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나들이 설날 남이섬에서(1/2)

2016. 2. 21. 10:20명승지

 

 

 

 

겨울나들이 설날 남이섬에서(1/2)

 

설 휴가를 맞아 멀리서 여식(女息)이 손주들을 데리고 왔기에 멀리 가기는 교통체증 때문에 엄두가 나지 않아

가까운 남이섬으로 나들이를 나갔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했던가!

일 년에도 수차례 춘천을 오가지만 그 유명하다는 가평 남이섬을 가 본지는

강산이 변해도 서너 차례는 변했을 시간인데도 언제 가보았는지 기억이 가물가물 하다.

이름난 관광지는 무언가 특별한 것을 보여주고 있는데 남이섬만은 내게는 그렇지 못했나 보다.

대개 지금까지 내가 즐겨 찾아간 관광지들은 천년 고찰과 같은 역사성과

독특한 자연경관에 매료되어 찾아다니곤 했는데

남이섬은 그 역사적인 유래가 베일에 가려져 있어서 그런지 뚜렷이 눈에 들어 온 것이 없었다.

그래서 이번 방문을 기해 인터넷에서 남이섬의 유래와

어떤 볼거리가 있어 유명했는지를 조사해 보았더니 그 이유를 알만할 것 같았다.

 

 

 

 

 

남이섬은 1944년 청평댐을 만들 때 북한강 강물이 차서 생긴 내륙의 개인 소유의 섬이라고 한다.

현재의 소유주는 민웅기씨로 되어있다고 한다.

남이섬은 1965년 현재의 소유자인 민웅기의 부친 민병도씨가 한국은행장에서 퇴직한 후

당시 불모의 땅인 남이섬을 구입해 유원지로 만들었다.

민병도씨는 민영휘의 손자이며 민웅기는 그의 증손이 된다.

민영휘는 한일합병에 협력한 공으로 일제조선총독부로부터 작위를 받아

일제강점기하 조선최고의 갑부로 귀족생활을 누렸던 친일 권력형 부정축재자로 지목된 사람이다.

민병도의 재산 또한 상당수가 민영휘 일가가 일제로부터 받은 재산에서 기인한 것이기 때문에

남이섬도 친일재산으로 보아 회수하려고 한 적도 있었으나

민병도가 1970년에 이미 법인(남이섬)을 설립했기 때문에 회수가 되지 않았다고 한다.

 

 

 

 

 

남이섬이 매스컴을 타기 시작한 것은 1960~90년대에 최인호의 <겨울 나그네> 촬영지에서 비롯된다.

고작해야 강변가요제 개최지나 행락객들의 유원지로 인식되어 오던 남이섬은

200112KBS 드라마 <겨울연가>의 성공으로 시세말로 대박을 터트린 셈이다.

겨울연가 이후로 대만, 일본, 중국, 동남아를 비롯한 아시아권 관광객이 급증하면서 휴양지, 문화관광지로 탈바꿈하였다.

남이섬은 겨울연가의 촬영지로 알려지면서 이것이 기폭제가 되어

지금은 연간 15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몰려드는 유명 관광지가 된 것이다.

 

 

 

 

@남이섬의 홈피에 의하면 남이섬을 나미나라공화국(Naminara Republic)이라고 선전하고 있다.

이는 국가 개념을 표방하는 특수 관광지로, 독자적인 외교와 문화 정책을 펼치고

전 세계 관광객들에게 아름다운 동화와 노래를 선물하는,

이 세상에 유일무이한 상상공화국이라고 자랑하고 있다.

 

 

 

  

  

남이섬의 이름을 <남이섬>라 불리는 이유는 그곳에 남이장군의 묘가 있기 때문인데

남이장군의 실제 묘는 경기도 화성시 비봉면에 있다,

남이섬에 조성된 남이장군의 묘는 가묘(假墓)인 셈이다.

 

 

 

 

 

 

 

 

 

 

 

 

 

 

 

 

 

 

<남이장군>

남이(南怡: 1411(세종23)~1468(예종즉위))장군은 조선 세조 때의 장군으로 본관은 의령이다.

