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왕 단종의 유배지 영월 청령포(淸泠浦)

2016. 3. 13. 00:52명승지

비운의 왕 단종의 유배지 영월 청령포(淸泠浦)

청령포는 왕위를 찬탈당하고 17세에 나이에 사사(賜死) 당한 단종의 유배지다.

서쪽은 육육봉의 험준한 암벽이 솟아 있고 남쪽은 층암절벽으로 막혀 동서쪽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여

마치 섬과 같이 형성된 영월 청령포(寧越 淸泠浦)는 영월 읍내에서 서남쪽으로 3km 정도에 위치하고 있으며,

남한강 상류의 지류인 서강(西江)이 곡류하고 있어 배로 강을 건너지 않으면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천혜의 유배지로 현재도 도선을 이용해야만 방문이 가능한 곳이다.

  

 

 

  

 

청령포(淸泠浦)라는 이 지명은 1763(영조 39)에 세워진 단종유지비에서 그 유래를 엿볼 수 있다.

()는 영조가 직접 <단묘재본부시유지(端廟在本府時遺址)>라는 글과

()의 뒷면에 17639월에 원주감영으로 하여금 쓰게 했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고,

지명 <청령포>라고 표기되어 있다.

이로 보아 청령포라는 지명은 단종이 유배되기 전부터 있었던 유래가 깊은 곳으로 보인다.

  

 

 

  

 

이 지역은 감입 곡류하던 서강이 청령포 부근에서 하천의 측방침식에 의하여

하천의 유로가 변경되어 형성된 지역이다.

이 지역은 과거 서강이 우회하던 방절리 주변의 저지대에 현재는 논농사가 이루어지고 있는

구하도와 미앤더 핵이라 불리는 지형이 잘 보존되어 있어 학술적으로 중요하다.

또한 인근에 석회암 지대에 발달하는 카르스트지형과

구하도 상에 위치한 방절리의 하안단구(河岸段丘) 등이 발달되어 있다.

  

 

 

  

 

청령포의 명소는 유배 당시 세운 것으로 알려진 금표비(禁標碑)

그 뒤 영조 때 세운 단묘유적비(端廟遺蹟碑), 20004월 단종문화제 때 세운 단종어가가 있으며,

단종이 서낭당을 만들 듯이 쌓은 것이라 하는 돌탑 등이 있다.

청령포는 수림지로 불릴 만큼 소나무 숲이 울창하고

서강의 물이 맑아 예로부터 영월팔경의 하나로 손꼽히는 명소로서 알려져 왔다.

 

 

 

 

 

 

 

 

 

 

 

 

 

 

 

 

 

 

 

 

 

 

 

 

단종의 어가다. 이 어가는 홍수로 소실된 것을 2000년 새로 지어진 것이다.

단종의 어가는 추측컨대 지금의 사진처럼 이런 규모가 아니 초라한 초가집 정도에 불과했을 것이다.

 

 

(유배지에서 단종의 일면을 밀납으로 만들어져 있다.)

 

흘러간 역사 속에 비운에 간 왕들의 이야기는 많지만 그 중에서도 숙부에게 왕위를 찬탈당하고

17세라는 어린나이에 사사(賜死) 당한 단종의 이야기는

우리의 뇌리에 쉬이 잊혀지기 어려운 슬픈 역사다.

 

 

 

(단종을 알현하는 모습)

 

@이 역사의 주인공 단종은 1441(세종 23)에 문종과 현덕왕후 권씨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은 홍위(弘暐)이다.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 권씨는 문종이 세자이던 시절 소실로 들어왔다가

두 명의 세자빈이 폐출된 후 왕비가 된 분이다.

그러나 단종을 낳고 사흘 만에 죽었고, 후에 추존되었다.

문종이 더 이상 세자빈을 들이지 않은 탓에 단종은 모후(母后) 없이 세종의 후궁인 혜빈 양씨의 손에서 자랐다.

형제로는 동복누나인 경혜공주와 이복동생인 경숙옹주가 있다.

 

 

 

 

 

@8세가 되던 1448(세종 30)에 왕세손에 책봉되었고, 예문관 제학 윤상으로부터 학문을 배웠다.

14502(세종32)에 세종이 승하하고 문종이 즉위하자 그해 720일 왕세손이던 홍위는

10세의 나이에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며, 1452518일 병약한 문종이 승하한 뒤

단종은 경복궁 근정전에서 12세의 어린 나이에 제 6대 왕으로 즉위하였다.

