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음보살의 성지 보타낙가산기행 제 5부) 보타산 제일의 사찰 보제선사

2016. 9. 28. 22:15해외여행

(관음보살의 성지 보타낙가산기행 제 5) 보타산 제일의 사찰 보제선사(普濟禪寺)


(보타산에 머물었든 숙소 주변은 열대 야자수나무 숲으로 덮혀있었다.)


@관음보살의 성지 보타산에는 많은 사찰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보제사(普濟寺), 법우사(法雨寺), 혜제사(慧濟寺) 라는 3대 사찰이 보타산의 대표적 사찰로 꼽힌다.

3대사찰 중 제일 규모가 큰 사찰이 보제사(普濟寺).

보제사는 매령산 동쪽 영취봉의 자락 백화정(白華頂) 정상에 있다.

(매령산은 혜악스님이 일본으로 관음불을 모셔가려다 폭풍으로 인해 닻을 내린 불긍거관음이 있는 곳으로

이 매령산은 송나라 초에 보타산으로 개칭되었다.)

 


(보제사 초입)


북송 신종(재위기간:1078~1085) 원풍 3(1080)에 보제사의 전신인 오대원광사를 지었는데

이때부터 보타산이 관음보살의 도량이 되었다.

그 후 청나라 강희 38(1699)에 중건하고 사찰 명을 보제사(普濟寺)라 개칭했다.


(보타산관리국 앞 연못)


그 후 1731년에 보제선사(普濟禪師), 법우선사(法雨禪寺: 法雨寺)를 건축하였다.

청나라 건륭 연간(1735~1795)에는 보타산에 3개의 큰 사원과 88개의 암자, 148개의 기도원이 있었고,

보제사의 부지는 26.000에 승려와 비구니가 2,000여명에 달했다고 한다.

  보타산은 역대로 송 대의 명승 진갈 선사를 비롯하여

일산일녕국사, 죽선법사, 인광법사, 태허법사, 원조 법사 등의 유명한 명승을 배출하였다.



(연못에 유영하는 비단잉어들)

 

@인터넷에 회자하는 보제사의 연혁을 보면

 속칭 전사(前寺)라고 칭하며, 보타산에서 규모가 제일 큰 고찰로 10, 12, 7,

 4, 300여칸의 집으로 구성되어 있다. 보제사는 북송 원풍 3(1080)에 건립되어

보타관음사로 명명한 것을 청나라 강희 38(1699)에 중건하고 이름을 보제사라 했다. 라고 했는데

이 기록은 불긍거관음원의 옛 이름 관음원을 보제사의 전신으로 오기(誤記)한 것으로 보이며

보제사의 전신은 보타관음사가 아닌 오대원광사로 보는 것이 합당할 것으로 사료된다.



(보제선사 해인지와 팔각정)

보제사 입구에 들어서면 제일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해인지라는 연못이다.

()나라 때 조성된 보제사의 해인지(海印池)는 관세음보살이 방생하던 호수로서

 연꽃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연화지(蓮華池)로 불리며 또 방생지(放生池)로도 불린다.

연못 위에는 3개의 다리가 있는데 요지교(瑤池橋)라 불리며

산문과 어비정(御碑亭)을 연결하는 가운데 다리 위에는 팔각형의 정자가 세워져 있다.

어비정(御碑亭)은 황제가 내린 비로 이곳을 방문한 기록이 적혀있는 석비(石碑).

이번 방문은 해인지에는 연꽃이 피는 계절이 아니라서 연꽃은 보지 못하고

연잎 위에 묵념을 드리는 듯 삼매에 빠진 물새 한 마리가 이방인을 맞이하고 있었다.




  




  

해인지를 지나 조금 더 들어가면 돌로 된 패방(牌坊)과 조벽(照壁), 어비정(御碑亭)등의 건물들이 있다.

산문(山門)에 들어서면 천왕전(天王殿), 원통전(圓通殿), 장경루(藏經樓), 방장전(方丈殿) 등 이 있으며,

종루(鐘樓)와 고루(鼓樓) 등 별채들을 양쪽에 위치하고 있다.


