이치를 깨닫지 못한다면 이 둘이 아닌 종지를 밝히기란 어려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