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위(無爲)와 무소유(無所有)의 삶

2009. 9. 2. 07:45붓다의 향기

 

(관악산 삿갓승군바위) 

 

무위(無爲)와 무소유(無所有)의 삶

 

부처님은 이런 가르침을 남기셨다.

『물질을 사랑하고 즐겨하는 것은 곧 괴로움을 사랑하고 즐거워하는 것이요,

괴로움을 사랑하고 즐겨하면 곧 괴로움에서 해탈하지 못하게 되느니라.

이와 같이 느낌, 생각, 지어감, 의식을 사랑하고 즐겨하는 것은 곧 괴로움을 사랑하고 즐겨하는 것이요,

괴로움을 사랑하고 즐겨하면 곧 괴로움에서 해탈하지 못하게 되느니라.』

<잡아함/과거무상경>

 

그리고 또 <법구경>에 이르시길,

 

『탐욕 속에 살면서 탐욕이 없음이여

내 삶은 더없이 소박하여라.

사람들이 탐욕으로 밤낮을 모를 때에

나만이라도, 나 혼자만이라도

이 탐욕으로부터 멀리 벗어나 있자.

여기 영원한 내 소유는 없지만

그러나 생의 이 기쁨을 만끽하라.

생의 이 기쁨 속에서

빛, 그 자체가 되어 살아가라』<법구경199/200>

 

이는 무소유의 삶을 말씀하시고 그 기쁨을 말씀하신 것이다.

노자의 <도덕경>에도 이른 말이 있다.

『아름다운 색채는 사람의 눈을 현란케 한다. 아름다운 음악은 사람의 귀를 어지럽게 한다.

맛있는 음식은 사람의 입을 버려 놓는다. 말을 달리고 사냥하는 일은 사람의 마음을 열광시킨다.

얻기 어려운 보배는 사람의 행동을 정상에서 벗어나게 한다.

그러기에 성인은 백성을 먹고살게는 해 주지만 감각의 만족을 추구하게 방일하지 않는다.

그럼으로 사람은 마땅히 저것을 떠나 이것을 취해야 한다.』

 

우리 중생의 삶은 쾌락을 쫓아 살아가는 삶이다. 그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그래서 부처님은 무소유의 삶을, 노자는 무위(無爲)의 삶을 이야기하셨다.

둘은 무엇이 같고 또 무엇이 다른가? 욕망과 집착을 버린다는 점에서는 둘은 같다.

그런데 노자는 자연스러움을 말했고, 부처님은 자각을 암시하고 있다.

무소유는 자각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자연스러움은 자각 없이 성취되지 않는다.

 그러고 자각은 자연스러워지지 않으면 성취되지 않는다. 인위적이면 자연스러움이 없어진다.

자연스러움이 없어지면 자각은 성취되지 않는다. 다만 노자는 무위를 말했고,

부처님은 무소유의 행복을 말했다. 그런 점에서 둘은 같으면서 다르다.

진실로 삶에 접근하는 것은 자각이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이 명백한 문제들을 자각하는 일이다.

 그것은 어떤 형이상학적인 것이 아니다. 명백하고 분명한 이 현실에서의 일어나는 일이다.

그것은 신비한 것도 혼란스러운 것도 아니다.

집착을 버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불타의 마지막 유촉도 바로 이 명백한 것에서

깨달음을 구하는 것이 진리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지금, 바로 여기에> 존재하는 그대 자신을.

 

우리의 진정한 행복은 무위와 무소유의 행복을 자각하는 데 있다.

왜냐하면 인위적이고 소유를 향한 마음은 갈등과 경쟁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사계절이 돌아가듯 자연은 인위적인 순서가 없다. 겨울이 싫다고 여름이 먼저 오지 않고,

 가을이 서글프다고 봄이 먼저 오지 않는다. 계절의 흐름은 무엇을 내세우지 않고 소유하지 않는다.

 참 마음이 흘러가는 곳에 인위적인 것이 개입되지 않는다면, 욕망과 소유가 개입되지 않는다면 자연스러워진다.

그것이 무위요, 무소유의 행복이 된다. 금강경에서 이르는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의 삶이다.

무소유로 살면서 마음을 낸다는 말은 이 말이다.

그것은 공(空)을 체득한 삶이다.

 

(불암산바위) 

노자의 <도덕경>에 또 이른 말이 있다.

『수레바퀴의 구조는 서른 개의 바퀴살이 한 개의 속바퀴에 모여 있으나

그 속바퀴는 구멍(無) 속에서 바퀴가 회전하는 작용이 일어난다.

진흙을 이겨서 그릇을 만드는 경우에도 그 빈 곳(無)이 그릇으로서 구실을 한다.

문이나 창을 내고 방을 만드는 경우에도 그 비어 있는 부분이 방으로서 이용된다.

