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련사의 전설따라(2/3) 강화 적석사

2014. 10. 25. 22:40국내 명산과 사찰

 

 

 

 

오련사의 전설따라(2/3)  강화 적석사

강화 오련사의 전설을 따라 두 번째 방문한 곳은 적석사(積石寺)다.

적석사의 옛 이름이 적연사(赤蓮寺)다. 적(赤)이 붉은 적(赤)자라서 화재가 많아 적석사로 바꾸었다고 한다.

날이 맑았다면 그 유명하다는 적석사 낙조대의 일몰을 보고 싶었지만 오후에 비소식도 있고 날도 흐려 다음 기회로 미루고

이번 길은 그 날을 위해 답사 차 들리는 것으로 만족했다.

적석사의 정확한 위치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내가면 고천리 산74>에 위치하며 조계종 직할교구 조계사말사에 속한다.

강화읍에서 서문삼거리를 지나 고비고개를 넘어오면 우측에 적연사 이정표가 붙어 있다.

여기서부터 고천리가 시작되는 데 고천리에서 적연사까지는 상당히 가파른 고개다.

눈비가 내릴 때는 승용차로 오르기는 다소 무리라 생각된다.

적석사 바로 입구에 넓은 주차장이 있어 절 입구까지 승용차로 오를 수 있다.

적석사의 내역은 적석사 대웅전 상량문에 자세히 나와 있어 이로 대신한다.

 

 

 

 

<한글 상량문고려산 적석사 대웅전 상량문>

명산 선승(選勝)을 합하여 적석사(積石寺)가 있으니

고구려 장수왕4(서기416)年 천축조사(天竺祖師)가 고려산 정상 오련지에 임하시어 다섯송이의 연화를 공중에 날리시고

그 중 적연(赤蓮)이 떨어진 낙조봉아래 터를 잡아 적연사(赤蓮寺)를 창건하시니 오늘날 적석사(積石寺)의 옛 이름이다.

 

 

 

 

조선 숙종 때 세워진 적석사 사적비와 구한말에 제작된 <전등본말사지(傳燈本末寺誌)> 및 <강도지(江都誌)>에 의하면

고려시대에는 장경도감이 설치 된 선원사에서 판각된 장경판을 옮겨 보관하기도 했으며

조선 선조 임금의 첫째따님이신 정명공주가 폭군 광해를 피하여 이곳에 머물기도 했고

적석사 소유의 전답이 강화 전 지역에 분포되어 있었 던 점으로 보아 사세가 융성했었음을 짐작케 한다.

조선조 중종39(서기1544)년에 중수의 기록이 있으며 선조26(서기1539)년에는 묘정스님과

인조12(서기1634)년 계현, 삼창 스님, 숙종31(서기1705)년 학균, 보익, 승감스님에 의하여 중수되었으나

서기1911년경 당시 육군참령이었던 강화 진위대장 이동휘가 미국선교사인 벙커, 기독교 목사인 박능일과 담합하여

사립학교를 세운다는 명분으로 적석사 제산을 강제 몰수함으로서 사세가 기울어 폐사의 지경에 이르렀다.

근대에 이르러서는 기미(서기1919)년에 박남하스님이 대법당을 훼철(毁撤)하였고

석담스님 대에까지 근근이 명맥만 유지해 오다가 1984년 도암스님이 대웅전(大雄殿)을 지었다.

 

 

 

 

1997년 현 선암스님이 주지로 부임하였으며

1998년 8월 대홍수로 인하여 진입로가 끊어지고 대웅전을 비롯하여 요사2동이 유실되는 피해를 입었다.

1999년에 진입로 확포장과 축대를 새로 축조하였고 낙조대(落照臺)와 산신각(山神閣)을 정비하였으며

서기2000년에는 범종루(梵鐘樓)를 신축하고 2002년에는 적석사사적비가 지방유형문화재 38호로 지정 등록되었으며

동년 1월에는 관음굴(觀音窟)을 신축 사십이수관세음보살상(四十二手觀音菩薩像)을 봉안했고

2003년에는 비각(碑閣)을 신축했다.

 

 

 

 

이제 해동제일기도도량의 대웅전을 복원하려 함에

신심 있는 단월과 주지 선암스님 원력으로 목제를 구하여 불사를 일으키어 먹줄을 놓아 도끼질 톱질 모두 정성을 다 하니

외칠포 내구포의 웅장함이 드러남에 큰 대들보를 올리며 장노의 송가를 본받는다.

 

 

 

 

어영차 들보를 동쪽으로 들어 올린다.

약사여래 서기광체 어둠뚫고 밝았구나.

