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음보살의 성지 보타낙가산기행 제3부) 불긍거관음원

2016. 9. 20. 22:57해외여행

(관음보살의 성지 보타낙가산기행 제3) 불긍거관음원


정말 무더운 날씨였다. 등줄기의 땀이 바지를 적실 정도였으니 뙈약볕 보행은 거의 애기 걸음마 수준이다.

탈진을 막기 위해 연신 물을 들이키면서 자죽림경구의 불긍거관음원 입구에 다달았다.

불긍거관음원 입주문의 현판을 보니 <불긍거관음원(不肯去觀音院)> <보달자죽림원(補怛紫竹林院) 으로 되어 있다.

 보달자죽림원의 보달(補怛)은 범어 potalaka의 음사(音寫)로 보타낙가산, 줄여서 보타산을 의미한다.

  


  

@불긍거관음원은 자죽림경구(紫竹林景區)에 속하고, 자죽림경구는 보타산관광구 중에 하나에 속해 있다.

보타산 남쪽에 위치해 있으며 자죽림관광구의 주요 명소로는 불긍거관음원(不肯去觀音院)과 더불어

조음동(潮音洞), 관음도(觀音跳), 남해관음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조음동(潮音洞)과 범음동(梵音洞)을 통털어 양동조성(兩洞潮聲)이라 부르며,

보타산 12경중 하나에 속한다. 전체관광코스는 2km로 약 2시간이 소요된다.

  


  

<연혁>

@보타산에 불교가 처음 들어온 것은 당나라 초기로,

일본 스님 혜악이 보타산에 처음으로 관세음보살상을 모신 것에서 비롯된다.

(중국 서안지도출판사의 보타산 안내도에 나온 설명에 따르면

후량(后梁907~960)) 916년에 일본승 혜악이 세운 관음원에서 비롯된 것으로 되어 있다.)




()나라 함통 3(862)년 일본인 혜악스님이 오대산에서 수행 중에 관세음보살을 친견하고

그 불상을 받아 일본으로 모셔가던 중 영파를 떠난 배가 매령산에 도착했을 때

태풍이 불고 폭우가 쏟아져 하는 수 없이 매령산 조음동에서 내렸다.

그때 우연히 장씨라는 부인을 만났는데 그 사연을 들은 후 자신의 쌍봉산 기슭의 자택 별실을 내어 주어

관세음보살을 모셨다고 한다. 혜악은 관세음보살이 일본으로 가기 싫어한다고 생각되어,

매령산에 관음원을 짓고 그때부터 불교를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지금 보타산 자죽림경구에 세워진 불긍거관음(不肯去觀音)은 그 때의 의미를 살려서

관음보살이 떠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不肯去)는 의미로 명명된 것이다.




<혜악(慧鍔)선사>에 대해서는 불광대사전에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혜악(慧萼)이라고도 한다. 일본인으로 귤태후(橘太后)의 명을 받들어 당()나라에 들어가서 오대산에 올랐고,

항주(杭州) 염관(鹽官) 영지사(靈池寺)를 찾아가서 제안(齊安)을 뵈옵고,

수제자인 의공(義空)을 청하여 일본에 돌아오니 이때부터 일본의 임제종(臨濟宗)이 시작되었다.

그 뒤에 다시 오대산에 올라 관음성상(觀音聖像)을 산마루에서 얻고

그 관음상을 받들어 일본으로 돌아오려고 영파(寧波)를 지나다가 대사(大士)

기이한 상서(祥瑞)를 보고 즉시 항해를 중지하고 그 자리에다 절을 세우고 관음상을 봉안하였다.

그리고 절 이름을 <보타낙가산사(補陀洛迦山寺)라 하니 이 절이 남해선찰의 명() 가람이 되었다.