그럼으로 유(有)가 어떤 구실을 하는 것은

무(無)가 작용하는 까닭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경쟁사회다. 이 경쟁 사회는 유(有)를 찾게 된다.

유(有)란 가시적(可視的)이고, 실리적이고 이해관계에 밝은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재산이 있어야 하고, 똑똑해야 하고, 학벌도 좋고 가문도 좋아야 한다.

그리고 잘생기고, 재주와 임기응변에 뛰어나야 한다.

그런데 노자는 이와는 동떨어진 이야기를 하고 있다.

 

요즘은 구직난에다, 유명인사들의 자식들 명역기피문제로 세상이 떠들썩해서 그런지

젊은이들이 군에 입대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부분 부모들은 자식들을 군대에 보내기를 두려워했고,

자식들도 입대하는 것을 싫어했다. 그래서 징집을 면하려고 갖은 수단을 다 부리는 바람에

갖가지 사회적 부작용을 낳았든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여기 재미난 이야기 있다.

 

노자가 어느 마을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 마을의 모든 젊은이들이 징병되었다.

길에서 유유히 한가한 꼽추를 만나게 되었다. 노자 말했다.

『가서 물어 보라. 어째서 이 사람이 군대에 징병되지 않았는지?』 그 꼽추가 말했다.

『내가 어떻게 징병될 수 있겠습니까? 보시다시피 나는 꼽추입니다. 나는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제자들이 돌아오자 노자가 말했다.

『기억하라. 이 꼽추와 같이 되라.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전쟁터에서

무의미하게 죽을 것이다. 쓸모없이 되라.』

 

남들보다 더 빨리, 더 높이 출세하고자 안달하고 있는 그대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논리를 노자는 말하고 있다.

그는 말한다. 『꼴찌가 되라. 마치 존재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행동하라.

 알려지지 않은 채로 남아 있어라. 첫째가 되려고 하지 말라.

그렇다면 그대는 투쟁 속에 살아야 한다. 경쟁하지 마라.

그대의 가치를 증명하려고 하지 말라. 아무 필요도 없는 일이다.

쓸모없이 남아서 그저 즐겨라.』

 

물론 이런 말은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현실감각과 비교해 볼 때 분명 비실제적이다.

심한 사람들은 혹시 정신병자의 소리라 아닌가 하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노자의 이 말을 이해한다면 더 깊은 측면에서는

그가 가장 실제적이라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심층에서… 삶은 즐기는 것이며, 찬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삶은 수단이 될 수 없다. 삶은 시장의 상품과 같은 것이 아니다.

 삶이란 시(詩)와 같은 것이다. 삶은 시와 같고 노래와 같고 춤과 같으며

길가에 피는 꽃과 같은 것이다.

특별히 누구를 위하여 꽃피지 않고 목적지도 없이

그 향기를 바람에 날려 보내며

특별히 어느 누구도 아닌 채 오로지 그 자신이 그 자신임을 즐기는 것이다.

 

그대가 세상살이에 매우 똑똑하게 군다면 그대는 이용되어질 것이다. 여러 곳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쇄도할 것이다.

그리고 출세라는 미명아래 혹사당할 것이다. 아름다운 여인을 뭇 사내들이 가만히 두지 않듯이,

그대가 재주가 있고 총명하고 실제적으로 움직인다면

어느 곳에선가 마찬가지로 그대는 이용되고 혹사당할 것이다.

 미인박명(美人薄命)이요, 재주 있는 사람은 단명 한다는 말처럼 이 세상에는 그런 사람들을,

그리고 실제적인 사람을 홀로 내버려두지 않기 때문이다.

 똑똑하고 민첩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고요한 삶을 즐길 기회를 갖지도 못하고 그렇게 되지도 않는다.

그럼으로 모든 생각들을 버려야 한다. 시(詩)가 되고 싶다면,

 행복의 숲을 거닐고 싶다면 실용성에 대해서는 잊어 버려야 한다.

그대 자신으로 진실하게 남아야 한다. 그대 자신이 되어야 한다.

그대 자신이 되어 그대 자신의 일을 해야 한다. 그

리고 다른 사람의 일에 대해서는 간섭할 필요도 없다.

그대는 물건과 같이 팔려지기 위해서 이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으로 실용성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오직 그대의 행복만을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기뻐하라. 그리고 그 기쁨에서 무엇인가가 흘러나온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그리고 그것을 나누어 가지는 마음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대 스스로 유용한 것이 되려고 자신에게 강요해서는 아니 된다.

작금에 유행하는 자살이라는 것도

스스로에게 강요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남이 그대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그대가 그대 자신을 죽이는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지식인들, 그리고 선생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보다 더 실제적이다. 그들이 그렇게 많은 호소력을 가지는 이유가 그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거대한 조직을 가지고 있는 이유가 그것이다.

