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3. 13. 22:26ㆍ국내 명산과 사찰
속리산기행(1/3) 미륵대불의 위용을 자랑하는 속리산 법주사
3월의 첫 일요일, 날은 흐렸지만 예정된 산행이라 속리산으로 향했다.
서울에서는 좀 먼 거리라서 일찍 출발하여 천왕봉만 들릴 예정이었지만
속리산이라면 문장대라는 일행의 말에 방향을 바꾸었다.
속리산을 다녀 온지도 어느 듯 강산이 변했을 정도가 되었으니
다시 한 번 문장대를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문장대를 오르는 코스는 예전과 같이 세심정에서 관음암을 경유하여 경업대 문장대
그리고 법주사로 원점회귀 하는 코스로 잡았다.
이른 시간이라 문을 연 식당은 그리 많지 않았다.
속리산 법주사 입구는 예전에 비해 깔끔하게 정비되어 있었다.
속리산의 명물로 꼽히는 정이품송이다.
천연기념물 제103호인 ‘정이품송’은 조선의 제 7대 왕 세조의 비접행차와 관련된 전설을 가지고 있다.
왕위를 찬탈한 후 어린 조카 단종을 죽인 세조는 깊은 마음의 병과 몸에 생긴 피부병으로 고생했다.
심신의 병을 고치기 위해 세조는 먼저 속리산으로 비접을 떠났는데
세조의 연(가마)이 이 소나무를 지나게 되었는데 가지가 늘어져 있어
“연 걸린다”고 하자 스스로 가지를 들어 올려 세조가 정이품 벼슬을 하사했다는 나무다.
세조은 이곳 속리산에서 3일간 기도를 하고 신미대사로부터 3일 동안 설법을 들은 후
샘물을 마시고는 마음의 병을 고치게 되었다.
그러나 몸의 피부병은 낫지 않아 다시 오대산 월정사로 가서 병을 고쳤다고 한다.
10년전만하드라도 뿌리는 살아 있었는데 이제는 완전히 고사목이 되었다.
생자필멸이라더니 흐르는 세월은 어쩔 수 없나 보다.
법주사 일주문이다 이른 시간이라 여린 안개가 가시지 않았다.
일주문의 뒤편
<법주사마애여래의상>
금강문 왼쪽에 자리한 마애여래상은 보물 제216호로 지정되어 있다.
높이 500cm. 광배는 생략되었으며 두 손은 가슴 앞에서 설법인(說法印)을 결하고 있고
연화좌 위에 걸터앉아 두 다리를 내려딛고 있는 의상(倚像)이다.
@금강문(金剛門)
사찰에 따라 천왕문을 세우기도 하며, 어느 경우에는 금강문과 천왕문이 함께 세워지기도 하는데
이때에는 금강문이 천왕문 밖에 세워진다.
금강문은 보통 앞면 3칸, 옆면 1칸의 직4각형 평면을 이룬 단층집으로 건축된다.
중앙문은 앞뒤 모두 아무런 창호를 달지 않고 개방하며, 양 옆칸은 모두 벽체를 친다.
지붕은 맞배지붕이나 팔작지붕으로 꾸미고, 공포는 익공식이나 다포식을 사용했다.
안에는 중앙문만 사람이 통행할 수 있게 하고, 양 옆 칸에는 중앙 쪽으로 홍살을 세워 격리시키고,
그 안에 금강역사상을 세웠다. 이 문을 통과함으로써
사찰 안에 들어오는 모든 악귀가 제거되어 가람의 내부는 청정도량이 된다는 것이다
법주사의 금강문 안에는 두 분의 금강역사와 코기를 탄 보현보살과 사자를 올라 탄 문수보살상을 같이 모셔놓았다.
다른 사찰과 같이 지물(持物)은 같지만 금강역사의 모습이 여늬 사찰에서 보는 것과 많이 다르고
또 문수와 보현을 왜 금강문에 모셨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
아마도 새 전각을 마련하기까지 임시로 모셔둔 것이 아닌가 사료해 본다.
밀적금강
보현보살
나라연금강
문수보살
천왕문이다. 초파일 연등달 준비를 미리하는가 보다.
@천왕문(天王門)은 봉황문이라고도 하며 본래 맑고 깨끗해야 할 부처님의 세계를 지키는 사천왕(四天王)을 모신문이다.
동쪽의 持國天王(지국천왕), 서쪽의 광목천왕(廣目天王), 남쪽의 증장천왕(增長天王),
북쪽의 다문천왕(多聞天王)깨서 삼보(三寶)를 지키시는 문이다.
나쁜 것을 깨 버리고 올바른 길을 펼치려는 마음을 일깨워 주고 있는데 그 뜻이 있다.
지국천왕은 비파(琵琶)를 들고 증장천왕은 보검(寶劒)을 잡았으며
광목천왕은 용관, 여의주(如意珠), 또는 견색(絹索; 새끼줄)을, 다문천왕은 보탑(寶塔)을 받쳐 든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보편적이다. 속리산 천왕문의 천왕들도 이 룰을 따랐다. 대체로 이들 사천왕은 왼쪽에 동.남천왕,
오른쪽에 서.북천왕이 배치된다. 이 사천왕들은 불교경전에 나타나는 인도 재래의 神(신)인데,
불교의 수호신이 되어서 사방을 지키게 된 것이다.
