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돌은 네 마음 안에 있느냐 밖에 있느냐/청량법안(淸凉法眼:885~958) 선사

2018. 2. 2. 00:17선시 만행 한시 화두



저 돌은 네 마음 안에 있느냐 밖에 있느냐/청량법안(淸凉法眼:885~958) 선사

 

스님의 법명은 문익(文益)이며, 여항노씨(餘杭魯氏) 자손이다.

머리 깎고 개원사 각율사(希覺律師)를 찾아가 구족계 받았으며, 각율사가 사명산(四明山)에서 교화를 크게 일으키자

스님도 그곳에서 율의(律儀)를 익히고 교화를 크게 일으키자 스님도 그곳에서 율의를 익히고 문장에 힘썼다.

그로부터 얼마후 잡다한 일을 다 버리고 지팡이를 떨치면서 남쪽으로 갔다.

복주(福州)에 이르러 처음 장경혜릉(長慶慧稜:854~932)스님을 찾아뵈었으나 깨닫지 못했다.

그리하여 도반 법진(法進), 소수(紹修) 두 스님과 함께 호외(湖外)지방으로 행각을 떠나려 하였는데

 때마침 비를 만나 잠시 복주서편 지장원(地藏院)에서 쉬게 되었다.

큰 방에 들어가 땅화로 곁에 앉아 있는 암주를 뵙자 암주가 스님에게 물었다.

이번 길에 어디로 가려 하느냐?”

행각(行脚)을 떠나는 길입니다.”

행각이 무엇이냐?”

모르겠습니다.”

모른다는 말이 가장 가까운 말이다.”

이 세 사람은 화톳불을 쬐면서 이어 승조(僧肇)법사의 조론(肇論)을 거론하게 되었는데

천지는 나와 같은 뿌리며......”라는 구절에서 지장원 암주가 또 물었다.

산하대지가 자신과 같은 것인가?”

소수스님이 말하였다.

같습니다.”

지장원 암주는 손가락 두 개를 세우고 뚫어지게 쳐다보니 동행했던 두 스님이 문뜩 일어나 밖으로 나가버렸다.




비가 그쳐 떠나려 하는데 지장원 암주는 이들을 보내면서 말하였다.

그대들은 늘상 삼계는 오직 이 마음이다.’라고 말한다지.”

그리고는 뜰 아래 있는 돌을 가리키면서 말하였다.

한번 말해 보아라. 저 돌은 마음 안에 있느냐, 밖에 있느냐.”

마음 안에 있습니다.”

행각하는 사람이 무엇에 집착하여 돌덩이를 마음에 두느냐.”

스님은 할 말을 잃었다. 마침내 보따리를 풀고는 일행이 모두 결택(決擇)을 구하였다.

한 달 남짓 자신의 견해를 올리고 도리를 말하니 암주가 말하였다.

불법이란 그런 것이 아니다.”

이런 처지에서는 할 말도 궁하고 이치도 끊어졌습니다.”

불법을 논하자면 모든 것이 보이는 그대로이다.”

스님은 이 말에 크게 깨쳤다.

~출처: 五家正宗賛/ 선림고경총서10~

 

@장경혜능(長慶慧稜:854~932)은 설봉의존(雪峯義存:822~9080의 문하의 스님이며,

여기서 말하는 지장암의 암주는 나한계침(羅漢桂琛:867~928)을 일컫는다.

화두는 사실 어느 것이든 언어도단(言語道斷)의 경지라 이에 대한 설명이나 해설은

사족(蛇足)에 불과하겠지만 감산덕청스님의 <조론>에 대한 약주(略註)를 빌어 중생의 아름알이로 편집하여 기술해 본다.

 

@감산덕청(憨山德清: 1546~1622)스님은 중국 명나라(1368~1644) 시대의 스님으로

지금의 안후이 성(安徽省)에 속한 금릉의 전초(全椒)에서 태어났다.

속성(俗姓)은 채()이고 이름은 덕청(德清)이며 자는 징인(澄印)이다.

