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9. 18. 21:12ㆍ국내 명산과 사찰
포항 내연산 보경사(寶鏡寺)
추석날 오후에 떠난 2박3일의 경주 나들이.
오고 가는 시간이 길어 여유 있게 둘러볼 시간이 없어 몇 곳만 선택하여 둘러 보왔다.
그 중 하나가 포항 내연산 보경사와 12폭포다.
긴 시간이었다. 생각해보니 어언 7년만의 재회인 셈이다.
보경사는 7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옛나 지금이나.
푸른 노송하며 세월을 머금고 서 있는 탱자나무 하며. 날은 무더웠지만 흐렸다.
내연산(內延山) 보경사(寶鏡寺)는 경주북구 송라면 보경로 523에 위치한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의 본사인 불국사의 말사다.
사명대사의 〈금당기문 金堂記文〉에 의하면 서역승 마등(摩謄)과 법란(法蘭)이
중국에 가져온 팔면경(八面鏡)을 제자인 일조선사(日照禪師)가 황해를 건너 해동 땅에 가져와
종남산 아래에 있는 연못 속에 묻고 메운 다음 그 메운 연못 위에 절을 지어 보경사라고 했다고 한다.
745년(경덕왕 4)에 철민(哲敏)이 중창하고, 1214년에는 원진국사(圓眞國師)가 승방 4동과 정문 등을 중수했다.
1677년에는 도인(道仁)이 중창을 시작하여 삼존불상과 영산전의 후불탱화를 제작했고,
1725년(영조 1)에는 성희(性熙)와 관신(寬信)이 명부전을 이건했다.
현존 당우로는 대웅전·대적광전·영산전·팔상전·명부전·산신각·천왕문·일주문 등이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원진국사비(圓眞國師碑:보물 제252호)와 보경사부도(보물 제430호)가 있으며,
이밖에 11기의 부도가 있다. <출처: 백과사전>
백과사전에는 창건자가 일조선사로 나오는 데 <보경사 홈피>에서는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신라 진평왕25년(602) 진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 온 대덕 지명법사(智明法師)가 창건한 신라의 고찰이다.
지명법사는 왕에게 진나라에서 유학할 때 어떤 도인으로부터 팔면보경(八面寶鏡) 거울하나를 전수받았는데
이를 명산에 묻고 그기에 불당(佛堂)을 세우면 외적의 침입을 막을 수 있고 더 나아가 삼국통일을 이룩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왕이 이 말을 듣고 기뻐하여 지명대사를 대동하고 동해안을 거슬러 올라 가다가 해아현(海阿縣) 증남산 아래에 큰 연못을 발견하고
그 연못에 팔면보경을 묻고 연못을 메운 뒤 그 위에 금당(金堂)을 건립한 뒤 보경사라 이름했다.
그뒤 고려 고종 때 원진국사를 비롯하여 많은 고승들이 중창을 거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 당우로는 일주문, 해탈문, 천왕문, 산신각, 명부전, 팔산전, 영산전, 대적광전, 대웅전이 있으며,
중요문화재로는 원진국사비(보물제 252호), 원진국사부도(보물제430호), 서운암동종(보물제11-1호),
보경사괘불탱(보물제1609호) 등이 있다. 』
@<삼국사기 해동고승전>에 따르면 지명(智明)대사는 신라의 고승으로 진평왕7년(585년) 진나라에 가서 불교를 연구했고,
602년에 귀국하여 대덕(大德)에 이어 대대덕(大大德)이 되었던 분으로 신라 최초로 계율을 배운 승이라고 한다.
@대덕(大德)이란 말은 신라 때 승려를 높이어 부르던 말이다.
대덕으로는 의안대덕(義安大德), 국교대덕(國敎大德)등이 있었다.
참고로 고려 때의 법계(法階)로는 승과(僧科)에 급제하면 대선(大選)이 되고,
이어 대덕(大德), 대사(大師), 중대사(重大師), 삼중대사(三重大師)로 승진하였다.