후세에 사()로서 그 절의 개조(開祖)로 삼았다.(자료출처: 佛祖通載. 佛祖通記 )

  

위의 이 두가지 사실을 종합해 보면 혜악스님은 중국에 두 번 왕림했으며,

첫 번째는 당()나라 함통 3(862)년에 처음 입국하여 오대산에 수행을 하고 일본으로 돌아갔고,

후량(后梁907~960)) 916년에 재입국하여 오대산에서 관음을 친견하고

()한 관음불상을 일본으로 옮겨가지 못하고 보타산에 들어와 관음원을 세운 것이 된다.


불긍거관음원의 사천왕. 좌는남방을 지키는 증장천왕 우는 서방을 지키는 광목천왕




위태천

보타산의 사찰을 보면 석가모니불을 모시지 않는 사찰이 있어도 위태천을 모시고 않은 사찰은 없다.

위태천은 중국에서 남송대(南宋代) 이후 사경을 수호하는 천신으로 나오고,

, 명대(元明代)에는 천왕전에 반드시 모시고 있다.

(위태천에 관해서는 본방 항저우의 고찰 영은사 참조)


보달자죽림원의 대웅전격인 원통보전




원통보전의 좌우에 불광보조(佛光普照), 비운동체(悲運同體)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원통보전에 봉안된 백옥관음. 자광보조(慈光普照), 자운보복(慈雲普覆), 제세자항(濟世慈航)이란 편액이 걸려있다.


<불긍거관음선원의 백옥관음에 얽힌 이야기>

@2000년 효탄 스님이 공개한 관음원기 오홍 조맹부서에 따르면

대각국사 의천 스님이 1090년 전란으로 폐허가 된 보타·낙가산 관음원을 다시 일으켜 세운 사실이 기록이 되어 있다.

이는 중국 4대 명필가로 꼽히는 조맹부가 374자의 송설체로 기록한 글이다. 그 내용은 이렇다.


보타·낙가산이 있는 명주에서 전란이 일어나 관음원의 백의관음이 훼손될 위기에 처하자

대중 스님들은 백의관음을 숨기고 떠났다. 후에 관음원을 다시 찾은 스님들이 관음상을 찾았으나 허사로 끝났다.

그런데 의천 스님이 관음원 내 통지전 우물을 지나며 이상한 소리를 듣고서 백의관음을 찾았고,

보타낙가산의 대표 관음도량으로 발전시켰다.

고려조에서도 관음원에 새로운 전각을 시주하는 등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이같은 기록은 관음원 창건부흥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 부분이어서 향후 연구가 주목된다.

혜악 스님이 관음상만 어부에게 맡기고 귀국했다는 설이 일본학계의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펌글)


백옥관음은 현재 불긍거관음원이 아닌 보타자죽림원의 원통보전에 모셔져 있다.

그 앞에 자리한 불긍거관음원에는 금색목불상이 모셔져 있다.

이 백옥관음상은 왼손에 감로수병을 들고 있고 오른 손에는 연화가 아닌 버들가지를 들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관음의 또 다른 불상을 모신

불긍거관음원의 건축양식을 보면 이는 중국풍이 아니라 일본식 건물이다.

그 이유는 일본의 37개 사찰이 시주를 모아 불긍거관음원 확대해 지금의 관음원으로 새롭게 건축할 때

일본식으로 꾸몄기 때문이다. 또힌 불긍거관음은 뒤에는 조성된 37개 관음불상도

일본의 37개 사찰에서 시주하여 조성한 것이라고 한다.









북방을 지키는 다문천왕과 동방을 지키는 지국천왕



정자가 있는 바닷가로 내려가는 길에 있는 대형향로/ 보달자죽선림이란 글이 향로에 겨져 있다.




혜약스님이 폭풍을 만나 떠나지 못하고 배를 정박했다고 하는 그곳에 세운 정자라고 한다.






불긍거관음원. 참배객이 너무 많아 조음동을 먼저 둘러 보왔다.


조음동(潮音洞)  

@조음동(潮音洞)은 우리나라 낙산사 홍련암과 같이 관세보살을 친견할 수 있다고 전해지는 바닷가 절벽의 동굴이다.

