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0여년의 역사를 지닌 서호불교의 효시 항저우의 고찰 영은사(靈隱寺)(2/2)

2016. 9. 4. 01:47해외여행

1700여년의 역사를 지닌 서호불교의 효시 항저우의 고찰  영은사(靈隱寺)(2/2)


@영은사는 서호문화경관중 대표적인 불교문화유적지의 하나로 항주지역에서 처음으로 지은 건축물들이며

중국 동남불교시대에 현저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븍고봉 남쪽 기슭에 자리한 영은사는 동진 항화원년(326)에 건축이 시작하였고,

인도의 스님 혜리(慧理)가 창시인으로 전해지고 있다.

남송(1127~1279)시기 선종 <동남제일산>으로 봉하여 정자사와 함께

나라의 최고급 선종사원으로 <오산십찰>에 속하였다.

절은 여러 차레 훼손과 재건을 거쳤고, 현재의 사원의 규모는 청말에 재건한 기반위에

20세기 50년대 이래 여러 차례 보수를 거쳐 형성된 것이다.

절은 북쪽에 위치하고 남향으로 되어 있고 사원의 주측은 남에서 북으로 순서에 따라

천왕전, 대웅보전, 약사전, 법당(장경루), 화엄전이고,

동서 양측에는 종루, 고루, 가람전, 나한전 등이 있다.

사원 내에는 현재 10세기에 쌓은 석탑과 경당이 각각 2개가 보존되어 있는데

오대의 불교건물 걸작이라고 할 수 있다.

영은사는 지금까지도 중국 동남연해지방의 가장 중요한 불교활동 장소의 하나이다.

(위 내용은 영은사 안내 한글판에서 인용했다.)


영은사 사찰입구다. 영은사는 일주문에서 매표하고 전각을 보려면 이곳에서 또 표를 사야 들어갈 수 있다.


사천왕을 모신 전각 천왕전이다.

현판은 천왕전이란 대신 <최승각장><위진삼주>라고 쓰여져 있는 편액이 걸려있다. 


들어 가면서 입구 왼쪽이 된다. 천왕전(天王殿)에는 강희제의 친필 "云林禪寺(운림선사)"라고 쓰여진 편액이 있다는 데

이를 보지 못했다. 운림선사는 강희가 남쪽 지방을 순찰하던 중 항주에 들러서 북고봉(北高峰)에 올랐는데,

구름이 자욱하고 안개가 덮인 곳 속에 영은사가 있는 것을 보고 쓴 것이라고 한다.

@천왕전 안에는 송나라 때 최초로 만들어진 위태천보살상이 있고 안쪽 좌우에 사천왕이 모셔져 있다.

 우리나라 사찰의 사천왕은 대재 사찰 입구 중앙의 정면에 세우는 데 영은사는 측면에 모셔져 있다.

우리나라의 사천왕과 비교하면 엄청난 크기다. 지물(持物)은 같지만 쓰고 있는 보관(寶冠)은 다르다.


북방을 수호하는 비파를 든 다문천왕




동방을 수호하는 칼을 든 지국천왕


양쪽편에 사천왕을 모시고 중앙에 닫집을 세워 봉안된 부처상.

봉안된 부처의 형상을 보면 석가모니불은 아닌 것같고 포대미륵화상인 것 같다.

중국인들은 포대화상을 미륵불의 화신으로 여기고 있다고 한다.




닫집의 형상도 우리나라 사찰의 닫집과는 많이 다르다.


남방을 수호하는 용과 여의주를 든 증장천왕


서방을 수호하는 창을 든 광목천왕


독특한 닫집에 모셔진 위태천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신중탱에 흔히 등장하는 수호신장이지만 따로 전각을 지어 숭배하는 사찰은 없지만

중국에서 위대한 수호천신으로 숭배되어 받들어 지고 있다.

위태천은 중국에서 남송대(南宋代) 이후 사경을 수호하는 천신으로 나오고,

 , 명대(元明代)에는 천왕전에 반드시 모셔졌다. 영은사도 그런 연유에서 모신 모양이다.

형상은 새깃털장식이 있는 투구를 쓰고 갑옷을 입고 있으며,

합장한 팔위에 보봉(寶奉)이나 칼 혹은 금강저를 가로질러 놓는 모습으로 중국에 들어와서 한화(漢化)된 형상이다.


부연하면:

@동진보안대보살로 알려진 위태천신은 신중(神衆) 가운데 불법을 수호하는 대표적인 신장(神將)으로

유리광불이 출현하셨을 때 도를 이루어 보안보살이라 하였으며

그 후 석가여래회상에서 도를 이루어 동진보살이라 불렀다.

