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저우 여행의 백미 송성가무쇼(2/2)

2016. 8. 28. 12:32해외여행

항저우 여행의 백미 송성가무쇼(2/2)

~제2부~


항저우는 역사 유물과 자연의 아름다움으로 명성이 높은 도시로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10개 도시 중 하나로 손꼽힌다.

비록 최근에는 도시화가 급격히 진행되었지만, 여전히 사적(史蹟)과 문화는 잘 보존되어 있는 도시다.

항저우에는 많은 관광지가 있지만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일본을 포함하여

동남아 지역에서도 송성가무쇼와 서호는 잘 알려진 관광지다.

이 호수는 6평방킬로미터에 이르며 중국을 대표하는 소동파를 비롯하여 옛 시인묵객이 극찬한 호수로,

오래된 고풍스런 탑과 문화 유적지 거기다 아름다운 자연을 더하여

항저우라는 도시를 홍보하는데 큰 역할을 하는 것들 중 하나이다.

 

볼꺼리는 서호를 둘러싼 서호10(西湖十景)과 신서호10(新西湖十景),

그리고 항저우 천년고찰 영은사(靈隱寺), 남송의 장군을 기리는 악비묘(岳王庙), 육화탑(六和塔),

세계에서 가장 긴 다리로 일컬어지는 바다를 가로질러 건설된 36km의 전당강대교(钱塘江大桥 ; 첸탕강),

구계십팔간(九溪十八涧) 등이 있다.














한국관광객을 유치하고자 하는 일환으로 우리나라 장고춤까지 가미되어 있다.






쇼의 2부는 악비장군을 테마로 했다.


악비(岳飛 1103-1142)는 중국 역사상 ()’을 대표하는 남송의 장군이다.

악비는 중국이 북방 여진족의 침략을 당하던 북송(北宋) 말년에 태어나

오로지 정충보국(精忠報國)’이란 네 글자를 가슴에 품고 군대에 투신한 후 많은 전공을 세웠다.

<송사 악비열전(岳飛列傳)>에 따르면 북송의 장수 종택(宗澤)도 악비를 가리켜

 그의 용기와 지혜, 재주, 예의범절은 예전의 훌륭한 장수도 따를 수 없다라고 칭찬했다고 한다.

  



  

1127년 여진족이 북송의 수도인 변량(汴梁 지금의 하남성 개봉)이 함락되자

흠종(欽宗)황제와 그의 부친 휘종(徽宗) 및 종실(宗室)과 백관 수백 명이 북방에 포로로 잡혀갔다.

역사에서는 이를 정강의 치욕(靖康之恥)’이라 한다.

흠종의 동생 조구(趙構)가 장강(양쯔강)을 건너 남송(南宋)을 수립했으니 그가 바로 고종(高宗)이다.

고종연간에 악비는 여러 차례 출병해 승리를 거뒀다.

소흥(紹興 고종의 연호) 10년에는 북송의 수도였던 변량의 남쪽 주선진(朱仙鎮)에서 기마병 500명으로

여진족 정예 10만 명을 대파한 후 말에게 황하의 물을 먹이며 중원 회복을 눈앞에 두었다.


*성은 불에 타고.., 무대에 투입된 말은 실물이다.   

  

그러나 고종과 가까운 일부 신하들이 악비의 승리를 시기해 그를 모함했다.

악비의 군대가 수도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더 강성해지면 반란을 일으킬 위험이 있다는 것이었다.

고종은 참언(讒言)을 믿고 고립된 군사는 오래 머물 수 없다라는 구실로 잇달아 12차례나

군령(軍令)을 내려 보내 악비를 철군하게 했다.

조정에 돌아온 후 악비는 군사지휘권을 박탈당했고,

1년 후 간신(奸臣) 진회(秦檜)의 모함을 받아 항주(杭州) 풍파정(風波亭)에서 살해당했다.

당시 그의 나이 39세였다. 아들 악운(岳雲)과 부장(部將) 장헌(張憲)도 함께 난을 당했다.

송성가무쇼의 제2부는 악비장군의 이런 일생을 테마로 한 것이다.




