 

 

 

 

 

@1453(단종 1) 수양대군이 단종의 보좌 세력이자 원로대신인 황보 인·김종서 등 수십 인을 살해, 제거하고

 정권을 잡은 계유정난 이후 1455611일 단종은 신왕권의 세력을 견디지 못하고

마침내 숙부인 세조에게 왕위를 양위하고 15세 나이에 상왕(재위기간1452-1455)으로 밀려나

세종의 여섯 째 아들이자 수양대군의 동생인 금성대군의 집에 연금된다.

 

 

 

 

 

그러다가 1457(세조 3) 6월에 집현전학사인 박팽년, 성삼문 등이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모두 죽임을 당하는 사육신사건으로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천리의 유배의 길을 떠나게 된다.

17세의 어린 나이로 1457년 윤 622일 창덕궁을 출발하여 7일 후인 윤 628일 강원도 영월 청령포로 유배된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그해 9월 금성대군 유가 다시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사사되자

단종은 노산군에서 서인으로 다시 강등되고 결국 14571024일 유시에

영월 관루인 관풍헌에서 사약을 받아 생을 마감하게 된다.

 

 

 

(곤룡포)

 

단종은 청령포에 유배된 기간은 2달 남짓,

영월 관풍헌에서 사사(賜死) 당하기까지 모두 합쳐도 고작 4개월이 되지 않는다.

관풍헌(觀風軒)으로 처소를 옮기게 된 것은 유배되어 온 같은 해 여름

홍수로 서강이 범람하자 잠시 피난처로서 처소를 옮긴 것이다.

그러나 단종은 다시 청령포로 돌아가지 못하고 영월 관풍헌에서 사약을 받게 된 것이다.

 

 

 

 

 

단종의 유배지 청령포는 19711216일 강원도기념물 제5호로 지정되었다가

20081226일 명승 제50호로 변경되었다.

 

 

 

@단묘재본부시유지 비석

단묘재본부시유지(端廟在本府時遺址)비는 단종어가 바로 앞 작은 비각 안에 세워져 있다.

조선왕조 제6대 임금인 단종이 세조에게 왕위를 찬탈 당하고 노산군으로 강봉되고 유배되어 계셨던 곳으로

당시 이곳에 단종이 거처한 어소가 있었으나 소실되고

영조39(1763)에 이 비를 세워 어소의 위치를 전하고 있다.

 

 

 

이 비석의 높이는 162cm으로 화강석 기단위에 오석으로 된 비신을 세우고

 비 앞면에는 단묘재본부시유지(端廟在本府時遺址)라고 음각되어 있으며,

후면에는 황명숭정무진기원후삼계미계추읍 체경서영원영수석 지명 청령포

(皇命崇禎戊辰紀元後三癸未季秋泣 涕敬書令原營石 地名 靑羚浦)로 음각되어 있다.

비각 주위에 자연석을 놓아 외곽 표시를 했고,

비각 앞에는 길게 누운 자세로 기둥이 받혀져 있는 엄흥도소나무불리는 한 그루 솔이 있다.

 

 

 

@엄흥도소나무

단종어가의 담벼락을 넘어 90도 가깝게 허리를 굽히고 있는 이 소나무는

일명 엄흥도 소나무라 불리는 충절의 소나무라 불린다.

 

 

 

 

엄흥도는 조선 전기의 지사로서, 관풍헌에서 사약을 받고 승하한 단종의 옥체를 거두어

 관까지 준비하여 장례를 치룬 충신으로

세조에 의해 억울한 죽음을 맞이한 단종의 시신을 자신에게 화가 미칠 것을 염려하여

아무도 거두려 하지 않자 본인이 직접 나서 단종의 장례를 치르고 숨어 살았던 인물이다.

단종어가를 향해 90도 가까이 허리를 숙이고 있는 모습이 마치 담 너머 단종을 알현하는 듯,

그의 충절을 대변하고 있는 것 같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관음송(觀音松)

관음송은 청령포에서 가장 대표적인 소나무로 꼽힌다.

청령포 안에서 자라는 이 관음송의 나이는 대력 600년 정도로 추정되고 있으며,

높이 30m, 둘레 51.9m에 달한다.

 

 

 

우리나라에서 관음송으로 제일 크다는 이 관음송의 형상을 보면 1.6m되는 높이에서

줄기가 두 갈래로 갈라져 하나는 위로 뻗었으며 나머지 하나는 서쪽으로 약간 기울어 자라고 있는데

단종이 유배생활을 할 당시 이 나무의 갈라진 줄기에 걸터앉아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이러한 단종의 비참한 모습을 보았다고 하여 볼 관()’자를,

단종의 슬픈 신음을 들었다고 하여 소리 음()’자를 따서 관음송(觀音松)이라고 불리게 된 것이라고 한다.

 

 

 

청령포의 이 관음송은 현재 천연기념물 제 349호로 지정되어 있다.

