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의 뒤안길에서 넋두리

2017. 12. 7. 21:44한담(閑談)




세월의 뒤안길에서 넋두리

 

공주 마곡사를 가보면 대웅보전 주련에 이런 글귀를 볼 수 있다.

 

去來觀世間(거래관세간)

猶如夢中事(유여몽중사)

 

오가며 세상사 둘러보니 마치 꿈속의 일 같다는 의미다.

우리네 삶의 길이 꿈속의 길을 걷는 것이라면 이는 우리네 삶이란 어떻게 살아왔던 간에

무상하고 허망하다는 이야기인데 그렇다면 산다는 것이, 삶이란 것이 진정한 의미가 없다는 말인가.

흐리고 축축한 날 세월의 뒤안길에서 어떻게 살아왔느냐가 아니라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며 나라는 존재가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한 묻어 둔 의문이 문득 고개를 든다.

구도자들이 그토록 알고자 한 <이 뭐꼬?(是甚麽)>도 결국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삶이란 젊어서는 아래는 비어도 위로 향하는 불같이 살고 싶다가도,

세월이 흐르게 되면 위는 비어도 아래로 흐르는 물같이 살고 싶어 하는 것이

어찌 나만이 느끼는 생각일까 마는 지나고 보면 세월 속의 삶이란 그 모든 것이

부질없고 공허하게 느껴지는 것은 단지 세월 탓만은 아닐 것이다.

생각해 보면 야망이 무슨 의미가 있고, 지족하는 것도 앞으로 닥칠 죽음이란 문제와 결부시켜 보면

무의미한 것이 아닌가. 많은 지식을 습득하고, 출세하고, 세상 사람들의 선망 받아가며

선량하게 살았다한들 그것이 존재에 대한 궁극적 답이 될까.

밤은 깊어 가는데 부질없는 한 생각, 한 생각이 꼬리를 묻다.

 

신의와 인간적 도리를 늘 생각하며 살아왔지만

한편으로는 세상에서 말하는 가치관이란 것도 생각해 보니

존재의 궁극적 가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그 행위를 사회적인 규범에 계합시킨 도덕적 교훈에 불과한 것이었다.

욕심을 내지 말라. 선행을 베풀라. 항상 고마움을 느끼고 겸손하며,

세상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으로, 지족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사랑하고 존경하라는 등 등.

나의 존재가 곧 사회적인 규범이나 도덕적 가치를 위한 것

그것만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면 나라는 존재는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가.

 

평생 구도의 길로 삶을 살아 온 어느 선사의 열반송을 보면

70년을 환()과 같은 삶의 바다를 놀다가

오늘 아침에 처음 온 곳으로 돌아간다고(七十餘年遊幻海 今朝脫却返初源) 했다.

()같은 세상 잘 노니다가 오늘 열반에 든다는 의미다.

그래서 모두가 분명 공한데 깨달음이니

생사의 근원이 어디 있느냐고 묻는다.(廓然空寂本無物 何有菩提生死根).

죽음 앞에서는 모든 것이 공허하다는 의미 또한 말하고 있지 않은가.

 

나이를 먹거나 세상에 조금이라도 얼굴이 알려진 사람들을 보면

실제 그렇게 사는지는 몰라도 옛날 도덕군자 같은 소리만 늘어놓는다.

환같은 이 세상을 일깨우는 철학적이고, 도덕적인 규범들.

그것은 어리석은 중생들을 이끄는 좋은 지침은 되겠지만

삶과 죽음의 문제를 직면하게 되면 공허하고 무상하고 허망한 소리에 불과할 뿐이다.

헛된 욕망이나 부질없는 욕심과 악행 삿된 견해나 이념에 빠져 놀아나거나

원망과 질투와 분노를 다스리지 못한 중생들에게는 좋은 보약이야 될 수 있겠지만

그러나 그것이 삶의 궁극적인 답은 아니지 않는가.

어찌 그런 것들이 존재의 목적이 될 수 있겠는가.

선한 행위인들 악학 행위인들 그런 행위가 어찌 존재의 궁극적인 해답이 될 수 있겠는가.

 

달마대사에게 어느 백정이 나의 직업이 소를 잡는 일인데

어찌 살생을 하지 않고 도를 이룰 수 있느냐 묻자 달마대사는

너는 업을 묻는 것이지 삶의 존재가치를 묻는 것은 아니라고 답한다.

존재의 궁극적 의미, 곧 도의 의미를 사회적인 도덕규범이나 업()과 혼동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존재의 궁극적 의미가 무엇일까.

삶의 존재가치가 선악의 행위를 넘어서고,

업을 넘어 그것과는 별개의 문제로 존재하는 것이라면

그 궁극적인 존재의 의미는 무엇일까.

 

괄허(括虛)선사 (1720-1789)는 그의 열반송에서 이렇게 말했다.


환으로 와서 환을 쫓아가는,

오고 감의 환 가운데 있는 (그 물건이) 사람이다.

(幻來從幻去 來去幻中人).

환 가운데에 있는 것이 사람이라는 말의 속뜻은 세상은 꿈과 같이 허망하지만

그 꿈을 꾸는 그 주체는 환 가운데 진실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꿈을 꾸는 자는 누구인가.

허망한 육신을 지닌 이 몸이 아니라 육신 안에 있으면서

육신을 벗어나 꿈을 꾸는 그 주체는 도대체 무엇이며, 또 어디에 있는가.

 

보는 것이 없으면 분별이 일어나지 않고,

 듣는 바가 없으면 시비가 일지 않는 다는 것은 일찍이 옛 선사들이 말한 구도의 길이다.

삿된 망상은 내려놓을 수는 있다. 이른 새벽 다리 꼬고명상에 잠겨본 자라면

경계를 따라 일어나는 그 마음을 알게 되고 한때나마 무심해 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때의 그 텅 빈 마음 그것도 종국에는 해답은 아니다.

질문이 끊어진 그곳에 답이 있다고 하지만 비사량처(非思量處)

알음알이로 알 수 없다는 그 경지.

아득하고 아득한다. 허공을 맴도는 메아리마냥 공허한 소리만 가슴에 울린다.

 

답 없는 질문들...

 

늦은 밤 소슬한 밤바람이 창밖을 스쳐가고 어둠 속에 흰 눈이 소록소록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