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1. 31. 14:37ㆍ명승지
두문동의 혼을 담은 고성 왕곡마을
@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오봉리에 위치한 왕곡마을은
고려 말기의 유신(遺臣)들이 새 조정인 조선에 반대하여 벼슬살이를 거부하고 은거하여 살았던
두문동(杜門洞) 이야기에서 비롯된 마을이다.
두문동은 조선 시대 성거산 서쪽에 고려가 멸망하자 과거 고려의 신하 72명이 살던 곳이다.
두문불출(杜門不出)한다하여 두문동(杜門洞)이라고 불리었다.
조선왕조는 두문동을 포위하고 고려 충신 72인을 불살라 죽였다고 전해지고 있는데,
일설에는 동두문동과 서두문동이 있어서 동두문동에는 고려의 무신 48인이 은거하였는데
이들도 모두 산을 불태울 때 죽었다고 한다.
정조 때 조정에서 그 자리에 표절사(表節祠)를 세워 그들의 충절을 기렸다.
두문동에 관한 기록은 조선 순조 때 당시 72인의 한 사람인 성사제(成思齊)의 후손이 그의 조상에 관한 일을 기록한
『두문동실기(杜門洞實記)』가 남아서 전해지고 있다.
‘두문불출(杜門不出)’이라는 말이 여기서 비롯되었다고 하며
그 당시 많은 선비들이 은거함에 따라 이를 두문동이라고 부르는 곳이 여러 곳에 남아 있다.
왕곡마을은 두문동의 72현의 한분으로 거론되는
강릉 함씨, 함부열(咸傅說, 1363~1442)과 관련되어 생긴 마을이름이다.
@고려 말 충신 정몽주(鄭夢周)가 살해되고 조준·정도전(鄭道傳)·남은(南誾) 등에 의해 추대되어
왕위에 오른 이성계는 고려 마지막 왕인 공양왕을 폐위시키고
1392년 7월11일에 원주로 유배시켰다. 그리고 8월에 공양군(恭讓君)으로 강등시키고
간성으로 다시 유배시켰는데 공양왕이 머문 곳이 간성읍에서 고개 하나를 넘으면 나오는
간성읍 금수리 마을 안쪽의 수타사라고 한다.
공양왕을 간성왕이라고도 부르는 것은 강원도 고성군 간성(杆城)에 머문 적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공양왕은 이곳에 머물다가 조선 태조 3년(1394) 3월14일에 삼척 궁촌리로 재차 유배되었다가
한 달 뒤인 4월17일 고돌산의 살해재에서 왕자 석(奭), 우(瑀)와 함께 교살되었다.
역사적 기록에 의하면 공양왕의 무덤은 삼척시 근덕면 궁촌리와 고양시 원당동 두 곳에 있다.
삼척 묘는 처음 묻힌 곳이고, 원당 묘는 조선 왕실에서 시신을 확인하기 위해 불러 올린 뒤에 묻은 곳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제3의 공양왕릉이 고성군 간성읍 고성산에 있다고 한다.
모두 두문동 72현으로 거론되는 강릉 함씨, 함부열(咸傅說, 1363~1442)과 관련되어 생긴 얘기다.
공양왕이 강원도 유배 길에 올랐을 때, 몰래 뒤따르던 이가 바로 고려 우왕 13년(1387)에 과거에 급제하고
홍문박사와 예부상서를 지냈던 함부열이다.
살해된 간성왕은 금수리 수타사에서 가까운 고성산 기슭에 묻혔다고 하는 데
매장을 주도한 사람이 함부열이라고 한다.
함부열은 유언으로 간성왕 밑에 자신을 묻고,
자신의 묘에 제사 지내기 전에 왕 무덤에 축문 없는 제사를 지내라고 했다.
행여나 간성왕 무덤이 알려지면 후손들이 다칠까 봐서였다.