오늘날 세계의 종교라 일컫는 기독교를 보라. 얼마나 조직적이고 방대한가?

그뿐만 아니라 오늘날 갖가지 집단 그리고 종교들은 햄버거가계들이 전 세계를 누비듯

세계도처에 지점을 거느리고 있지 않는가?

그러나 깨닫는 자는 홀로 서 있다. 저기 멀리 떨어져 홀로 서있다.

깨달음을 얻은 자는 고독한 존재로 있는 것이다.

 

무위와 무소유를 깨닫는 자는 희귀하고 독특해 진다.

그대가 이를 이해한다면 그대도 희귀하고 독특하게 될 수 있다.

그 방법은 그저 평범하면 되는 것이다. 그때 그대는 비범하게 될 것이다.

모든 일에 꼴지가 되는 것이다. 그때 그대는 갑자기 그대가 첫째라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그 무엇도 바라지 않는 것이다. 명예를 바라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아무도 그대에게서 명예를 빼앗아가지 않는다.

 비존재로 사는 것이다.

아무도 아닌 사람으로 살아 간다는 것, 그 자각이 중요하다.

그러면 미묘하고 신비스럽게 오직 그대만이 그 어떤 사람이 되는 것이다.

 

(삼악산의 솔) 

노자에 대한 또 다른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노자가 제자들과 함께 여행을 하다가 수백 명의 목수들이 나무를 자르고 있는 어느 숲을 지나가게 되었다.

 그 당시 나라에서 거대한 궁전을 짓고 있었다.

숲은 전부 잘려지고 오직 한 나무만이, 수천 개의 가지를 지닌 커다란 나무 한그루만이 거기에 서 있었다.

그것은 너무도 컸기 때문에 수백 명의 사람이 그 나무 그늘 아래에 앉을 수 있었다.

노자는 그의 제자들을 시켜 왜 숲 전체가 다 베어졌는데 오직 그 나무만이 베어지지 않았는지를 알아보게 했다.

 제자들이 목수들에게 물었다.

『어째서 이 나무는 베지 않았습니까?』

『 이 나무는 전혀 쓸모가 없습니다. 이 나무로는 아무 것도 만들 수가 없습니다.

가지에 옹이에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어느 부분도 쓸 수가 없어요.

그것으로는 기둥을 만들 수도, 가구도 만들 수도 없습니다.

땔감으로도 쓸 수가 없지요. 연기가 눈에 해롭기 때문입니다. 그 연기를 쐬면 눈을 거의 멀게 됩니다.

이 나무는 완전히 쓸모가 없습니다. 그것이 이유입니다.』

제자들은 돌아왔다. 노자가 웃으면서 말했다.

『이 나무와 같이 되어라. 이 세상에서 살아남고 싶다면 이 나무와 같이 되어라.

완전히 쓸모없이 되라. 그러면 아무도 그대를 해치지 않을 것이다.

 그대가 쓸모가 있다면 그대는 잘려 질 것이고, 어떤 사람의 가구로 만들어질 것이다.

이 나무와 같이 완전히 쓸모없이 되라. 그러면 아무도 그대를 해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대는 커다랗게 자라서 수천 명의 사람들이 그대 밑에서 그늘을 찾게 될 것이다.』

 

우리가 행복을 찾지만 그 행복은

유용성이나 실용성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다.

남들과 경쟁에서 이긴다고 해서,

남들보다 독특한 개성미로 빨리 출세한다고 해서 행복해 지는 것은 아니다.

경쟁은 또 다른 경쟁을 낳고, 출세는 더 높은 곳으로 다시 욕망의 바람에 얹혀 실려 가게 된다.

마지막으로 찾아야 할 것은 그대 마음의 진정한 행복이지,

욕망성취로 얻어지는 그런 거짓된 행복이 아니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은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을 것이다.

『산이 있기에 산을 오른다.』 맞는 말이다.

삶도 마찬가지다. 그대의 욕망이 있기에, 그대의 바램이 있기 때문에,

그대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대가 꿈꾸는 산을 오르는 것이다.

그러나 그대 마음에 산이 없다면 정상(頂上)이 평지가 되고, 평지가 정상이 될 것이다.

그대가 산을 오르지만 그때는 그 산이 산이 아니요, 평지를 걷지만 그 평지는 평지가 아니다.

무위와 무소유의 철학은 이를 의미하는 것이다.

무엇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경쟁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그대 마음속의 인위적인 것을 모두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으로 그저 자연스러워야 한다.

그것이 무위요, 무소유요, 교학에서 일컫는 공관(空觀)의 실천이다.

삶의 무위는, 삶의 무소유는 인위적인 모든 것을 버릴 때 성취되는 것이다.

행복이란 정상에 있는 것도, 평지에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명상음악/영혼의 피리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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