일정한 모습이 처음부터 규정된 것이 아니어서 인도에서는 귀족의 모습으로 표현되었고
중앙 아시아나 중국, 우리나라로 전파되는 동안 무인상(無人像)으로 변형되었다.
남방수호신 증장천왕
서방수호신 광목천왕
동방수호신 지극천왕
북방수호신 다문천왕
천왕문에서 바라 본 팔상전이다.
<법주사 팔상전> 은 국보 제55호로 지정되어 있는 국내 유일의 5층 목탑이다.
쌍봉사 대웅전과 두 기였지만 1984년에 쌍봉사 대웅전이 불타는 바람에 목탑으로서는 유일한 지정문화재가 되었다.
5층의 옥개는 네모지붕이며 그 위에 상륜부가 완전하게 남아 있다.
1968년 해체 중수할 때 5층 도리에서 상량문이 발견되고 심초석에서 사리장치와 함께 동판에 새긴 글이 발견되었는데,
그 내용에 의하면 팔상전은 임진왜란 때 완전히 소실된 것을 1605년에 재건하고 1626년에 중수했다고 한다.
건물은 2단의 석조기단 위에 세워졌는데 기단의 각 면 중앙에는 돌계단이 있다.
건물의 평면은 정사각형이며 건물의 외관은 층이 높아지면서 주간의 수가 줄어들어 강한 체감을 보이는데
1·2층은 5칸, 3·4층은 3칸, 5층은 2칸이다.
이 건물에는 심주의 4면에 각 2폭씩 8폭의 팔상도가 있고
그 앞으로 4면에 열반상을 포함한 삼존불상을 각각 배치했으며 이어서 3열로 천불상을 봉안했다.
이 건물은 1968년 해체·조사된 바로는 각 층마다 구조가 다르고,
재목의 사용이나 공포구성법·체감률 등 건축법식면에서도 무질서하고 혼란해 부정적 평가를 받았지만
국내에 현존하는 유일한 5층목탑으로서 중요성이 인정되고 있다.
17세기에 건축된 목탑이지만 부분적으로 고대 목탑을 복원하는데 고찰할 수 있는 자료이며,
건축법에 있어서도 다양하고 이질적인 요소들을 조화롭게 통일시킨 건축미를 보여주는 것으로 재평가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절에서 언제부터 팔상전이라는 전각을 짓고 그 안에 불상과 불화를 봉안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동국여지승람〉에 1381년(우왕 7) 건립된 안영사 7층전탑의 내부 벽 동쪽에는
〈약사회도 藥師會圖〉, 남쪽에는 〈석가열반회도 釋迦涅槃會圖〉, 서쪽에는 〈미타극락회도 彌陀極樂會圖〉,
북쪽에는 〈금경신중회도 金經神衆會圖〉를 그려 봉안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로 보아 고려 말에 이미 불탑의 내부를 교화적 성격의 불화로 장엄했음을 알 수 있다.
대표적인 것은 쌍계사의 팔상전과 함께 법주사의 팔상전을 꼽는다.
범종각
@법주사 연혁
사적 제503호로 지정되어 있는 속리산 법주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의 본사이다.
553년(진흥왕 14)에 의신(義信) 조사가 창건했으며,
법주사라는 절 이름은 의신이 서역으로부터 불경을 나귀에 싣고 돌아와 이곳에 머물렀다는 설화에서 유래된 것이다.
776년(혜공왕 12)에 금산사를 창건한 진표(眞表)가 이 절을 중창했고
그의 제자 영심(永深) 등에 의해 미륵신앙의 중심도량이 되었다.
그 후 법주사는 왕실의 비호 아래 8차례의 중수를 거쳐 60여 개의 건물과 70여 개의 암자를 갖춘 대찰이 되었다.
고려 숙종이 1101년 그의 아우 대각국사를 위해 인왕경회(仁王經會)를 베풀었을 때
모인 승려의 수가 3만이었다고 하므로 당시 절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으며,
조선시대에 태조와 세조도 이곳에서 법회를 열었다고 전한다.
임진왜란으로 모든 전각이 소실된 것을 1624년(인조 2)에 벽암이 중창한 후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건물은 1624년에 중건된 대웅전, 1605년에 재건된 국내 유일의 5층 목탑인 팔상전,
1624년에 중창된 능인전(能仁殿)과 원통보전(圓通寶殿)이 있고
이밖에 일주문·금강문·천왕문·조사각·사리각, 선원(禪院)에 부속된 대향각·염화실·응향각이 있다.
또한 법주사의 중심법당이었으며 장육상(丈六像)을 안치했었다는 용화보전(龍華寶殿)은 그 터만 남아 있고,
이곳에 근대조각가인 김복진이 조성 도중 요절했다는 시멘트로 된 미륵불상이 1964년에 세워졌다.