 

 

 

청령포는 옛부터 지리적으로 고립되어 있어서 울창한 노송들이 잘 보존되어 있다.

 

 

 

 

 

 

 

 

@망향탑과 노산대

망향탑은 단종이 정순왕후를 그리며 막돌을 주워 쌓아 올렸다는 돌무더기다.

층암절벽 위에 애처롭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단종이 유배생활의 한을 달래고 시름을 잊기 위해 자주 오르던 바위는 노산대라 하여 망향탑 아래에 있다.

 

 

 

 

 

 

 

 

 

망향탑에서 내려다 본 어가가 있는 솔밭

 

 

 

노산대

 

 

 

 

 

 

 

노산대에서 바라다 본 서강의 풍경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시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야 울어 밤길 예놋다 

~왕방연~

 

이 시의 저자로 알려진 왕방연은 사육신을 중심으로 한 단종 복위사건이 사전에 발각되어

강원도 영월에 유배중인 노산군(魯山君 : 단종)에게 1457년 사약이 내려질 때 그 책임을 맡은 의금부도사였다.

그는 영월에 이르러 사약을 받들고 노산군 앞으로 나아가려 하였으나 감히 어찌할 바를 몰라 머뭇거렸다.

나장(羅將)이 시각이 늦어진다고 재촉하자 하는 수없이 뜰 가운데 엎드려 있으니,

단종이 익선관과 곤룡포를 갖추고 나와서 온 까닭을 물었을 때 차마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이때 단종을 항상 곁에서 모시던 공생(貢生 : 관가나 향교에서 심부름하던 통인과 같은 사람)이 이 일을 담당하였다.

이 시는 이때의 괴로운 심정을 읊은 것이라고 한다.

 

 

 

  

<장릉지(莊陵誌)>에는 금부도사(그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다)가 밤에 굽이치는 여울의 언덕 위에 앉아

슬퍼하면서 노래를 지었는데, 그 뒤 1617년에 김지남(金止男)이 금강에 이르러

여자아이들이 부르는 노래를 듣고 한문으로 단가를 지었다청구영언에 이 시조가 실려 있다.

  

 

 

  

 방안에 혓는 촛불 눌과 이별하였간데 

 겉으로 눈물지고 속타는 줄 모르는고

뎌 촉불 날과 같아여 속타는 줄 모르도다

~이 개~  

홍촉루가(紅燭淚歌)라고 불리는 이 시조는 영월 땅에 보내진 단종을 사모하면서 읊은 것이다.

춧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자신의 눈물에 비유하고 심지가 타 들어 가는 것을 자신의 그 애타는 마음에 비유하였다.

으슥해 지는 깊은 밤, 하염없이 눈물짓는 촛불은 님(단종)과 이별한 자기의 마음이 타듯이 자구만 타 들어 가기만 했다.

 

이개의 호는 백옥헌(白玉軒), 자는 청보(淸甫), 세종 14년에 문과에 급제한 후

집현전의 학사를 거처 벼슬이 직제학(直提學)에 이르렀다. 시문과 서체에 능한 학자였다.

 

 

 

 

 

 

금표비(禁標碑)

@단종이 유배되어 머물던 곳을 밝혀주는  단묘유지비각 서북쪽에 이끼가 낀 비석이 하나 서 있다.

앞면에는 淸冷浦禁標(청령포금표)라고 쓰여 있다.

이는 청령포출입을 금한다는 경계비임을 뜻한다. 그리고 이어

'東西三百尺 南北四百九十尺 此後泥生亦在當禁(동서삼백척 남북사백구십척 차후니생역재당금)'이라고 쓰여 있다.

풀이하자면 동서로 300, 남북으로 490척과 이후 진흙이 쌓여 생기는 땅도 또한 금지에 해당한다.라는 의미다.

그리고 비의 왼쪽에는 숭정구십구년병오 십월일립(崇禎九十九年丙午十月日立)이라고 쓰여 있다.

이 금표비는 단종이 죽은 지 270년 뒤에 영월부사 윤양래가 1726(영조 2)에 세운 것이다.

금표비에 나온 내용을 본다면 단종은 여기에 유배되어 있을 때에도

왕명에 의해 외부와는 일체 차단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단종이 기거하던 곳에는 집을 지어두고 있으며,

유허지를 알려주는 단묘유지비(端廟遺址碑)가 작은 전각 속에 들어있어

이전에 이곳에 단종 임금이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단종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분분하다.