@2000년 판 한국사대사전에 의하면
『경북 영일군 송라면에 있는 절. 신라 67년(탈해왕11년) 서역의 마등(摩騰)과 축법란(竺法蘭)이
중국에 건너올 때 가져 온 12면경을 우리나라에 보내와 연못에 묻고 절을 세우고 보경사라 했다.
사명당의 <금당기>에 기록이 있다. 확실한 건국시기는 미상』이라고 했다.
팔면경이든 12면경이든 이를 연못에 묻고 그 위에 금당을 세운 것은 일치하는데
왜 하필 거울을 묻었는지, 그 거울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어느 기록도 밝히지 않고 있다.
추측컨대 거울은 반야의 지혜를 상징하고
금당을 세운 것은 부처의 반야의 지혜를 널리 비추라는 의미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후한서(後漢書) 서역전(西域傳)에 의하면
축법란 [竺法蘭, ?~?]은 중국 후한(後漢)시대에 처음으로 중국에 불교를 전한
중인도 대월지국(大月氏國)의 승려로 역경가(譯經家)로 알려진 분이다.
<서역전>에 따르면 동한 명제 영평 연간에 명제가 꿈속에 금인(金人)을 보고
천축의 승을 초대한 것이 바로 마등과 축법란이라고 했다.
후한 영명10년(67년) 가섭마등과 축법란이 명제의 요청으로 낙양에 오자 명종은 그들을 위해 절을 지었는데
이절이 중국에서 지어진 최초의 사찰인 낙양의 백마사(白馬寺)다.
백마사라 이름한 것은 축법란이 낙양에 올 때 백마(白馬)에 불경(佛經)을 싣고 왔기 때문이다.
축법란과 마등은 백마사(白馬寺)에서 10여년을 머물면서 전법활동과 불경 번역을 시작하였다.
중국에서의 사찰건립과 역경(譯經)은 이들로부터 비롯되었다.
이때 번역된 최초의 불경번역이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바로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이다.
연이어 《불본행집경(佛本行集經)》등 5부의 경전을 한역(漢譯)하였고,
축법란은 마등이 죽은 후에도 역경에 주력하다가 60여세에 타계했다고 전한다.
처음 보경사를 찾을 때나 지금이나 내 눈길을 끄는 것은 단연 일주물에서 천왕문까지 이어지는 솔나무들이다.
천왕문
천왕문에서 바라 본 오층석탑과 적광전
범종각
범종가 귀모습
보경사 오층석탑과 적광전, 적광전은 비로자나불을 모시는 전각이다.
법당 내부 전경
비로자나불 뒤 탱화와 적광전의 닷집이 4마리 용으로 장식된 것이 이채롭다.
수령 300년이 넘는다는 노송, 7년전 보았던 옛 모습 그대로다.
@원진국사비(圓眞國師碑)
보경사에 있는 고려 중기의 승려 원진국사의 탑비이다.
원진국사(1171∼1221)는 13세에 승려가 되어 명산을 두루 돌아다니며 수도를 하기도 하였고,
왕의 부름으로 보경사의 주지가 되었다.
51세로 입적하자 고종은 그를 국사(國師)로 예우하고, 시호를 ‘원진’이라 내리었다.
비는 거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운 간결한 모습으로, 비몸 윗부분의 양 끝을 접듯이 잘라 놓았는데,
이러한 모습은 당시에 유행하던 양식이다.
넓다란 바닥돌과 하나의 돌로 이루어진 거북받침돌은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머리를 하고 있다.
등에는 6각형의 무늬마다 ‘왕(王)’자를 질서정연하게 새겨놓았으며,
등 중앙에는 연꽃을 둘러 새긴 네모난 받침대를 조각하여 비몸을 끼워두게 하였다.
비몸의 둘레에는 덩굴무늬가 장식되어 있는데 이 역시 고려 중기의 특색이라 할 수 있다.