무량중생 생사고통 법약으로 쾌유토다.

어영차 들보를 서쪽으로 들어 올린다.

구품연대 아미타불 진심으로 십념하면

왕생정토 이룩하여 안락화평 누리리라.

어영차 들보를 남쪽으로 들어 올린다.

보승여래 환희국토 풍월이 한가로워

선제동자 남순길에 일백성이 짧도다.

어영차 들보를 북쪽으로 들어 올린다.

대천세계 무우국토 이룩하니

태평가 한 곡조를 누구나가 부르도다.

어영차 들보를 위로 들어 올린다.

도솔천 내원궁에 미륵보살 앉았으니

아침향 저녁촛불 공양 올려 우러르다.

어영차 들보를 아래로 들어 내린다.

 

 

 

 

길지의 기도도량 적석사 대웅전은

무량세계 무량중생 제도의 터전이다.

 

도량 한 켠의 염화미소는 오가는 이의 발길을 붙잡아 명상과 휴식을 제공하고

감로정에 넘처나는 맑은 물은 세사의 길흉을 점지하나니

이는 갈등과 불화를 보듬어 정화키 위함이로다.

엎드려 원하옵나니 관음굴 위에 우뚝 솟은 대웅전의 위웅과 관음굴의 사십이수관음보살의 위신력 으로

상구보리 하화중생케 하옵시며 삼월과 구월에 행하는 방생기도와 매월 마지막 주 토요일 철야기도의 정진력은

부처님 가피의 근원이 되게 하옵소서…

이에 더하여 칠천만 민족이 하나 되어 평화통일의 밑 걸음이 되게 하옵소서...

그리고 후인들은 이 가람을 더욱 보호하고 용맹정진 하여 불국토 건설에 매진할지어다.

(대웅전 상량문 끝> 

 

 

 

@위의 천축조사의 天竺(천축)이란 말은 인도의 古名이다. 서역기에 의하면 「天竺이란 말에는 異議(이의)가 분분하다.

옛날에는 신독(身毒), 현두(賢豆)라 하였으나 지금 正言에 따르면 인도라 함이 옳다.」라 하였고,

현응음의(玄應音義)에 「竺은 지금은 독(篤)이라 한다. 신독(身毒), 현두(賢豆)란 틀린 말이며 바른 말은 印度이다.

인도는 달의 이름이다. 당나라 말로는 월(月)이라 하니 달은 천개의 이름이 있는데 이것은 그 중 하나이다.

진실로 저 땅에는 聖賢(성현)이 계속 이어져서 숱한 중생을 인도하여 깨우쳐주고 사방을 비추어 주기를 달처럼 한다하여

그로 인해 이렇게 이름을 붙였다.」라고 했다.

一說에 의하면 賢豆(현두)의 본명은 인다라바타나(因陀羅婆他那)다,

번역하여 주처(主處)라 하며 天帝(천제)를 말한다.」고 했다.

 

 

 

 

 

 

범종각

 

 

 

 

 

 

 

 

대웅전 앞 마당에 서 있는 연리지 같은 부부목(夫婦木)

 

 

부부목 좌측나무에 얼굴형 조형물이 하나 설치되어 있다. 무슨 의미일까 곰곰히 생각하다

뿌리까지 일견하니 그 의미를 알겠다. 

 

 

만세 부르는 나신의 여인상. 참 격조 높은 혜안(慧眼)이라 할까(?)

 

 

 

 

 

 

 

 

 

 

 

 

 

 

 

 

 

 

 

 

관음굴이다. 목조 42수관음보살을 모시고 있다.

 

@관세음(觀世音)보살은 범어 아발로키데스발라 (Avalokitesvara)이다. 이는 관자재(觀自在), 광세음(光世音) , 관세자재(觀世自在),

관세음자재(觀世音自在), 관음(觀音)으로 불린다. 대자대비(大慈大悲)를 근본서원으로 하는 보살의 이름이다.

大慈大悲하여 중생이 괴로울 때 그 이름을 외우면 그 음성을 듣고 구제한다고 한다.

<무량수경(無量壽經)>을 보면 이 보살은 극락정토에서 아미타불의 협시(挾侍)로서 부처의 교화를 돕는다고 한다.

고려산은 극락을 상징한다. 서방 극랑의 아미타불의 주처로 상징되는 고려산에 그 협시불인 관음을 그래서 여기에 모신 모양이다.

관세음(觀世音)은 세간(世間)의 음성을 관(觀)한다는 뜻이고,

관자재(觀自在)라 함은 지혜로 관조함으로 자재한 묘과(妙果)를 얻는다는 뜻이다.

