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화청량산기행(1/3) 청량산 청량사

2017. 3. 25. 15:35국내 명산과 사찰




봉화청량산기행(1/3) 청량산(淸凉山) 청량사(淸凉寺)


청량사라는 이름을 가진 사찰로는 2곳이 잘 알려져 있다.

하나는 가야산줄기에 위치한 천불산 청량사와 봉화청량산의 청량사다.

천불산 청량사는 기암괴석과 바위가 멋지고 봉화 청량산은 가을 단풍이 멋진 곳이다.

불행히도 이번 봉화기행은 가을단풍철이 아니라 겨울을 막 지난 2월 하순이라

나무들이 아직 새 옷을 갈아입지 못한 나신의 상태라 조금 삭막했다.


@선학정(仙鶴亭)

신선과 학이 노니를 의미로 청량사 입구에 있는 정자다. 청량사를 오르는 길은 2곳에 주차장이 있다.

이곳 선학정에 바로 옆의 주차장에서는 청량사가 가깝고

조금 더 위에 입석대에 있는 주차장은 응진암쪽을 오르는데 가깝다.


(일주문 전면)


여늬 사찰과 달리 봉화 청량사는 특히 내게는 잊지 못할 기억이 있다.

봉화 청량사까지는 서울에서 3시간이 넘게 걸리는 먼 거리라 당일 코스로 움직이려면 일찍 집을 나서야 한다.

중부 내륙을 거처 중앙고속도로를 달리는 코스는 이른 시간에는 마땅한 휴게소를 찾기 힘들다.

설상가상으로 청량사 부근 마을에도 식당이 이른 시간에는 문을 열지 않아 아침을 꼭 그르게 된다.

아마도 10여년 전일께다. 아침을 거른 채 간식하나 챙기지 못하고 산행을 시작하여

오후 늦은 시간대에 하산하여 식당에 들렸다.

그런데 귀경길 고속도로에서 잠시 머물러 간식꺼리를 사려고 지갑을 찾는데 아뿔싸, 지갑이 없어졌다.

아마도 식당에서 계산을 하고 나오면서 분실 한 모양이다. 이미 먼 거리를 온 터라 돌아갈 수도 없었다.

더 큰 일은 고속도로 톨게이트비이다. 당시는 하이패스라는 것도 없었던 시대라 무척 난감했는데

다행히 집 사람의 주머니에서 지폐 한 장이 나와 톨게이트에서의 불행은 면했지만

집에 도착할 때까지 자동차 기름이 떨어지지 않을까 조마조마했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이번 기행도 아침은 거르게 되었지만 지난번과 같은 그런 불행을 격지 않아 다행이었다.

 먼거리 산행을 한다면 비상식량은 꼭 준비하고

돈은 나누어 보관해야 한다는 이 평범한 교훈을 새삼 되새겨보게 된다.      


(일주문 뒤편)


봉화 청량산 청량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인 고운사(孤雲寺)의 말사이다.

청량산 연화봉(蓮花峰) 기슭에는 내청량사(內淸凉寺), 금탑봉(金塔峰) 아래에는 외청량사(外淸凉寺)가 있다.

두 절은 모두 663(문무왕 3)에 원효(元曉)가 창건하였다는 설과 의상(義湘)이 창건하였다는 설이 있으나

창건연대로 볼 때 의상은 중국에 있었으므로 원효가 창건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창건 이후 오랫동안 폐사로 남아 있었기 때문에 중건 등의 역사는 전하지 않는다.

다만, 창건 당시 승당(僧堂) 27개의 부속건물을 갖추었던 큰 사찰이었다는 것만 전하여지고 있다.

현재의 두 절은 비록 거리가 다소 떨어져 있지만 상호 연관적인 관계에 있다.


일주문에서 청량사 가는 길 조감


내청량사는 부대하는 당우로 볼 수 있는데, 전자를 유리보전(琉璃寶殿),

후자를 응진전(應眞殿)으로 별칭 하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현재 여승의 수도처가 되고 있는 두 절은 극히 사세가 미약하며,

단지 유리보전만이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7호로 지정되어 있다.




@청량산의 최고봉인 의상봉(장인봉)은 화엄종의 시조인 의상대사께서 입산수도 한곳이라 의상봉이라 불리며,

이곳을 비롯해 보살봉, 연화봉, 축융봉 등 12개의 암봉이 있고

어풍대, 밀성대, 풍혈대, 학소대, 금강대 등 12개의 대와 8개의 굴과 4개의 약수터가 있다.

10여년 전과 비교하여 보면 응진전은 별 달라진 것이 없는데

청량사에는 지장전을 비롯하여 새로운 전각이 몇 채 더 늘었다.

청량사에서 회자하는 명물이 하나 더 늘어났다.

자란봉과 선학봉을 잇는 국내 현수교에서는 제일 높고 길다는 하늘다리이다.