비문에는 원진국사의 생애와 행적이 기록되어 있으며,
글은 당시의 문신이었던 이공로가 지었고, 김효인이 글씨를 썼다.
비문에 의하면, 비가 완성된 것은 고종 11년(1224)으로 원진이 입적한 지 3년 후의 일이다.
@이 비는 이수(비머리)가 없고 비신(碑身)의 상단(上端) 양끝을 귀접이한 규수형(圭首形)을 하고 있다.
귀부(龜跌)와 대석(臺石)은 한 개의 돌로 되어 있고
귀두(龜頭)는 여의주(如意珠)를 물고 있는 용두화(龍頭化)된 것이며,
귀갑(龜甲)은 6각형의 갑문(甲紋)내에 '왕(王)'자를 질서정연하게 새겼고
비좌(碑座)는 단엽(單葉) 44개의 연판(蓮瓣)을 장식하고 그 위에 비신(碑身)을 얹었다.
비신의 상단에는 '원진국사비명(圓眞國師碑銘)'이라고 전자체(篆字體)로 횡서(橫書)하였으며
비문(碑文)은
"고려국보경사주지대선사증시(高麗國寶鏡寺住持大禪師贈諡) 원진국사비명병서(圓眞國師碑銘병序)"로 시작되고 있다.
특히 비석의 둘레에는 당초문양(唐草紋樣)의 독특한 장식법을 쓰고 있고
또한 고려(高麗) 중기(中期) 이후부터 나타나는 비석의 상단 양끝을 귀접이한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이와 유사한 비석은 보광사 중창비(重創碑), 억정사 대지국사비 등에서 볼 수 있다.
원진국사는 고려 중기의 고승(高僧)으로 속성(俗姓)은 신씨(申氏)이며
이름은 휘(諱)이고 13세 때 계(戒)를 받았으며 51세 때 입적(入寂)하였다.
대웅전 뒤편에 한 일자 형으로 팔상전, 산령각, 원진각, 영산전이 나열되어 있다.
팔상전
산령각
원진각
수령이 400년 넘는다고 한다.
수월당
보경사 승탑
보경사 뒷산의 중턱에 서 있는 묘탑으로, 원진국사의 사리를 모셔두고 있다.
원진국사 신승형(申承逈)은 고려 중기의 승려로, 51세에 입적하자 고종이 그를 국사로 추증하고 ‘원진’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기단부(基壇部)의 아래·중간·윗받침돌 가운데 3단으로 이루어진 8각 아래받침돌은 맨윗단에만 연꽃조각이 둘러져 있다.
중간받침돌은 8각의 모서리마다 기둥모양의 조각을 새겨두었다. 윗받침돌에는 솟은 연꽃무늬를 새겼는데,
꽃잎의 끝이 뾰족하고 중앙의 세로선이 볼록하게 돌출되어 당시로서는 드문 모습이다.
탑신(塔身)은 몸돌이 매우 높아 마치 돌기둥처럼 보이며, 한 면에만 자물쇠모양을 새겨놓았다.
지붕돌은 낙수면의 경사가 느리고, 모서리에서 뻗어나가는 곡선의 끝마다 꽃장식이 조그맣게 솟아있다.
처마의 곡선은 양쪽 끝에서 가볍게 들려있고, 추녀는 두터워 보인다.
지붕돌 위의 머리장식으로는 활짝 핀 연꽃받침 위에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을 올리고,
연꽃조각이 새겨진 돌을 놓은 다음,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를 얹어서 마무리 하였는데
보존이 잘 되어 원래의 모습을 잘 알 수 있다. 전체적으로 8각형을 기본으로 삼고 있으나,
몸돌이 지나치게 길어 전체가 길쭉해 보이며 너비도 좁아 안정감이 적다.
각 부분의 조각에도 생략이 많아 단순한 감이 들고 밋밋하다.<출처:문화재청 홈피>
일주문 뒤 모습, 단청이 요란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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