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동기행(3/5) 옛 장돌뱅이들의 시장 화개장터

2017. 6. 9. 22:32명승지

하동기행(3/5)  옛 장돌뱅이들의 시장 화개장터

 

 

 

조영남의 노래로 더욱 잘 알려진 화개장터는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탑리의

옛 화개장 터를 현대에 들어와 복원한 재래식 시장이다.

화개장은 본래 화개천이 섬진강으로 합류하는 지점에 열리던 장으로,

섬진강의 가항종점(可航終點)’ 즉 행상선(行商船) 돛단배가 들어올 수 있는 가장 상류 지점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러한 지리적 특징으로 인해 이곳에 대규모의 장터가 들어서게 되었다.

화개장은 영남과 호남의 경계에 있으나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에 소속되어 있고,

5일마다 정기적으로 장이 섰다. 조선 시대 때부터 중요한 시장 중의 하나로

주로 지리산 일대의 산간 마을들을 이어주는 상업의 중심지 역할을 해 왔다.

옛날에는 섬진강의 물길을 주요 교통수단으로 하여 경상도와 전라도 사람들이 이 시장에 모여,

내륙에서 생산된 임산물 및 농산물과 남해에서 생산된 해산물들을 서로 교환하였다.

 

 

 

 

현재 복원된 화개장터는 옛날 화개장터의 명성을 되살리기 위해

1999124일에 하동군 화개면 탑리 726-8번지 일원 부지 면적 9,917

17억 원 가량의 예산을 투입하여 전통 장옥 3, 장돌뱅이들의 저잣거리와

난전, 주막, 대장간 등 옛 시골장터 모습을 원형 그대로 되살리고

넓은 주차장과 화장실 등 편의 시설을 곁들여 2001년 봄에 개장하였다.


 


화개장이 언제부터 형성되어 상거래가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없지만,

화개면지에서는 조선 시대 하동 지역의 시장 분포[1770-1830]라는 제하(題下)에서

당시의 시장 다섯 곳을 소개하면서, 화개장은 1770년대에 1·6일 형식의 오일장이 섰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하동군사(河東郡史)의 기록을 보면 1913년경에는 2·7일 형식으로 장이 서다가

1928년경부터 1·6일로 바뀌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니,

중간에 개시 일에 다소 변동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하동군사(河東郡史)에서는 옛적에는 화개장이 전국 7위의 거래량을 자랑한 큰 시장이었고",

"남원과 상주의 상인들까지 모여들어 중국 비단과 제주도 생선까지도 거래를 했다.”

적고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로서는 다른 시장에 비해 상대적으로 규모가 상당히 컸던 것임을 알 수가 있다.

해방 이후에도 1일과 6일에 서는 정기시로 명맥을 유지해 왔다.

그러나 6·25 전쟁 이후 지리산의 빨치산 토벌 등으로 산촌이 황폐해지면서 화개장도 함께 쇠퇴해 갔다.

 



 

 

1948년 김동리(金東里)가 소설 역마(驛馬)를 쓸 당시의 낭만어린 화개장터는

현대화 바람에 의해 사라지고, 현재 그 자리에는 상설 상점 및 식당,

그리고 노래방과 술집 등 유흥업소 등이 그 자리를 차지해버렸다.

지금은 화개면사무소 앞 쪽 화개다리 옆에 1997년부터 복원한

현대식 화개장터가 옛날 전통시장의 기능을 대신하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규모를 본다면 여늬 재래시장과 크게 다를바 없지만

특히 화개장터가 유명해진 것은 매년 4월이면 화개장터에서 쌍계사까지

10리에 걸쳐 벌어지는 벚꽃축제 때문이 아닌가 사료된다.

이번 방문은 벚꽃철이 이미 지난 시절에다 장날도 아니었기에

장터는 생각보다 한산한 느낌마저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