이번 포스팅은 3부로 나누어 1부에서는 청량사 위주로, 2부에서는 하늘다리와 장인봉 주변풍경을,

3부에서는 청량사에서 응진전을 위주로 포스팅한다.




@안심당

안심당(安心堂)은 지난 98년에 지은 건물로 사찰 내의 다원(茶園)으로 대중 포교의 장이다.

"바람이 소리를 만나면"이란 나무현판이 붙어 있는 이 찻집은

 안팎 곳곳에서 은은한 전통의 멋과 향을 느낄 수 있는 개방된 절집의 포근한 쉼터이다.

정면 2, 측면 한 칸의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으며 굴뚝이 아름답다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경지에 이르게 하는 집,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여 산란을 멈추고 평온을 가져다주는 집" 이 바로 안심당이다.

이곳에서 얻어지는 수익금은 중생 구제의 한 실천으로 포교 사업과 불우한 이웃을 위해 쓰이고 있다고 한다.

 

 



안심당 뒤편에 범종루가 있다.

<범종루(梵鍾樓)>

범종루는 9810월에 준공했으며 정면 3, 측면 1칸에 겹처마 맞배지붕의 2층 건물이다.

2층의 바닥은 마루를 깔았고 천정은 서까래를 노출시킨 연등 구조이며 1층에는 기념품 판매장이 자리를 잡고 있다.

범종루(梵鍾樓)는 불전 사물인 15백 관의 범종(梵鍾), 목어(木魚),

그리고 5자 길이의 법고(法鼓), 운판(雲版) 등을 비치한 사찰의 당우 중의 하나로

이곳에 배치된 사물은 모두 부처님께 예불(禮佛)을 드릴 때 사용하는 불구(佛具)로 

 새벽 예불과 사시공양(巳時供養), 저녁 예불을 볼 때 주로 사용된다.

사물을 치는 순서는 법고, 운판, 목어, 범종 순으로 두드리는데 이 소리들로 불음을 전파한다.

범종은 청정한 불사(佛寺)에서 쓰이는 맑은 소리의 종이라는 뜻으로 지옥의 중생을 향하여 불음을 전파한다.

또 법고는 축생의 무리를 구제하며, 운판은 허공을 나는 생명인 날짐승을 향하여 제도하는데 쓰이고,

목어는 수중의 어류를 향하여 소리를 보내어 구제한다는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






범종루 앞 마당에 청류정이라고 하는 수각이 있다.

수각 옆에 유리보전과 오층탑으로 오르는 나무계단이 있다.





@유리보전(琉璃寶殿)

유리보전은 조선 후기 건물로 연화봉과 반야문수봉 아래 가파른 경사면에 자리 잡은 건물이다.

 워낙 경사가 급해 단단한 석축을 쌓아 너른 대지를 조성한 후 전각을 세웠다.

이 유리보전은 청량사의 중심 전각으로 경상북도 유형 문화재 제47호로 지정(1974.12)되어 있다.

정면 3, 측면 2칸의 아담한 전각은 유래가 흔치 않은 명칭을 지녔다.

이 건물은 다포계인 것 같으나 주심포계와 절충한 조선 후기 건물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또한 큰 보 밑에 간주를 세워 후불벽(後佛壁)을 구성해 다른 건물에서 보기 힘든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주련>

一念普觀無量劫 (일념보관무량겁)

無去無來亦无住 (무거무래역무주)

如是了知三世事 (여시요지삼세사)

超諸方便成十力 (초제방편성십력)

한순간에 무량세월 널리 두루 관하니

옴도 없고 감도 없고 머무름도 또한 없네.

이와 같이 삼세 일을 요달하여 안다면

모든 방편 뛰어넘어 십력을 이루리라 





유리보전은 약사여래를 모시는 전각으로 현시보살로 문수보살과 지장보살을 모셨는데

현재 지장보살은 새로 지은 지장각으로 옮기고 대신 그 자리에 보현보살을 봉안했다.



약사여래는 동방 정유리세계의 교주로 병든 자를 구원하는 의왕이다. 약사유리광여래·의왕여래라고도 한다.

약사여래 관련 경전은 4종이 전하는데, 650년 당나라 현장이 한역한

 약사유리광여래본원공덕경 藥師瑠璃光如來本願功德經(약칭 약사경 또는 약사본원경)이 대표적이며

가장 널리 유포되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찰에 약사전이 들어서 있는 것은

이러한 약사여래의 신통력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약사여래. 청량사의 약사여래는 특이하게도 종이로 만든 유일한 지전여래라고 한다.

지금의 이 불상은 지전여래를 개금불사한 것이라고 한다.


보현보살. 지장전이 조성되기 전에는 이 자리에 지장보살을 모시고 있었다.


문수보살. 석고로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확실치 않다.



 

유리보전의 현판(260×60cm)은 고려 후기의 공민왕(恭愍王)이 직접 쓴 친필이라고 전한다.