제3부는 아름다운 서호를 배경으로 양산백과 축영대의 슬픈 사랑이야기와 백사전의 내용을 테마로 하고 있다.










<양산백(梁山伯)과 축영대(祝英臺)의 사랑이야기>

옛적에 중국은 여자는 서원에서 글을 배우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그런대 글 읽기를 좋아하는 축영대라는 한 여인이

이를 어기고 남자로 변장하여 서원에 들어가 많은 남자 서생들과 함께 공부를 했다.

그렇게 공부한지 어느 듯 3년이란 세월이 흘러갔지만 함께 공부한 어느 서생들도 이를 알지 못했다.

그런데 많은 남자 서생들 중 유독 양산백이란 서생과는 가까워져 짝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자기가 여자임을 밝히면 퇴출될 것을 두려워 이를 공공연히 밝힐 수가 없었다.

홀로 애타게 고민을 하던 중 설상가상으로 집으로 돌아오라는 아버지의 귀가명령까지 받게 되었다.

축영대는 서원을 떠나는 날 용기를 내어 양산백에게는 고백하지 못하고

서원의 사모(師母)님께 자기가 여자임을 고백하고 양산박에게 나비부채를 증표로 남기고 떠나갔다.


집으로 돌아오자 축영대의 아버지는 혼기가 찬 딸의 혼사를 서둘렀다.

그러나 축영대는 차마 서원에서의 그 일을 밝힐 수 없어 차일피일 미루다가 아버지의 강요를 이기지 못해 수락했다.

뒤늦게 서원 사모로부터 축영대가 여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양산백은 부랴부랴 달려와 청혼을 했지만

이미 결혼할 사람이 정해진 터라 거절당했다. 슬픔에 빠진 양산백은 돌아와 식음을 전폐하고

시름에 빠져 지내다가 끝내 세상을 달리했다.

양산백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축영대는 결혼날짜까지 이미 정해져 있었지만

아버지에게 지난 이야기를 밝히고 상사병으로 죽은 사람의 한()은 당사자가 풀어주어야 한다고

아버지를 설득하여 양산백의 무덤을 찾아갔다.

양산백의 무덤을 찾아간 축영대는 무덤 앞에서 향을 피우며 대성통곡을 했다.

그러자 맑은 하늘이 갑자기 먹구름이 끼면서 천동 번개가 치고 양산백의 무덤이 둘로 갈라졌다.

살아서 함께 하지 못했지만 죽어서는 함께 해야겠다는 생각이 불현 듯 떠오르자

축영대는 갈라진 무덤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러자 천둥번개가 그치고 갈라진 무덤이 다시 하나로 합쳐졌다.

그 후 이 무덤가에는 나비가 날아들기 했는데 사람들은 죽은 양산백과 축영대의 혼이 나비가 되었다고 믿게 되었다.

가무쇼 제 3막에 다리가 둘로 갈라지고, 밧줄을 타고 허공을 오르는 서커스의 묘기는

옆의 나비영상과 함께 이를 상징한 것이다.



아래 영상들은 백사전의 내용을 테마로 한 것이다.



























<白蛇許仙(백사와 허선) 이야기>

백사전에 나오는 이야기를 테마로 한 것이다.

백낭자(白娘子)1000년을 수행한 백사(白蛇)의 정령(精靈)이다.

이 백사(白蛇)가 사람에게 잡혀 죽을 지경에 이르렀는데 허선이라는 총각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

백사는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허선과 부부가 되기를 결심하고 아름다운 여자로 변하여 허선을 유혹한다.

  .... 

서호십경(西湖十景) 중 하나인 단교잔설(斷橋殘雪)의 그 단교(斷橋)에서

둘은 마주치는데 백낭자가 하늘에서 비를 내리게 하여 허선과 우산을 같이 쓰게 된 것이다.

이리하여 부부가 된 두 사람은 행복하게 살았는데,,,

가무쇼에서 보면 천정에서 갑짜기 비가 내리면서 등장하는 대형우산은 이를 상징한 것이다.


쇼가 끝나고 나오니 주변의 풍경이 오색등으로 화려하게 눈을 끈다.

 삼각대를 가지고 갔다면 멋진 풍경을 담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