함부열이 죽은 후 그의 후손들은 간성 지방에 터를 잡고 살게 되는데,
이곳이 현재 전통마을로 지정된 고성군 죽왕면 오봉리의 왕곡마을이다.
왕곡마을 어귀의 안내판에는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 사이에 고려에 충성하는 강릉(양근) 함씨가
이곳에 들어와 동족 마을을 형성했다”고 소개하고 있다.
함부열의 손자인 함치근(함영근은 그의 다른 이름)이 지금도 여기에 살고 있다.
함부열과 간성왕의 묘는 고성산의 서쪽 기슭에 있는데,
금강산에서 설악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의 산맥들이 묘역을 휘감아 돌고 있는 명당 터였다.
안산(案山·앞산) 너머 조산(朝山·멀리 호위하고 있는 산) 자락에
관모(官帽)처럼 생긴 관대봉이 물결치는 산맥 사이에 우뚝 솟아 있다.
함부열의 묘에는 근래에 세워진 ‘고려 홍문박사 죽계공 함부열 충의비’가 있다.
함부열의 묘 위쪽에는 비석도 상석도 없는 작은 묘가 있는데, 이곳에 공양왕이 묻혀 있다고 한다.
문헌에 전하는 바가 없고, 함씨 집안에 전해오던 야사집도 실전되어 누구도 입증할 수 없는 일이 됐지만,
함씨 집안 사람들은 이를 사실로 굳게 믿고 있고 지금까지도 축문 없는 제사를 지내고 있다.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오봉리에 위치한 왕곡마을은 함부열의 손자 함영근이
이곳 왕곡마을에 정착한 이후 함씨 후손들이 대대로 이곳에서 생활해 왔다.
특히, 19세기 전후에 건립된 북방식 전통한옥과 초가집 군락이 원형을 유지한 체 잘 보존되어 왔기에
전통 민속마을로서의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인정되어 2000년 1월 중요민속자료 제235호로 지정, 관리되어 오고 있다.
이처럼 왕곡마을은 고려말, 조선초 이래 양근 함씨와 강릉 최씨가 집성촌을 이루며 600년 세월을 정주해온 전통 있는 마을이다.
조선시대부터 이 지역은 면소재지였으며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1884년에는 왕곡마을이 금성(錦城), 왕곡(旺谷), 적동(笛洞) 세 마을로 분리되었다.
금성에는 양근 함씨가, 왕곡에는 강릉 최씨가, 적동에는 용궁 김씨가 많이 살았는데
일제 강점기 때 이 세 마을을 다시 합쳐 오봉(五峰)이라 불렀고
한국전쟁이후 행정구역 개편으로 오봉1리(금성,왕곡)와 오봉2리(적동)로 합병, 분할되었다.
즉 현재의 왕곡마을은 금성과 왕곡 두 마을이 합쳐진 곳으로
오봉1리에 해당하며 적동마을은 왕곡마을로부터 700~800m 서쪽에 위치한 오봉2리이다.
< 왕곡마을의 가옥 배치 및 구조>
마을 중앙의 개울을 따라 이어져 있는 마을 안길을 중심으로 가옥들이 자연스럽게 자리잡고 있으며
가옥과 가옥 사이에 비교적 넓은 텃밭이 있어서 따로 담이 없고
텃밭을 경계로 가옥들이 분리되어있는 것이 특징이다.
왕곡마을의 가옥구조는 안방, 도장방, 사랑방, 마루, 부엌이 한 건물내에 수용되어 있으며
부엌에 가축우리가 붙어 있는 겹집구조이다.
마을 안길과 바로 연결되는 앞마당은 가족의 공동작업 공간 역할을 하면서 타인에게 개방적이었던 반면에
비교적 높은 담으로 둘러쌓인 뒷마당은 여인들의 공간으로 비개방적이다.
뒷마당은 보이지 않고 지붕만 보여 여인들의 활동공간을 배려한 구조이다.