@실록에는 조정 대신들이 노산군을 처형하라고 주장해 세조가 이를 윤허했는데,

사약이 내려지자 노산군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야사에는 노산군의 억울한 죽음이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금부도사 왕방연(王邦衍)이 사약을 받들고 영월에 이르러 감히 들어가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으니,

나장이 시각이 늦어진다고 발을 굴렀다. 도사가 하는 수 없이 들어가 뜰 가운데 엎드려 있으니,

단종이 익선관과 곤룡포를 갖추고 나와서 온 까닭을 물었으나, 도사가 대답을 못했다.

통인(通引) 하나가 항상 노산을 모시고 있었는데, 스스로 할 것을 자청하고 활줄에 긴 노끈을 이어서

앉은 좌석 뒤의 창문으로 그 끈을 잡아당겼다. 그때 단종의 나이 17세였다.

통인이 미처 문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아홉 구멍에서 피가 흘러 즉사했다.

시녀와 시종 들이 다투어 고을 동강(東江)에 몸을 던져 죽어서 둥둥 뜬 시체가 강에 가득했고,

이날에 뇌우(雷雨)가 크게 일어나 지척에서도 사람과 물건을 분별할 수 없고

 맹렬한 바람이 나무를 쓰러뜨리고 검은 안개가 공중에 가득 깔려 밤이 지나도록 걷히지 않았다.

- 연려실기술4, 단종 조 고사본말~

 

 

 

 

 

@<이광수의 단종애사>에 의하면 이 극적인 장면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정축 1024일 왕방연이 사약을 가지고 왔으나 단종이 없어서 울고만 있는데,

유시(酉時)에 공생(貢生)이 활줄로 단종의 목을 매어 한 많은 숨을 거두게 된다.

공생은 문을 나가다 피를 토하여 죽고, 노산군의 시체는 금강에 띄운다.

밤에 영월의 호장(戶長) 엄흥도(嚴興道)가 몰래 시체를 건져 싸두었다가 관에 넣어

평토장(平土葬)을 하고 돌을 얹어 표를 하여둔다.

 

 

 

 

  @@단종이 명예를 회복하는 데는 200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1681(숙종7)에 노산대군으로 추봉되고,

1698년 전 현감 신규(申奎)의 상소에 의해 복위가 결정되었다.

시호를 공의온문순정안장경순돈효대왕(恭懿溫文純定安莊景順敦孝大王)으로,

묘호를 단종으로 추증하고, 능호(陵號)를 장릉(莊陵)이라 하였다.

 

 

 

 

@단종이 자신의 비애를 가장 잘 드러낸 시가 하나 있다. 그가 지었다는 자규시다.

1457년 여름 청령포에 큰 홍수가 나자 단종의 유배지는 관풍헌으로 처소를 옮겼다.

관풍헌은 조선 초기에 영월 동헌 터에 지은 객사다. 넓은 마당을 두고 큰 건물 세 채가 동서로 나란히 붙어 있다.

관풍헌 마당 앞 좌측에는 2층 누각인 자규루라는 정자가 있다.

세종 때 영월 군수였던 신권근이 세운 누각으로 본래 이름은 매죽루였지만

청령포의 홍수로 말미암아 임시 관풍헌으로 옮겨 온 단종은 이 누각에 올라

자신의 한을 담은 <자규사>라는 시를 짓고 나서부터 자규루로 불리게 된 정자다.

14571024, 단종은 이곳 관풍헌에서 세조의 명으로

금부도사 왕방연이 가지고 온 사약을 받고 짧은 생을 마감했다.

해방 전에는 영월군청이, 그 뒤에는 영월중학교가 들어서기도 했으나

지금은 보덕사의 포교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청령포를 떠나면서 단종이 그때 지었다는 자규시를 음미해 본다.

  

 

 

 

子規詩(자규시)

一自寃禽出帝宮(일자원금출제궁) 원통한 새가 되어 궁궐을 나온 후로

孤身隻影碧山中(고신척영벽산중) 외로운 그림자 산중에 홀로 섰네

假眠夜夜眠無假(가면야야면무가) 밤이 가고 밤이 와도 잠 못 이루고

窮恨年年恨不窮(궁한년년한불궁) 해가 가고 해가 와도 한은 끝이 없어라

 

斷聲曉岑殘月白(성단효잠잔월백) 두견새 소리 그치고 조각달은 밝은데

血流春谷落花紅(혈류춘곡낙화홍) 피눈물 흘러서 지는 꽃이 붉구나

天聾尙未聞哀訴(천롱상미문애소) 하늘도 저 하소연 듣지 못하는데

何奈愁人耳獨聽(하내수인이독청) 어찌 시름 젖은 내게만 들리는고

 

제왕의 자리에서 쫓겨난 어린 임금의 애처로움과 비통함이

절절히 묘사돼 있어 읽는 이의 가슴을 숙연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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