팔각정과 어비정






보제선사(普濟禪師)의 이 전각은 바로 해인지 앞에 있다.

이 전각의 문은 늘 닫혀있다고 하며 참배객들에게 개방된 사찰은 이 보제선사 옆에 있다.

이 사찰이 보제사로 불린 모양이다. 보제선사라는 편액 좌우에는

유리세계(瑠璃世界), 전단향림(旃檀香林)이란 보조 편액이 붙어 있다.


보제사를 들어가면 정면에 향로가 있고 그 뒤에 대원통전이 보이고 오른쪽에 4층의 전각이 있다.

관음보살


보제사 관음전 앞에는 세워진 키 높은 향로. <보타명산 보제선사>라는 글이 보인다.

보제선사가 보제사인 것이다. 이 향로 때문에 보제선사와 보제사가 다른 사찰로 착오를 일어켰다.



(원통전)


@보제사 원통전

보제사의 본전은 관음보살을 본존으로 여기는 대원통전(大圓通殿)이다.

보타산이 관음보살의 성지이기 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보타산의 사찰은 모두가 원통전을 본전으로 조성되어 있다.

원통전은 맨 위에 대원통전(大圓通殿) 그 아래에 원통전(圓通殿),

좌우에 법계잠신(法界箴身)과 응신자제(應身慈濟)란 부 편액이 걸려 있다  


  

보제사의 중심 건물인 대원통전 안에는 8.8m 높이의 관음보살상을 봉안되어 있으며

양측에는 32존의 관음상이 봉안되어 있다.

관음전 동쪽에는 문수전, 서쪽에는 보현전이 있다.

원통전 뒤에는 장경루가 있고 양쪽에 보문전(普文殿)과 지장전(地藏殿)을 거느린다   


 

방 일곱칸 너비에 여섯칸 깊이의 웅장한 원통전은 두 겹으로 된 지붕에 황금색 오지기와를 얹었다.

원통전 앞마당에는 키 높은 향로가 세워져 있다.

중국의 대부분의 사찰에도 이런 유의 대형 향로들이 있지만 보타산의 사찰에는 유달리 많은 것이 특이 하다면 특이하다

보제사에는 1807년 주조된 무게가 3500kg의 동종이 있다.


보제사 천왕전은 대원통전 뒤쪽에 위치하고 있다.

금강전(金剛殿)으로도 불리우는 천왕전에는 거대한 사천왕이 봉안되어 있다.

보타산의 여느 천왕전과 비교하여 특이 한 것은 삼국지에 나오는 촉의 관우장군을 모시고 있다는 것이다.

사천왕의 지물(持物)과 형상은 보타산의 여느 사천왕과도 별반 차이가 없었다.


천왕전에 모셔져 있는 또 다른 이 상은 위태천은 아닌 것같고

아마도 삼국지에서 나오는 조자룡이 아닌가 추측해 본다.






다른 곳에 보제사가 있는 줄 알고 해인지 족으로 다시 나왔다.

사진에 보이는 저 건물들이 보제사 인줄 알았는데 앞서 본 보제선사가 보제사였다.

나중에 알아보니 위의 사진속 좌측 건물은 주점이고

가운데 두 건물은 박물관이며 탑은 박물관 안에 있는 다보탑이었다. 







@보제선사 패방(석패방)

보제사의 찾아가는 첫날은 머물던 숙소에서 들렸기 때문에 이 패방까지는 가질 못했다.

보제사를 나와 다시 해인지를 지나게 되었는데 숲을 지나니 연못 끝자락에 보제사의 패루가 보였다.

패방(牌坊)은 패루(牌樓) 또는 석패방이라고도 불린다. 기둥 네 개에 문 세 개를 가진 이 패방에는

구름을 비롯한 무늬들이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다. 이 패방의 왼쪽 길은 해인지 연못을 따라 보제선사로 연결되고,

오른쪽은 얕은 언덕을 넘어 보타산불교 박물관과 버스정거장으로 통한다.

보타산불교박물관은 보제사의 관할로 보이며 박물관 앞에는 거대한 다보탑이 서 있다.

박물관의 문이 닫혀있어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하고 담넘어 다보탑 사진만 담았다. 