왕곡마을 가옥의 하나 특징는 'ㄱ' 자형 기와집이다.
대부분 가옥의 본체는 조선시대 함경도 지방(관북지방) 겹집구조이다.
부엌에 가축우리가 붙어 전체적으로 ㄱ자 형의 독특한 평면형식으로
안방과 도장방, 사랑방, 마루와 부엌을 한 건물 안에 나란히 배치하고
부엌에 외양간을 덧붙여 겨울이 춥고 긴 산간지방에서의 생활에 편리하도록 했다.
왕곡마을은 대문 없는 마당 이 특색이다.
왕곡마을의 가옥구조는 대문이 없는 개방적인 배치구조이다.
즉 입구쪽으로 대문과 담장이 없다는 것인데 이것은 바람과 눈이 많은 이 지방의 기후 특성과 관계가 있다.
햇볕을 충분히 받고 적설로 인한 고립을 방지하기 위해 개방 형태의 마당 구조를 취했으며
가옥의 기단을 높게 만든 것도 이러한 이유이다.
초가집 본채의 지붕 형태는 기와가 20여 채, 초가가 30여 채가 있다.
전국에서 유일하게 초가집이 밀집,보존되어 있는 곳으로
행랑채와 부속채의 지붕은 3동이 기와형식이고 나머지 대부분은 초가 형식으로 41동이 보존되어 있다.
항아리굴뚝
왕곡마을은 집마다 굴뚝모양을 다르게 만들었는데 진흙과 기와를 한 켜씩 쌓아 올리고
항아리를 엎어 놓아 굴뚝을 통해 나온 불길이 초가에 옮겨 붙지 않도록 하고
열기를 집 내부로 다시 들여보내기 위한 조상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으며,
다양한 형태의 항아리굴뚝은 집집마다의 개성과 멋을 보여주는데
이는 한국전통의 자연스러움과 아름다움이 조화된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송지호에서 왕곡마을을 바라보면 유선형의 배가 동해바다와 송지호를 거쳐
마을로 들어오는 모습의 길지형상을 보인다.
이러한 방주형의 길지는 물에 떠 있는 배 형국이어서 구멍을 뚫으면 배가 가라앉기 때문에
한때 마을에는 우물이 없었다고 전한다.
우물이 없었던 시기에는 샘물을 이용하였고, 근대에 와서는 우물을 사용하였다.
왕곡마을은 지형적인 특성과 풍수지리적 요인으로 인해
지난 수백년간 전란과 화마의 피해가 없었던 길지 중의 길지로서
한국전쟁과 근래 고성지역에서 발생했던 대형 산불 때에도 전혀 화를 입지 않았다.
왕곡마을의 주출입 도로는 송지호의 서쪽 길을 따라 마을의 남쪽으로 진입하는 길이 오래전부터 사용해 왔었으나
1900년대 이후 7번국도 개통이후 한고개를 넘어 마을의 북동쪽으로 진입하는 길이 보편화되면서
예전 길은 사람의 통행이 줄어들게 되었는데 왕곡마을의 지형적인 특징을 한 눈에 보기 위해서는
예전 길로 마을을 찾는 것이 좋을 것이다.
< 함희석의 효자비>
강원도 문화재 제78호로 지정된 왕곡마을 가옥에는 함부열의 21대손이자,
양근 함씨 오봉파의 종손인 함정균 씨가 살고 있다.
함정균 씨의 고조부인 함희석을 기리는 효자비가 마을 복판에 있고,
4대에 걸친 5명의 효자를 기리는 양근 함씨 효자각이 마을 동쪽 언덕에 자리잡고 있다.
이 효자각은 1820년에 세워졌다. 왕곡마을에 전해오는 ‘지정다지기 노래’의 “집을 지으면 명당이요,
아들을 낳으면 효자를 낳고 딸을 낳으면 열녀를 낳고’라는 가사에 걸맞은 기념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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