(미륵대불 아래층에는 미륵보살을 본존으로 좌우에 보현보살 문수보살을 모셨다.)
1986년 이를 다시 헐고 1989년 초파일에 높이 33m의 청동미륵불상이 점안(點眼)되었다.
이밖에 국가지정문화재인 쌍사자석등(국보 제5호)·석련지(石蓮池:국보 제64호)·사천왕석등(보물 제15호)·
마애여래의상(보물 제216호)·신법천문도병풍(新法天文圖屛風:보물 제848호)·
괘불탱(보물 제1259호)과 지방지정문화재인 세존사리탑(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6호)·
희견보살상(喜見菩薩像: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38호)·석조(石槽: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70호)·
벽암대사비(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71호)·자정국존비(慈淨國尊碑: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79호)·
괘불(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19호)·철확(鐵鑊: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43호) 등이 있다.
@법주사 청동미륵대불
옛 법주사의 중심법당이었으며 장육상(丈六像)을 안치했었다는 용화보전(龍華寶殿)은 그 터만 남아 있었는데
이곳에 일제강점기 때 조각가 김복진에 의해 시멘트로 지금 같은 규모의 미륵대불 공사를 시작했지만
불행히도 작가의 요절로 마무리를 짓지 못하던 것을 1964년대에 이르러 완성을 보게 되었다.
하지만 시멘트 노후로 인한 안전상의 문제로 1986년 이를 허물고
1989년에 청동대불로 다시 건립하고 2002년에 금칠이 더해진 것이 지금의 미륵청동대불이다.
소요된 재원은 청동160톤, 주석16톤. 아연3톤이며 청동미륵대불의 높이는 33m다.
도금하는데 소요된 금의 량은 80kg이라고 한다.
<대웅보전>
@법주사 대웅보전은 무량사 극락전, 화엄사 각황전과 함께 우리나라 3대 불전 가운데 하나인 중층(重層) 전각이다.
얇은 기단 위에 서 있는 중층인 이 건물은 신라 진흥왕 14년(653년) 의신조사가 창건하고,
인조 2년(1624년)에 벽암대사가 중창한 것으로 총 120칸, 정면 7칸, 측면 4칸의 다포계 팔작지붕 건물로
건평 170평, 높이 약 20m에 이르는 대규모 건축물이다. 위층에 비하여 아래층의 높이가 훨씬 낮아서
탑파와 비슷한 비례를 보이며, 정면에는 모두 살문을 달았고
좌우 측면의 1칸과 뒷면 가운데 칸에는 따로 외짝문을 달았다.
.
내부에는 앉은키가 3.5m, 허리둘레 3.9m에 이르는 국내 소조불 좌상으로 가장 크다고 알려진 3신불이 안치되어 있다.
중앙에 봉안한 불상은 진실로 영원한 것을 밝힌다는 진여의 몸인 법신(法身) 비로자나불상이고,
좌측에 안치한 불상은 과거의 오랜 수행에 의한 과보로 나타날 보신(報身) 노사나불(아미타불)상이며,
우측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화신(化身)으로 나투신 석가모니불상이다.
대웅보전에 모셔진 부처님은 실내 안존불로서는 대한민국에서 제일 큰 불상이다.
1987년 3월 9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915호로 지정되었다
<대웅보전 후불탱화>
비로자나후불도: 세로 628㎝, 가로 353㎝, 아미타후불도(향우): 세로 621.5㎝, 가로 221㎝,
아미타후불도(향좌): 세로 620.5㎝, 가로 211.5㎝, 사천왕도(동방, 남방): 세로 581㎝, 가로 202㎝,
사천왕도(서방, 북방) 세로 581㎝, 가로 199.6㎝
비로자나불
석가모니불
노사나불
좌로부터 명부전 삼성각
진영각이다, 마당 앞에는 괘불석주가 2기 있다.
<희견보살상>
팔상전 옆 사방이 트인 전각 안에 모셔진 희견보살상(보물 제1417호)은 법주사에만 조성되어 있는 보살상이다.
구원겁토록 부처님께 향불을 공양할 것을 서원한 보살이 희견보살로 뜨거운 향로를 머리에 이고 있는 모습이다.
원통보전
원통보전은 초파일 준비를 미리 하는 것인지 법당 안이 온통 갖가지 물건으로 가득차 있어
참배하지는 못하고 입구에서 관을불만 살짝 담았다. 원통보전은 관음전, 원통전의 이명이다.
관음보살이 주원융통(周圓融通)하게 중생의 고뇌를 씻어주는 분이라는 뜻에서 원통전(圓通殿)이라하며
관음보살을 모신 전각이기에 관음전이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에서 보살을 모신 당우로 관음전이 많이 세워진 까닭은,
관음이 모든 환란을 구제하는 보살일 뿐 아니라 그의 서원이 철두철미하게 중생의 안락과 이익에 있고,
불가사의한 인연과 신력(神力)으로 중생을 돕기 때문이다.
법주사를 나와 세심정으로 향한다.
날이 맑았으면 멋진 반영이 나왔을텐데 빛이 없어 흐리다.
~2부에서 세심정에서 관음암이 포스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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