팔만 사천 근이나 되는 금강보저를 손에 들고 불불(佛佛)이 출세토록 불법을 보호하겠다고 서원하셨고,

우리나라 사찰의 신중탱화에서도 예적명왕과 함께 중요인물로 등장하신다.

 

 @위태천은 104위 신중 또는 팔만사천 신중들이 불법을 듣고 발심하여 믿는 이들을 보호하고

도량을 수호하시는 옹호성중이시다. 범어로 Karttikeya이며,

인도 서사시의 시기(기원전 600?서기 200)에 성립한 천신(天神)으로,

가네샤와 함께 시바(혹은 아그니)의 아들이라고 한다.

2대 서사시인 마하바라타》 《라마야나이후 지위가 올라,

신군(神軍)을 지휘하여 마군(魔軍)을 퇴치하는 군신(軍神)으로 제석의 지위를 능가하게 되었다.

 

@북인도에서 스칸다Skanda, 쿠마라Kumara라고 부르며, 남인도에서는 서브라마야Subramaya라고도 불린다.

한역하면 <塞建陀(색건타)> 혹은 <違陀(위타)>이며, <위태천(韋駄天)>

<위장군(韋將軍)> <위태보살(韋駄菩薩)>이라고 부르며,

조선시대에는 <동진보살(童眞菩薩)>이라는 명칭으로도 불렸다.

인도의 힌두신화에서 육면십이비(六面十二臂)로 표현되고 창이나 그 밖의 무기를 쥐고 공작새를 타고 다닌다.




오백나한전

나한전은 거대한 십자형 건물에 오백 명이나 되는 거대한 나한상을 옥외가 아닌 전각 안에 모셔져 있는 것이 경이롭다.

오백나한(五百羅漢)을 모신 영은사의 이 나한전은 최근에 지어졌다고 한다.

특이한 것은 오백나한전 안에 중국불교의 4대 성지라 일컬어지는 보현보살의 성지 아미산,

문수보살의 성지 오대산, 지장보살의 성지 구화산, 관음보살의 성지 보타산을 상징하는 4곳의 불교성지가

()으로 조성된 전각이다. 전각 주위에는 500나한의 조각상들이 봉안되어 있다.

 

그 중에서 우리의 눈길을 끈 불상은 신라의 김교각 스님인 지장보살이다.

원래 김교각 스님은 통일신라 성덕왕의 장남으로 태어나 왕위를 버리고

중국 안휘성(安徽省) 구화산(九華山)으로 들어와 수도를 했다고 한다.

서기 719년 그의 나이 24세였다. 99세까지 살아 그가 죽은 후에도 3년 동안 시신이 썩지 않아서

등신불(等身佛)로 만들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사찰 명부전에 지장보살과 함께모셔지기도 하는 김교각 스님은

중국에서는 매년 음력 730일은 스님 탄생일에 제를 올리는 행사를 거행하고 있다고 한다.



@이들 나한상과 영은사의 전각의 본존불 외의 불상들을 자세히 보면

우리나라 사찰에서 보는 나한상과 부처상과는 다른 도교풍이거나 서역인의 풍모를 지니고 있는 것이 많다.

이는 아마도 다음과 같은 2가지 측면에서 고려해 볼 때 이에 비롯된 것이 아닌가 사료된다.

  


  

첫째는 중국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서력기원 전후였으며,

처음 전해진 불교는 인도 불교가 아닌 서역 불교였기 때문이다.

후한(後漢: 25~220) 말인 2세기 후반에는 서역과 인도에서 온 역경승들에 의해

불경이 한역되기 시작하면서 불교는 중국에서 확실한 기초를 형성하게 되었다.

  


  

@둘은 불교의 중국 전래 초기에 포함되는 위진시대(魏晋時代: 220-420)에는

한역된 불교 경전에 기술되어 있는 사상이나 교리를 노장사상이나

유교사상 등의 전통 중국 사상의 개념을 적용하여 비교하고 유추함으로써 이해하려고 하는

격의불교(格義佛敎)가 성행했기 때문에 이에 비롯된 것이 아닌가 사료된다.

  


  

격의불교는 한편으로는 중국에서 불교의 사상과 교리가 받아들여지고 이해될 수 있게 하여

불교가 토착화되게 하는 순기능을 하였으며

한편으로는 불교에 대한 참다운 이해에 도달하지 못하게 하는 역기능도 하였다.

격의불교의 역기능은 구마라습(鳩摩羅什: 344-413)

불교 경전을 본래의 뜻에 맞게 바르게 번역한 이후로 비로소 극복되었다.