공민왕은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 지방에 피난 온 적이 있었으므로 친필일 가능성이 높다.

또한 석조고니불상도 있었다 하나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신중탱 


유리보전은 1705(숙종31)에 중수한 이후 1974년 내외부를 중수했으며 1989년과 2000년에 보수했다.

유리보전 앞에는 세 갈래로 자란 노송 한 그루가 있는데 사람들이 이 자리를 삼각우총(三角牛塚)이라 부르니,

곧 세 개의 뿔을 가진 소 무덤인 셈이다.


 

또한 유리보전에는 '10왕전(十王殿)'이 있었는데 만월암으로 옮겼다가 다시 유리보전으로 옮겨 놓았다고 하는데

내가 방문했을때는 보이지 않았다. 10왕은 지장전과 연관되어 있음으로

지장전이 아직 불사가 마무리 되지 않아 후일 이곳에 옮기려고

다른 곳에 모셔두고 있는 것이 아닌가 사료된다..







지장전이다. 예전에 없던 전각인데 새로 지은 모양이다.

 유리보전 안에 모셨던 지장보살을 이곳 지장전으로 옮겨 놓았다. 






미륵반가상 좌측은 선불장이고 우측은 심검당이다.




선불장(選佛場)은

유리보전 옆에 있는 건물로 현재 스님들이 참선 수행하는 곳으로 이용되고 있다.

지난 92년에 지은 건물로 정면 5, 측면 2칸으로 된 팔작지붕을 하고 있으며 가운데 3칸에 툇마루를 달았다.

선불장이란 '부처를 뽑는다'(選佛)라는 뜻으로 일종의 선방으로

시방세계(十方世界)에서 같은 뜻을 가지고 모여든 선객들이 낱낱이 무위(無爲)를 배우는 곳이다.

 즉 계율을 수계하는 도량 또는 교법을 수학하는 도량을 말한다. 선불장 옆에 종무소가 붙어 있다.














오층탑에서 바라본 전경. 좌측은 지장은 중앙은 유리보전, 그 옆은 선불장 그리고 심검당이다.






오층탑과 지장전 가운데 보이는 솔이 삼각우송이다.




선불장과 심검당 뒤쪽에 산신각이 있다.

청량사의 산신각은 지난 2003년에 개축되었는데 정면과 측면 각 1칸으로 맞배기와지붕을 올린 건물이다.

창호는 띠살창으로 짜여진 창살문으로 여닫이문을 달았으며, 안에는 칠성 탱화와 산신 탱화를 봉안하고 있다.

산신 신앙은 불전(佛殿) 안에서는 그 근거를 찾아볼 수 없고

우리나라 특유의 산악 숭배 신앙과 관련이 깊다. 산신은 요마(妖魔)를 물리치는 가람 수호신으로서의 기능과 함께

산속 생활의 평온을 비는 외호신(外護神)으로서도 받아들여지고 있다.

산신각은 불교 본연의 것이 아니라서 전(殿)이라는 명칭을 붙이지 못하고 각()이라는 명칭을 붙이고 있다.

칠성은 수명장수신(壽命長壽神)인 북두칠성을 신격화해 봉안한 것이다.

칠성은 수명신의 구실과 함께 가람수호신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가운데 보이는 전각이 심검당이다.

심검당은 선불장 옆에 있으며 2002년에 개축된 건물로 강원(講院)으로 이용되고 있다.

정면 5,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을 하고 있으며 가운데 3칸은 강원(講院)이고 좌우 양 협실을 두었다.

방문은 세살문이고 가운데 3칸에 툇마루를 달았다.

심검당은 선실(禪室) 혹은 강원(講院)으로 지혜의 칼을 찾는 집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심검당의 검은 마지막 무명(無明)의 머리카락을 단절하여 부처님의 혜명(慧明)을 증득(證得)하게 하는 

 취모리검(吹毛利劍)을 상징하고 있다. 사찰 내에 적묵당()이 심검당과 함께 위치할 경우에는

적묵당은 선원으로, 심검당은 강원으로 이용되는 경우가 많다.

이곳은 수행처이므로 일반인의 출입이 허용되지 않는다.



<심검당주련>

學道如初不變心(학도여초불변심)

千魔萬難愈惺惺(천마만난유성성)

直頙敲出虛空髓(직책고출허공수)

拔却金剛腦後釘(발각금강뇌후정)

突出眼晴全體露(돌출안청전체로)

山下大地是空華(산하대지시공화)


도를 베우려는 뜻 처음과 같이 변함없고

천만가지 어려움도 성성히 깨달았네

곧바로 허공을 두드려 골수를 내고

뇌 뒤에 꽂힌 금강장을 뽑아버리니

돌연히 눈앞에 나타난 우주전체

산하대지가 바로 공화인것을












설선당





금대봉쪽에서 바라 본 사찰전경





~제2부 하늘다리와 주변풍경으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