감산(憨山)은 호이며 일반적으로 감산대사(憨山大師)라고 존칭 되며 시호는 홍각선사(弘覺禪師)이다.

감산덕청은 염불과 간화선을 함께 닦았으며, 주굉(袾宏:1536~1615[5]),

진가(眞可: 1543~1603[6]), 지욱(智旭: 1596~1655)과 더불어

명나라(1368~1644) 시대의 사대고승(四大高僧) 중의 한 명이라 칭해진다.

감산덕청은 많은 저서를 남겼는데, 여기에는 불교의 여러 종파에 걸친 저서들뿐만 아니라

유교 · 불교 · 도교의 3교의 조화를 추구한 저서들도 있다.

 

첫 귀에 나온 천지는 나와 같은 뿌리이며(天地如我同根)..이란 말은

후술되는 삼계는 오직 이 마음이다(三界唯心)이란 말과 같은 의미이며,

저 돌이 마음 안에 있느냐, 마음 밖에 있느냐?하는 말의 진의는

곧 불법(佛法)이 무엇이냐고 묻는 것이다.

불법의 진수는 인연 따라 여러 가지로 경에서 말해지지만 승조는 조론(肇論)에서

本無. 實相. 法性. 性空. 緣會. 一義耳라고 했다.

본무와 실상, 법성과 성공과 연회는 하나의 의미일 뿐이라는 의미다.

 

本無란 번뇌가 고요히 사라진 一心에는 하나의 법도 없어,

일체 육진(六塵)의 경계로 나타나는 차별적인 모습을 떠나서 범부, 성인이라 하는 상대적인 경지가 사라진 것이다.

본래 차별적인 법의 모습이 없는 것이 본무(本無)인데 이는 의식적인 사변으로 추리하여

모든 법을 없게 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왜냐하면 육진의 경계로 나타난 일체의 모든 차별적인 법은

모두가 일심이 인연을 따라 변화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일심 자체는 본래 나옴이 없고 인연이 회합(緣會)하여 나왔을 뿐이다.

그 때문에 본무의 일심이 인연으로 회합하여 나왔다 하여 연회(緣會)라고 하였다.

인연으로 회합하여 나온 현상의 모든 법은 본래 실체의 자체는 없고,

인연으로 나왔기 때문에 공()이다. 그 때문에 자체는 성공(性空)이라 한다.

 

본문에서 행각하는 사람이 무엇에 집착하여 돌덩이를 마음에 두느냐.”라는 말은

 현상의 만법은 일심의 본무가 인연을 따라 발생하였을 뿐

마음 자체가 발생한 것은 아니라는 의미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인연으로 발생한 만법은 본래 무생(無生)의 본무(本無)이기 때문에 소멸한다 해도

인연이 사라졌을 뿐 마음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며,

인연의 회합을 따라 제법으로 나오지도 않았고

인연의 분리를 따라 사라지지도 않는 것이 본무(本無)의 일심(一心)인 것이다.

그러므로 인연의 회합으로 발생했다가 인연의 분리를 따라서 소멸하는 것으로써

모든 법을 관찰한다면 모든 법이 지금 현재 존재해 있다 할지라도 진실하게 존재해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법의 자체는 항상 스스로 공하고,

자체가 항상 스스로 공하기 때문에 연회의 제법을 성공(性空)으로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 구절의 불법을 논하자면 모든 것이 보이는 그대로이다.”라는 말은

조론의 말을 빌리자면 법성(法性)을 말하는 것이다.

모든 법의 진실한 성품이 바로 진여(眞如)이며,

진여성공이 인연으로 나타나 이루어진 모든 법의 자성은

여여(如如)하게 평등하여 차별적인 모습을 떠나 있다.

진여는 성공(性空)이다. 진여성공은 있는 그대로의 모든 법이어서 제법마다 전체가 진여이다.

진실로 진여는 성공(性空)이기 때문에 모든 법의 성품 또한 공이다.

그럼으로 불법을 논하자면 모든 것이 보이는 그대로이다.”라고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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