각 통로의 교차점인 중앙에 4방으로 된 4개의 형태의 동전이 조성된 것이 영은사 나한전의 특색이다.




금색계, 사자를 타고 있는 오대산 문수보살










구화산, 유명계, 지장보살




보타산, 유리계 관음보살




오대산, 금색계, 문수보살





아미산, 은색계, 보현보살


나한전 전각 옆 공간에 옆에 조성된 기암. 변화는 좋지만 오석이 아니라서..







약사전이다. 좌우에 불광보조, 이익안락이란 편액이 또 붙어 있다.




보합을 든 약사여래


약사전의 수호신장들











약사전에 비치된 종, 우리나라 종의 형상과는 많이 다르다.






별도 전각에 모신 제공스님의 조상


@사찰 안내서에 의하면 제공(濟公)은 도제(道濟)선사를 일컫는다.

남송(南宋) 순희(淳熙)3(1176)에 영은사로 출가했다.

평생을 희소노가(嬉笑怒駕) 유희신통(遊戲神通)으로 사신 분이다.


영은사는 비래봉으로도 유명하다. 비래봉은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봉우리로

높이가 209m, 둘레 800m 정도의 바위 봉우리다.

이 비래봉에는 제공스님에 대한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전설의 내용은 간략히 설하면.

 

제공스님은 출가 스님인데도 계율을 잘 지키지 않고 자유분방했다.

술과 고기를 너무 좋아했다. 그리고 복장 또한 낡은 모자를 쓰고 찢어진 부채를 들고

마을에 나타나 어슬렁거리면서 마을 사람들에게 술과 고기를 자주 얻어먹었다.

그러나 이러한 스님이지만 신통력이 뛰어났다.

마을에 일어난 문제들을 해결해 주고, 나쁜 사람은 혼내주고, 어려운 사람은 도와주었다.

그렇지만 마을 사람들은 그를 신뢰 하지는 않았다.

하루는 스님이 인도에서 큰 산이 날아 올 것을 알아차리고 동네 사람들에게 이곳에서 피신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산이 날아 온다' 라는 어이없는 말을 믿지 않았다.

그냥 두면 마을 사람들이 다 죽게 되어 스님은 꾀를 내었다.

마침 그때 마을에 결혼식이 한창이었다. 이때 스님은 결혼식의 신부를 납치하여 달리기 시작했다.

이것을 본 동네사람 모두가 스님을 잡기 위하여 달려가는데,

달리는 뒤로 거대한 바위가 떨어졌다. 따라서 마을 사람들 모두가 무사할 수 있었다.

이때 떨어진 바위가 비래봉이라고 한다.

그 이후 스님은 마을 사람들에게 신과 같은 존재로 추앙받게 되었다.

지금도 비래봉에는 제공스님의 여러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고 한다.”


유희신통


가람전




대웅보전 앞 마당에는 붉은 리본같은 것이 매달려 잇다. 마치 우리나라 등처럼.



@대웅보전(大雄寶殿)은 높이 33.6미터로 중국의 유명한 건축물중 하나에 속한다.

대웅전 내에 황금색으로 만들어진 석가모니좌상이 있다. 이 불상의 높이는 자그마치 24.8m나 된다.

이는 세계 최대의 여래불상이라고 한다.

여래불상은 1956년에 절강미술대학 교수와 예술인들이 합작해 만든 작품이라고 한다.

이 불상의 소재는 향나무 24 개를 따로 조각하여 붙였다고 한다.

불상을 도금하는 데만 순금이 자그마치 44kg이나 들어갔다고 한다.

대전 양 옆에는 20존자천불상이 나열되어 있다.

중국의 불상참배 형식은 우리와 많이 다르다.

우리나라는 어느 법당이나 신발을 벗고 측면난 문으로 들어가 참배하지만

중국은 신을 신은 채로 법당 문 중앙으로 들어가 향으로 공양한다.










대웅보전의 여래와 신장들






대웅보전의 본존불 뒤에는 감로로을 조각한 거대한 관음탱화가 조각되어 있다.



















@ <영은사량석탑(靈隱寺兩石塔>이라 명명된 두 개의 석탑이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좌우에 세워져 있다.

탑신이 일부 파손된 채로 그 앞에 서 있는 이 두 개의 석탑은 송나라 때에 건축된 89층 석탑이다.

탑신의 일부가 파괴된 것은 마모된 것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파괴하려 했던 흔적으로 보인다.

이 석탑만은 거의 1000년의 세월을 지탱해 온 영은사의 석탑중 가장 오래된 석탑이다.













일주문이 아닌 다른 출구로 나오니 편액이 영은사 비래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