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거사들의 불교이야기(6) 방거사(龐居士) 이야기

2017. 8. 13. 17:09조사어록과 잠언


(상해 예원)


중국거사들의 불교이야기(6) 방거사(龐居士) 이야기


세간에 머물며 가족을 거느리면서도 남다른 수행과 정진으로

출가자들보다 탁월한 지혜를 득한 이들이 많은 데 이런 분들을 일러 거사(居士) 또는 처사(處士)라 칭한다,

그 대표적 분으로는 인도의 유마거사(維摩居士)와 우리나라의 부설거사(浮雪居士)

그리고 중국의 방거사(龐居士)를 꼽는다.

(부설거사에 대해서는 본방 <한국불교거사의 효시 부설거사 참조>)


#사진:방거사진영(일본도쿄박물관소장)

 

@방 거사가 언제 출생하였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간략히 살펴보면

그는 당나라 사람으로 808년에 이르러 입적하셨으니 이는 우리나라로 보면 신라시대에 해당한다.

거사의 이름은 온(), 성장한 뒤의 자()는 도현(道玄)이다.

그는 현재 중국 호북성(湖北城)에 해당하는 형주(衡州) 형양(衡陽) 출신이다.

 아버지는 형양 지방의 태수였고 성남(城南)에 살면서 집의 서쪽에 암자를 짓고 수행했다.

그로부터 수년 뒤 방거사를 비롯하여 전 가족이 득도하니

지금의 오공암(悟空庵)이 옛 수행하던 암자가 그것이요,

후에 암자의 아래 에 있는 옛 집을 희사하니 지금의 능인사(能仁寺)가 그것이다.


 

@방거사가 도를 성취하기 이전에 수행정진을 위해 당나라 정원연간(785~804)

자신의 전 재산을 배에 싣고 동정호(洞庭湖)의 상류에 수장해 버리고

 그날 그날의 생활을 영위했다. 부유는 나태(懶怠)와 희로애락의 산란(散亂)이 유발되므로 정진에 장애가 되고,

가난은 행주좌와 어묵정동(行住坐臥 語默動靜) 간의 공부가 향상되는데 지극한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삶은 오직 한 장의 나뭇잎 같은 생애였다.

거사에게는 처와 일남일녀가 있었는데 모두들 시집장가는 물로 출가하지 않고

대나무 그릇을 만들어 시중에 팔아 생활을 하고 있었다.

 

당나라 정원연간에는 선종(禪宗)인 대승선(大乘禪), 여래선(如來禪), 율종(律宗)이 융성하였고

새로 조사선(祖師禪)이 번영하여 천하를 휩쓸고 있었다.

방 거사는 어느 날 석두희천(石頭希遷, 700~791) 선사를 찾아가 참학(參學)한 뒤

 마조(馬祖) 화상을 알현하고 본래의 마음을 스스로 깨쳤다.

이에 사사(事事)에 현오(玄奧)를 다하고 도와 계합(契合)되지 않는 바가 없었으며

 제방에 나아가 두루 선지식을 찾아 거량했다.

이 기록은 <선문염송(禪門拈頌)><벽암록(碧巖錄)>에도 나와 있다.


(제부도 일몰)

 

방거사는 묘덕(妙德)과 변재가 대단하고 문자의 진전(眞詮)마저 갖추어 합치하고 있었으며

 그 후 각처를 찾아다니면서 지극한 이치를 겨루었다.

원화(元和) 초년에 그는 양양(襄陽)에 살면서 암굴에 보금자리를 정했다.

 그때 태수인 우적은 각 지방의 민요를 수집하고 있었는데

거사의 글을 읽고 더욱 흠모하는 생각이 더했다.

그래서 기회를 보아 몸소 나아가 알현하고 보니 옛 친우와 같았다.

그리하여 정분이 깊이 계합하고 또한 왕래가 끊어지지 않았다.

그가 수집하여 남긴 이야기가 <방거사어록>이다.


(진가사에서)

 

@만년에는 딸 영조를 데리고 호북 양주 땅에서 안빈낙도(安貧樂道)를 구가하면서 지냈고,

부인과 아들은 수 십리 떨어진 산중에서 황무지를 개간하여 먹고 살았다.

거사가 입멸(入滅)하려 할 때 딸 영조(靈照)에게 말하기를

<모든 것이 환화(幻化)며 무실(無實)이니 네가 하기에 따라 인연한 바이니

잠깐 나가서 해의 높이를 보고 한낮이 되거든 알려다오.>

영조는 문밖에 나아가 급히 말하되

<벌써 한낮인 데다 일식(日蝕)입니다. 잠깐 나와서 보십시오.> 하니

거사가 설마 그럴 리가 하고 말하니 영조가 

<정말 그러합니다.> 라고 말했다.

거사가 일어나 창가에 갔다. 그러자 영조가 아버지가 앉았던 자리에 제빨리 올라가

가부좌하고 바로 열반에 들었다. 거사는 돌아서서 그것을 보자 웃으며 

<내 딸 녀석 빨리도 앞질러 가는 구나.> 하고는 나무가지를 모아 다비를 하였다.


(방거사 부인과 딸 영조)

 

@방거사는 딸의 장래를 위해 죽음을 일주일 연기했고,

그가 죽을 때는 마침 그 고을(襄陽) 태수 우적이 찾아왔다.

우적은 그의 친구이자 사법제자였고, 후일 <방거사어록>을 편찬한 사람이다.

문안차 찾아온 우적에게 거사는 우공의 무릎에 손을 얹고 잠시 돌아보며 말하기를

 다만 원컨대 있는 바 모두 공하니 삼가 없는 바 모두가 있다고 말라.

잘 계시오. 세상살이는 다 메아리와 그림자 같은 것입니다.」 라는 말을 남기고 입적하니

이상한 향기가 방에 가득하고 몸은 단정히 앉아 사색(思索)한 것 같았다.

그러자 우공은 놀라서 붙들려 했으나 이미 열반에 들었다.

바람은 대택(大澤)에 거칠게 불어 대는데 하늘에 피리 소리는 고요히 들려

달은 희미하게 창가에 비치는데 얼굴의 화색은 변하지 않았다.

시체를 태워 강이나 호수에 버리라는 유언에 따라

진의사(陳儀事)를 갖추어 여법(如法)이 다비(茶毘)에 붙이게 되었다.


(소림 숭산)

 

한편 곧 사인(使人)을 보내어 처자에게 알리니 처는 소식을 듣고 가로되

<이 어리석은 딸과 무지한 늙은이가 알리지도 않고 가버렸으니 이 어찌 가히 참겠는가. >

하고 화전을 일구고 있는 아들에게 가서

<방공(龐公)과 더불어 영조(靈照)도 가버렸다.> 고 알리니

아들은 호미를 놓고 <예 !> 하고 조금 있다가 선 채로 열반에 드니

()는 말하되 <어리석은 아들아! 어리석음이 어찌 이다지도 한결 같은고> 하고

또한 화장하니 사람들은 모두 기이하다고 생각했다.

얼마 후에 그 처()는 마을의 집집을 두루 돌면서 작별을 고()하고 자취를 감추었으니

그로부터 어디로 갔는지 아는 자가 없었다.


(황산 비래석)

 

@방거사의 열반송(涅槃頌)

다만 온갖 있는 바를 비우기 원할지언정,

온갖 없는 바를 채우려 하지 마라!

즐거이 머문 세간,

모두 그림자와 메아리 같나니!

 

但願空諸所有(단원공제소유)

愼勿實諸所無(절물실제소무)

好住世間(여주세간)

皆如影響(개여영향)


~방거사이야기 1부에 이어 2부가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