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화성행궁

2017. 2. 25. 14:45명승지

 

 

 

 

수원 화성행궁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남창동에 위치한 조선시대 궁궐인 화성행궁 (華城行宮)

 정조가 융건릉에 능행할 목적으로 한 행궁이다.

행궁은 왕이 궁궐 밖을 행차할 때 임시로 머무는 궁궐을 지칭하는 말이며

융건릉은 제22대 정조의 아버지 장조(사도세자)와 현경왕후를 모신 융릉,

정조와 효의왕후를 모신 건릉을 합쳐 부르는 이름이다.

화성 행궁은 조선시대에 건립된 행궁 중 규모면에서 가장 크며,

성곽과 함께 정치적, 군사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건축물이다.

경기도기념물 65호로 지정되어 있다가, 200768일 사적 제 478호로 승격 지정되었다.


 

 

 

화성행궁의 규모는 전체 557칸으로 다른 행궁에 비해 현저히 크며

정조 20(1796) 화성 축조와 함께 지어졌다.

화성행궁은 정조가 부친인 사도세자의 무덤 현륭원에 행차할 때

머물기 위한 처소로 마련된 것이지만

평상시에는 수원부 치소로 사용되었다.


 

 

행궁의 구조

화성행궁은 팔달산 정상의 서장대 아래의 산기슭을 중심으로 경사지가 펼쳐지고,

시가지가 시작되는 곳의 평지에 위치해 있다.

구조는 앞쪽으로 긴 형태의 장방형 구조로 동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정문인 신풍루 양쪽으로 남군영과 북군영이 있으며

신풍루로 들어서면 왼쪽으로는 서리청과 비장청, 오른쪽으로는 집사청이 위치해있다.

서리청과 비장청, 집사청을 좌우로 지나 마당을 가로지르면 좌익문이 있고, 이를 통과하면 중앙문이 나온다.

이 중앙문을 지나면 화성행궁의 정전인 봉수당이 나타난다.

화성행궁과 따로이 떨어져 있는 화령전은 정조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신풍루

신풍루는 화성행궁의 정문이다. 신풍루는 1790(정조 14)에 세워졌는데

처음 이름은 진남루였다가 1795년에 정조의 명으로 신풍루로 변경하였다.

1795년에 정조가 행차했을 때 신풍루 앞에서

정조가 친히 화성부의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는 행사를 벌이기도 하였다.

 

 

 

좌익문

내삼문(內三門)을 바로 앞에서 도와 행궁을 지키는 중삼문(中三門)으로 17903칸 규모로 완공하였다.

행궁의 본전인 봉수당(奉壽堂)에 이르는 두번째 문으로 중양문(中陽門) 앞에 있다.

문의 이름인좌익(左翊)’'곁에서 돕는다'는 뜻이며,

편액은 정조의 명으로 정동준(鄭東浚)이 썼다. 남쪽 행각의 끝은 외정리소와 연결된다.

 

 

 

 

 

중양문

중양문은 행궁의 정전인 봉수당 앞에 있는 문이다.

 1790년에 완성되었고, 가운데의 정문과 좌,우의 협문이 있고 좌우로 행각을 두었다.

 

 

 

 

봉수당

봉수당(奉壽堂)은 화성행궁의 정전이자 화성유수부의 동헌 건물로 장남헌(壯南軒)이라고 한다.

이 건물은 1789년에 완공되었으나 일제강점기에 파괴되었다.

그 후 1997년에 복원되었다.

정조는 1795년에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 진찬례를 이 건물에서 거행하였다.

 

 

 

 

 

 

 

 

 

 

 

 

 

 

 

 

 

노래당(老來堂)

정조대왕이 왕위에서 물러나 수원에서의 노후생활을 꿈꾸며 지은 건물이다.

 

 

 

 

 

 

 

 

 

 

 

 

 

 

 

 

 

 

 

 

 

 

복내당

복내당(福內堂)은 행궁의 내당으로 정조가 행차시에 머물던 곳으로 장락당 남쪽에 위치해 있다

 

 

 

 

 

 

 

 

 

 

 

 

 

 

 

 

 

 

장락당

장락당(長樂堂)1795년에 정조가 행차했을 때에,

혜경궁 홍씨의 침전으로 사용되었던 건물로, 1794년에 봉수당의 남쪽에 동향으로 세워졌다.

정조대왕이 혜경궁 홍씨의 만수무강을 빌어 직접 편액을 써서 걸었다.

 

 

 

 

 

 

 

 

 

 

좌측은 경룡당, 우측은 봉수당.

경룡광(景龍館)은

장락당으로 들어가는 누문. 경룡은 제왕을 상징하는 큰 용을 뜻한다.

 

 

 

 

유여택

유여택(維與宅)은 평소에 화성유수가 기거하다가 정조가 행차시에 머물며 신하들을 접견하는 건물이다.

유여택은 복내당 동쪽 행각과 외정리소 사이에 있다.

유여택은 1790(정조 14)에 건립되어 은약헌(隱若軒)이라 하였다가

1796년에 증축하면서 현재의 명칭을 가졌다.

 

 

 

 

 

 

 

 

 

 

 

 

미로한정(未老閒亭)

행궁후원에 만든 정자로 장래 늙어서 한가하게 쉴 정자라는 뜻이다.

노래당과 함께 갑자년(1804)에 세자에게 양위(讓位)하고

화성으로 가리라던 정조대왕의 뜻이 담긴 이름이다.

 

 

 

 

 

정면 중앙에는 약간 안으로 들여 정문인 신풍루(新豊樓)가 있고

중축 선상에 내삼문인 좌익문(左翊門)과 중양문(重陽門)이 있으며

정당인 봉수당(奉壽堂)이 가장 안쪽에 배치되었다.

 

 

집사청

집사청은 화성행궁의 정문인 신풍루(新豊樓)를 지나자마자 오른쪽에 있다.

화성행궁의 대부분 건물들과 마찬가지로 일제강점기에 완전히 파괴되었다가

 20027월 두 채의 건물로 복원되었다. 집사청은 잡다한 사무를 처리하던 곳으로

왕명전달, 궁궐 열쇠 관리, 임금의 붓·벼루·먹 등의 비품 조달, 정원관리 등을 맡은

조선시대의 액정서(掖庭署)와 비슷한 역할을 하였다.

집사청으로 들어오는 문 앞에는 행궁이 세워지기 전부터 있었던 수령 600년이 넘은 느티나무가 있다.

 

 

 

 

 

 

 

 

 

 

 

 

 

 

 

좌익문 뒤 산능선에 화성장대가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