벼랑벽의 높이가 약 50m, 너비는 3~5m 정도이며 동굴 속으로 파도가 밀려와

절벽에 부딪쳐 법어가 들린다고 한다.

이 암벽에 새겨져 있는 <조음동(潮音洞)>이란 글씨는

청나라 강희황제가 1699년에 친필로 쓴 것이라고 한다.

조음동의 조음(潮音)은 경전에서 말하는 해조음(海潮音)과 같은 의미다.



해조음(海潮音)은 바다의 소리란 의미인데 이는 부처님의 음성을 큰 바다의 소리에 비유한 것이다.

불광대사전에 의하면 해조(海潮)는 생각이 없으나 그 때를 어기지 않음과 같이 부처님의 대비(大悲)하신 음성이

그 때에 따르고 근기에 맞추어 설법하는 하심을 말하는 것이다.라고 했고,

또 법화경 보문품(普門品)에는 부처님의 음성은 해조음과 같다고 하였다.


능엄경(楞嚴經)2에도 부처님이 자비심을 일으켜 아난과 모든 대중을 가엾게 여겨 해조음(海潮音)을 발하시어

같이 모인 모든 선남자에게 두루 일러 말씀하시었다라고 하였다.

장수(長水)의 의소(義疏)천고(天鼓)는 아무 생각이 없으나 사람을 따라서 소리를 내고,

해조(海潮)는 무념(無念)하나 그 때를 잃지 않는다.

이는 무연자비(無緣慈悲)를 나타내어 그 근기(根機)에 따라 설하신 것이요,

()을 기다린 뒤에 설()하신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그럼으로 바다에 연하여 바라보고 있는 관음보살을 해조관음이라고 불리는 것은

이런 연유에 기인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조음동에 얽힌 일화도 많다.

@후량(后梁907~960)) 916년 일본승 혜악이 보타산에 도래하여 관음원을 세우기 이전에도

() 대중(大中) 원년(847)년 천축(인도)에서 건너 온 한 스님이 관세음보살을 친견하겠다는 원력을 세우고

조음동에 이르러 조음동에서 3일 동안 정진했지만 관세음보살을 볼 수 없었다.

그래서 심심이 지극하지 못한 것이라 생각하고 마침내 <연지공양(燃指供養)>을 올린다.

연지공양은 손가락을 태우는 공양이다. 연지공양을 올리는 순간, 인도 스님은 관세음보살을 친견하였다고 한다.



연지공양으로 인도 스님이 관음보살을 친견했다는 소문이 보타·낙가산을 중심으로 중국 전역에 퍼져갔다.

거기다 관음원을 세운 혜악스님의 관음보살 친견 이야기까지 전해지면서 <조음동에 가면 관세음보살을 친견할 수 있다>

믿는 사람들이 조음동에 몰려들어와 연지공양을 하는가 하면

조음동에서 죽으면 관세음보살이 극락으로 이끌 것이라 믿고 자신의 몸을 바다에 던지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이런 극한 사태까지 이르자 청나라 장군이었던 진구사(陣九思)와 지방관리사 이분(二分)

불긍거관음원 앞마당에 이를 막기 위해 <금지사신연지(禁止捨身燃指)> 비석문을 세우기에 이른 것이라고 한다.

이는 연지공양과 바다에 투신한 것을 금한다는 경구를 새겨 놓은 금표(禁標)이다.

  


  

보타낙가산에서 관음보살을 친견할 수 있다고 소문난 도량은 불긍거관음원 외에 또 하나 있다.

바로 범음고동(梵音古洞)이다. 범음고등의 절벽에는 명나라 때 창건되었다고 하는 2층 누각이 세워져 있다.










불긍거관음원에 봉안된 관음불


관음불을 협시한 동자


관음불 앞에 또 작은 관음상을 모셨다.






대사교


불긍거관음원 뒤편에는 일본 37개 사찰에서 시주한 37개의 이런 석상들이 유리관 속에 진열되어 있다.



십일면관음불.







~4부 남해관음으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