의산군(宜山君) 태종(이방원)의 외손으로 휘()의 아들이며 좌의정 권남(權擥)의 사위이기도 하다.

1457(세조3) 17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세조의 총애를 받았고,

1467(세조13) 이시애(李施愛)의 반란이 일어나자 출전하여 용맹을 떨쳤다.

파저강 일대의 건주위 여진족 정벌에도 참여하여 추장 이만주 부자를 사살함으로써 일약 조선의 영웅으로 부각되었다.

이런 공적으로 적개(敵愾)공신이 되고 훈() 1등에 책록 되어 26세의 나이로 병조판서가 되었다.

이때에 한계희는 종친의 외척에게 병권을 주는 것은 부당하다고 간하였고,

예종이 즉위하자 유자광의 무고로 옥사가 일어나 처형되었다.

이를 가리켜 역사는 남이(南怡)의 옥()이라 한다.

  

 

 

 

  

@ 적개공신(敵愾功臣)은 조선 세조 때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운 사람에게 내린 칭호로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운 사람 45명을 3등급으로 나누어 포상하였던 제도다.

1등은 정충출기포의적개공신(精忠出氣布義敵愾功臣)으로 10명에게 포상했고,

2등은 정충포의적개공신(精忠布義敵愾功臣)으로 23명에게,

3등은 정충적개공신(精忠敵愾功臣)으로 12명에게 내렸다.

 

 

 

  

<남이(南怡)의 옥()>

남이 옥은 1468(예종즉위)에 유자광(柳子光) 일파가

남이장군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예종의 뜻을 받아 일을 조작하여 남이를 역모로 몰아 죽인 사건이다.

세조가 돌아가고 예종이 즉위한지 얼마 안 되어 혜성(彗星)이 나타났는데,

어느 날 밤 금중(禁中)에서 수직하고 있던 남이가

<혜성>이 나타남은 묵은 것을 없애고 새것을 나타내게 하려는 징조다.라고 말하는 것을 유자광이 듣고

이 말을 왜곡시켜 남이가 역모한다고 예종에게 고해 받쳤다.

선왕(先王) 때부터 남이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던 예종은 이것을 기화로 남이를 제거하는 데 이용하였다.

이 사건으로 남이를 위시하여 수많은 관료 대신들이 처형되었는데

단죄(斷罪) 내용이 남이장군이 그들과 공모하여 왕이 산릉(山陵)으로 행차할 때 거사하여

보성군 합()의 아들 춘양군 내()를 추대하려고 역모를 했다는 것이었다.

남이의 장인과 그의 어머니를 비롯하여 남이와 조금이라도 관련된 자라면 관료와 대신들을 가리지 않고

모두 역모자로 몰려 처형되었다.

 

 

@@남이 장군 묘는 남이 장군과 부인이 함께 있는 쌍분묘로,

경기도 화성시 비봉면 소재지에서 북서쪽으로 약 2.5정도 떨어진 남전리 야산에 위치한다.

1973710일에 경기도 기념물 제13호로 지정되었다.

 

 

남이장군의 북정가로 알려져 있는 남이장군의 시

 

白頭山石 磨刀盡(백두산석 마도진)

豆滿江水 飮馬無(두마강수음마무)

男兒二十 未平國(남아이십미평국)

後世誰稱 大丈夫(후세수칭대장부)

 

백두산 돌은 칼을 갈아 없새버리고

두만강 물은 말을 먹여 말리리.

사나이 스무 살에 나라 평정 못한다면

후세에 그 누가 대장부라 부르리오.

 

 

 

 

 

 

 

 

 

 

 

 

 

 

 

 

 

 

 

 

 

 

 

 

 

 

 

 

 

 

 

 

 

 

 

 

 

 

 

 

 

운석맞은 화장실

 

 

 

 

 

 

 

 

 

 

 

 

 

 

 

@서장대(西將臺)란 예전에, 장수가 올라서서 지휘할 수 있도록 산성(山城) 서쪽에 높이 만든 대()를 이르던 말.

 

 

 

 

 

 

별천지

 

 

 

 

 

 

 

 

 

 

 

 

 

 

 

 

~2부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