다보탑은 보제선사 안에 있는 것이 아니고 보타산불교박물관 안에 있다.

이 박물관은 아마도 보제사가 관할하고 있는 것으로 사료된다.




@보제선사 비루(碑樓) 현판: 해월상휘(海月相輝)

패방(牌坊) 앞에 이중으로 황금색 기와가 얹힌 2층으로 지어진 정자가 하나 있다. 어비정(御碑亭)이다.

비석을 안에 두고 있어 비루(碑樓)라고도 불리며 해월상휘(海月相輝)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바다 위의 달, 하늘의 달이 서로 밝게 비춘다는 의미다. 어비정의 문은 특별한 날을 제외하고는 늘 닫혀 있다.

그 비석에는 패루 앞에서는 문관은 가마에서 내리고, 무관은 말에서 내려오라는 경구가 쓰여 있다고 한다.

이는 황제의 어명으로써 과거 관료들이 이곳에 이르면 문관은 가마에서 내리고

무관은 말에서 내려 관음보살에 대한 존경을 표하라는 의미다.  


  

보제사의 산문은 동쪽에 종루, 서쪽에 고루를 거느린다. 아침에는 종을 울리고 저녁에는 북을 울려

스님을 부르는 것이 절의 관행이다. 보제사의 종은 1807년에 주조한 것으로써 무게가 3,500kg에 달한다.

연꽃이 만발한 해인지 연못 위에 하늘의 달과 연못의 달이 함께 어울려 빛나고

거기다 석양에 은은한 사찰의 종소리, 북소리가 울려 퍼지는 그 광경을 상상해 볼 때 엄숙함과 경탄이 절로 솟아오른다.


  

  

@이번 보타산기행에서 특이하게 느낀 것은 보타산의 사찰명칭이 00禪寺00가 혼용되어 있어 착오를 일어켰다.

해인지가 있는 곳이 보제사인 줄 알고 보제사를 찾았지만 보제선사 사찰 안은 어디에도 보제사라는 편액은 보이지 않고

보제선사로 되어 있어 다른 곳에 보제사가 있는 줄 알았다.

그러나 다음 날 혜제사를 가기 위해 패방이 있는 쪽으로 가니 그곳 한 귀퉁이에 보제사라는 표지석을 발견했다.

보제선사가 바로 보제사인 것이다. 패방과 보제선사는 위치도 다르고 상당한 거리로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착오였다는 생각을 가지지 못한 것이다. 행여 다보탑이 있는 곳에 거대한 전각이 보여 보제사인가 하여 갔더니

편액은 없고 출입문은 닫혀있었다. 나중에 알아보니 그 전각은 보제사가 아니라

주점(酒店: 호텔을 중국인들은 주점이라 부른다)이었다.

주점도 일반 우리가 보는 그런 호텔건물이 아니라 불교성지라서 그런지

사찰의 전각형태로 지어져 있었기 때문에 혼동하기 십상이었다. 다음에 포스팅 할 법우사도 마찬가지였다.

입구 패방에 <해천불교>라는 것 외는 어디에도 법우사라는 편액은 보이지 않고

모두가 법우선사라는 표시뿐이였다. 돌아 나오는 길 연못 한쪽에 법우사라는 표지석을 발견했다.

  


  

보제선사가 보제사 이며, 법우선사가 법우사 인 것이다.

가이드 없이 나홀로 찾아가는 순례라 보제사와 법우사라는 편액을 단 사찰을 찾지 못해

보제선사와 법우선사를 보제사와 법우사가 아닌 다른 사찰로 생각하고 건성으로 돌아보았다는 것이다.

중국인들은 글자 하나하나에 깊은 의미를 부여하는 나라라 이에 대한 나의 선입감 때문에

두 사찰이 다른 사찰인줄 생각했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무더운 날씨에 오전에는 낙가산를,

오후에는 불긍거와 남해관음을 돌아보고 온 뒤라 몸도 마음도 지쳐있어 깊히 생각해 볼 여유도 없었지만

무엇보다 사전 조사를 제대로 하지 못한 나의 무지함에 회오(悔悟)를 느낀 것이 바로 이번 보타산 기행이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