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음보살의 성지 보타낙가산기행 제6부) 보타산 제2의 사찰 법우선사

2016. 10. 1. 18:52해외여행




(관음보살의 성지 보타낙가산기행 제6) 보타산 제2의 사찰 법우선사(法雨禪寺)


보제선사(보제사) 다음 코스로 찾은 곳은 법우선사다.

입구에 보면 <해천불교>라는 패루(패방)가 서 있을 뿐 그 어떤 명칭도 찾을 수 없어 처음에는 어떤 사찰인지를 몰랐다.

사찰을 둘러보면서 이곳이 법우선사라는 것은 알았지만 법우선사가 법우사인 줄은 몰랐다.

사찰을 나오면서 우연히 연못가 한쪽 구석에

<법우사>라는 표지석을 발견하였기에 나중에야 법우선사가 법우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보타산 관음성지를 해천불교라고 불리게 된 사연은 불긍거관음이 있는 조음동에서 비롯된다.

후량(后梁907~960)) 916년 일본승 혜악이 보타산에 도래하여 관음원을 세우기 이전에

() 대중(大中) 원년(847)년 천축(인도)에서 건너 온 한 스님이 관세음보살을 친견하겠다는 원력을 세우고

조음동에 들어와 3일 동안 정진했지만 관세음보살을 볼 수 없었다.

그래서 심심이 지극하지 못한 것이라 생각하고 마침내 <연지공양(燃指供養)>을 올린다.

연지공양은 손가락을 태우는 공양이다.

연지공양을 올리는 순간, 인도 스님은 관세음보살을 친견하게 되었고

또한 관음보살의 현령설법(顯靈說法)을 듣게 되었는데 나중에 보니 손에는 칠색보석을 쥐어져 있었다고 한다.

바다위의 섬에서 관음보살을 친견했다는 의미로서

그 후로 보타산을 해천불교(海天佛敎)라는 또 다른 호칭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입구에 있는 2개의 탑중 좌측탑이다.)


법우선사는 보타산에서 보제선사 다음으로 큰 사찰로 보타산 제2의 사찰로 불린다.

보타산 백화정의 왼쪽 금병산 광희봉 밑 해변가에 위치하고 있으며,

부지 33,408, 남북 174, 동서폭192, 건축면적 8,800이다.

산문 내에는 천왕전, 옥불전, 구룡 관음전, 어비전, 대웅보전, 방장전,

인광 법사 기념당 등 6개 사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법우사 향로)

 

법우사의 창건연대를 보면 명나라 때 1580년 진융스님이 주변의 경관이

수려하여 이곳에 암자를 짓고 <법해관음>의 뜻을 따서 <해조암>이라고 했는데

그 후 청나라 때 1699년에 확장공사를 하면서

천화법우(天花法雨)라는 현판을 걸면서 법우사(法雨寺)로 개명했다.

지금의 전각들은 1731년에 보제사가 증축할 때 함께 증축된 것이라고 한다.


(우측에 있는 탑)


천왕전 앞 조벽에는 법우선사라 표시되어 있다.




천왕전 정면에는 포대화상이 봉안되어 있다.


천왕전에 모셔진 사천왕, 좌는 서방을 지키는 광목천왕, 우는 남방을 지키는 증장천왕


위태천, 천왕문이있고 사천왕상이 모셔져 있는 곳에는 반드시 위태천을 모시고 있다.


좌는 동방을 지키는 지국천왕, 우는 북방을 지키는 다문천왕


옥불전

옥불전에는 원래 1882년 청나라때 보타산의 스님이 인도를 방문했다가 돌아오는 길에

미얀마에서 가져온 옥불이 공양되었는데 후에 어디론가 사라지고

지금은 1985년 베이징에서 가져온 옥불이 공양되어 있다고 하는데

이미 땅거미가 지는 시간대였고, 전각의 문도 닫혀있어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대웅보전


석가모니불


@관음전

이 관음전 전각은 1699년 법우사를 확장할때 명나라 옛수도인 남경(南京) 황궁의 구룡전(九龍殿)을 본떠서 지었다고 한다.

법우사에서 급별이 가장 높은 관음전은 건물높이가 22m이고 두 겹으로 된 지붕에는 노란 오지기와를 얹었다.

사찰입구 쪽에는 따로 연못과 구룡벽이 조성되어 있다.


관음불






향로 뒤에는 연못이 조성되어 있고 조벽은 구룡벽이다.


@구룡벽

중국에는 3대 구룡벽(九龍壁)이 있는데 하나는 북경 자금성에 있는 구룡벽, 둘은 북경 북해공원의 구룡벽이고

셋은 산서성 대동에 있는 구룡벽이다.

원래 이 구룡벽이라는 것은 명나라 때 황족의 집을 밖에서 엿보지 못하도록 만들어 놓은 벽이였지만

또 다른 의미로 구룡벽(九龍壁)에 용문양을 새긴 것과

"9'라는 숫자는 강력한 권력을 지닌 황제를 상징한 것이라고 한다.

 

법우사의 이 구룡벽은 대동의 구룡벽과 여러 가지 면에서 많이 닯아 있다.

대동 구룡벽은 명태조 주원장의 13번째 아들인 주대계의 저택 정문의 일부였으나 화재로 인하여 손실이 되고

구룡벽만이 남아 있었는데 주대계는 황제에게 요청을 하여

이 구룡벽을 만들게 되었는데 인부들이 만드는 과정에서 그래도 황제의 것과 동일하게 만들 수가 없기 때문에

중장에 새겨진 용은 정면을 바라보지 못하고 약간 옆면을 바라보도록 만들어 졌고

기존의 구룡벽과는 다르게 구룡벽의 아래로 연못을 만들어 

물에 비친 구룡벽의 용들이 마치 살아서 움직이는 모습을 보이도록 했다고 한다.

다른 구룡벽과 달리 법우사 구룡벽 앞에 조성한 연못도 이런 의미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사료해 본다.




법우사는 입구와 출구가 동일하다.


이 표지석은 입구 패방을 지나 법우선사 산문을 들어가기전 연못이 있는 한쪽 귀퉁에 서 있었다.

법우선사가 곧 법우사임을 말해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