또 중생에게 온갖 두려움이 없는 무외심(無畏心)을 베푼다는 뜻으로 시무외자(施無畏者),

자비를 위주로 하는 뜻으로 대비성자(大悲聖者), 세상을 구제함으로 구제대사(救世大師)라고도 한다.

 

 

 

 

이 보살이 세상을 교화함에는 중생의 근기에 맞추어 여러 가지 형태로 나나난다.

이를 보문시현(普門示現)이라 하며 삼십삼신(三十三身)이 있다고 한다.

왼 손에 든 연꽃은 중생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불성(佛性)을 나타내며,

그 꽃이 핀 것은 불성(佛性)이 드러나서 성불한 것을 뜻하고 그 봉우리는 佛性이 번뇌에 물들지 않고 장차 필 것을 나타낸다.

그 형상을 달리함에 따라 육관음(六觀音) 즉 성(聖), 천수(千手), 마두(馬頭), 십일면(十一面),

준제(準提), 여의륜(如意輪) 등으로 나누는데 그 중 성(聖)관음이 본신이고 기타의 것은 보문시현의 變化身(변화신)이다.

관음보살이 머무는 淨土(정토)를 보타락가(補陀洛迦 potalata)라 하며

중국에서는 절강성(浙江省)의 주산도(舟山島)를 보타락이라 한다.

 

 

 

 

@천개의 눈과 손을 가진 관음을 천수천안대비관음보살(千手千眼大悲觀音菩薩)이라 하며 이를 줄여 부를 때 천수관음이라고 한다.

탱화로 모실 때에는 1000개의 손과 눈을 그리지만 조각상으로 모실 경우는 이를 묘사하기가 무리가 되어

대개 42手를 묘사하게 되는 데 이를 42수관음이라고 부른다.

42手 중 합장한 본래의 두 손을 뺀 40手의 각각 手는 25有의 중생을 제도함으로 40x25=1000이 된다.

25有는 욕계의 지옥에서 무색계(無色界)의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까지의 육도중생을 25유로 분류한 것을 의미한다.

천수관음의 손에 든 각각의 지물(持物)은 중생들의 갖가지 원(願)을 성취해 주기 위한 용구들이다.

 

 

관음굴 안에는 법화경을 필사히여 12지별로 나열하여 병풍을 만들어 놓았다.

띠 하나 앞에 9번씩 절을 하면 모두 108번이 된다.

업장소멸을 암시하는 가 보다.

 

 

대웅전 옆에 불유각이 있다.

 

 

 

 

법당 옆에 있는  불유각(佛乳閣)은 영험한 우물로 감로정이라 부른다.

예로부터 나라의 변란을 예고해온 영험한 우물로 알려져 있다.

나라에 큰 어려움이 닥치기 전 물이 흐려진다고 전한다.

실제로 서해교전이 있기 전인 2002년 6월 29일에는 느닷없이 붉은 물이 나왔다고 한다.

 

 

 

 

 

 

 

 

 

불유각 옆에 작은 연못을 만들어 놓았다. 제철이 아니건만 신기하게도 적연화 한 송이가 곱게 피여 있었다.

 

 

 

 

 

 

 

                                                           

                                낙조대 보타전 가는 길이다. 20여분 이 돌계단으로 오르면 낙조대 보타전이다.  

 

 

 

 

 

 

 

 

 

 

                              가운데 뽀쪽한 산이 혈구산이다. 좌측에 국화저수지도 보인다. 날이 흐려 조망이 별로다.

 

 

 

 

 

                           낙조봉에서 망원으로 잡아 본 고려산 정상의 군부태, 날이 흐려 너무 흐리다.

                                         다음 코스 백연사를 가기위해 여기서 하산했다.

 

 

     이 소나무가 용머리 솔이라고 한다. 솔나무 가지 사이로 해가 걸리면 마치 용이 여의주를 물고 있는 것과 같이 보인다고 한다.

 

 

하산하면서 내려다 본 삼성각

 

 

삼성각 뒤편은 벽이 없이 암벽을 그대로 벽으로 삼았다.

 

적석사로 내려와 바라 본 대웅전 앞 풍경 우측 두 그루 나무가 부부목이다.

 

대웅전 좌측은 관음굴이고, 우측은 불유각이다.

 

 

 

 

적석사 바로 아래에 있는 찻집이다. 점식을 냉수로 달랬더니 너무 출출하다.

찻집 매뉴를 보니 쑥송편을 팔기에 요기할 냥으로 들어가 보았다.

나온 쑥 송편을 먹으면서 주변을 둘러보니 아기자기한 소품들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