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양기행) 온달관광지

2016. 1. 4. 21:25명승지

 

 

 

(단양기행) 온달관광지

온달관광지는 충청북도 단양군 영춘면 온달로 23 일대에 바보온달과 평강공주의 전설을 테마로 조성된 관광지다,

온달관광지는 소백산국립공원 및 구인사 서쪽에 위치하며,

단양 시내에서 영춘, 영월방면으로 연결된 595호 지방도를 30분정도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온달관광지는 97,011(29,345)의 부지에 민속놀이장, 스포츠 타운, 여관, 향토음식점,

토산품판매점, 피크닉장, 온달촌, 온달관, 전설의 집, 전통혼례장 등 관광 편의 및 볼거리들이 조성되어 있으며,

관광지 내에는 45천만년의 신비스러움을 간직한 온달동굴(760m)

온달장군과 평강공주의 사랑 이야기가 연연히 전해오는 온달산성이 있다.

매년 10월이면 단풍과 국향처럼 고운 온달문화축제가 열린다고 한다.

인접한 관광지로는 단양 제2팔경의 북벽과 천태종 총본산인 구인사가 있고

소백산 깊은 계곡에서 흘러나오는 청정 계곡인 남천계곡이 위치하고 있다.

 

온달관광지는 이곳에서 SBS드라마<연개소문>MBC드라마<태왕사신기>,

 최근 KBS<바람의 나라><천추태후>까지 드라마 대작들이 연이어 이곳에서 촬영되었기 때문에

일반인들에게 인기를 끄는 관광명소로 새롭게 자리매김하고 있다.

 

 

관광지 입구에 조성된 기마상이다. 고구려의 군사력은 기마병이다.

특히 고구려는 주몽의 이야기에 나오듯이 궁술이 뛰어나

이를 상징하는 의미에서 아마도 관광지 초입에 세운 모양이다.

 

 

 

 

 

 

 

 

 

 

 

 

 

 

 

온달관광지는 드라마세트장 답게 왕궁을 중심으로 만들어져 있다.

 

 

 

 

 

 

 

 

 

 

 

 

 

 

 

 

 

 

 

 

 

 

 

여기서부터는 고구려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황궁

 

 

 

어좌

 

 

 

 

 

 

 

 

 

 

 

 

 

 

 

 

 

 

 

 

 

 

 

 

 

 

 

 

 

 

 

 

 

 

 

 

 

 

 

 

 

 

 

 

 

 

여기서부터는 온달동굴을 보고난 후 돌아 본 궁전의 뒤와 전체 풍경이다. 

(온달동굴은 단양기행 후편으로 따라 포스팅한다.)

 

 

 

 

 

 

 

 

 

 

 

 

 

 

 

 

 

 

 

 

 

 

 

 

 

 

 

 

 

 

 

 

 

 

 

 

 

 

온달관이다. 온달관은 영상자료 위주로 되어 있다.

 

 

 

 

 

@온달장군과 평강공주에 얽힌 전설

온달장군과 평강공주의 이야기는 익히 들어오던 이야기. 그 이야기의 주인공인

온달(溫達, ? ~ 590)장군은 동화 속에 나오는 그런 전설상의 인물이 아니라 역사적 인물이다.

그의 출생연대는 미상이며 고구려 영양왕1(590)에 활동한 고구려(高句麗)의 장군이다.

 

온달은 어린 시절에는 집안이 몹시 가난해 눈먼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거리를 다니며 걸식을 하였다.

그런데 용모가 파리하고 우스꽝스러워 사람들로부터 바보 온달이라고 불렸다.

그러다가 어린 시절 울기를 잘해 바보 온달에게나 시집을 보내야겠다던

평강왕(일명 평원왕)의 놀림을 진실로 믿고 온달과의 결합을 고집하다 쫓겨난

평강왕의 공주를 처로 맞아들이면서 온달장군의 전설은 시작된다.

 

 

 

 

고구려에는 매년 33일 군신(君臣) 5부의 병사 등이 낙랑(樂浪)의 언덕에서

사냥한 노획물로 천신(天神)과 산천신(山川神)에게 제사하는 국가적인 대제전이 있었다.

온달은 여기에 공주가 기른 말을 타고 참여해 공주로부터 배운 무예실력을 바탕으로

사냥 솜씨를 발휘해 왕의 눈길을 받게 되어 부마로서 자리를 눈도장 받게 된다.

 

그 뒤, 북주(北周) 무제(武帝)군대의 요동 침입 때 고구려군의 선봉으로 북주군을 격퇴하는 대공을 세워

비로소 국왕의 사위임을 공인받고 대형(大兄)이라는 관위를 받음으로써

점차 고구려 지배세력 내에서 두각을 드러내게 되었다.

 

590년 영양왕이 즉위하자, 신라에게 빼앗긴 한강유역 탈환을 위한 군사의 출정에 자원해서 참전했으나

아단성(阿旦城) 전투에서 화살에 맞아 전사하였다. 아단성은 지금의 아차산성(峨嵯山城)이다.

이와 같이 삼국사기에 전해지고 있는 온달의 일대기는 설화적인 색채를 강하게 지닌다.

 

 

 

 

 

그러나 벽화고분을 제외하고는 고구려 자체의 자료가 거의 전해지지 않는

 6세기단계의 고구려사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로서 여러 가지 각도에서의 검토가 요청된다.

그의 출신은 고구려 최고지배세력에 속하지는 않았다고 생각되어 왕족과의 통혼권 밖에 존재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그가 평강왕의 공주와 혼인할 수 있었고, 나아가 국왕의 측근세력으로서의 자기위치를

신장시켜나갈 수 있었다는 사실은, 그 당시 고구려 귀족세력간의 다툼으로 인해

고구려 지배질서에 상당한 변화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여겨진다.

 

 

 

 

온달설화는 한낱 평민에서 부마에 오르고 무장으로 이름을 떨친 온달장군의 인물설화이며,

역사상 실존인물을 다룬 역사 설화라고도 할 수 있다.

대개의 영웅전설이 그렇듯 온달장군의 이야기도 그의 죽음으로써 이야기의 결말을 맺는다.

 

이 설화의 의미는 유기적인 대립구조로 형상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바보온달과 울보공주에 대한 표면적 인식의 한계가 온달장군과 주체적 삶을 실현한 공주에 의해 극복됨으로써

기존질서의 허위를 비판하고 근대적인 민중의식과 여성의식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민중적 역사의식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