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昌德宮)

2012. 6. 28. 23:19명승지

 

창덕궁(昌德宮)

 

 

돈화문(敦化門)

 

 

 

 

돈화문(敦化門) 은 창덕궁의 정문이다. 조선 태종 12년에 처음 세워졌으며, 지금의 돈화문은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것을 선조 40년(1607년)에 재건하여 원년에 완공한 것이다. 이때의 모습이 현재까지 남아있어, 돈화문은 현존하는 궁궐 정문 가운데 가장 오래된 문으로 유일하게 정면이 5칸 규모로 되어 있다. 1963년에 보물 제383호로 지정되었다. 돈화문은 궁궐의 정문이나 창덕궁 서남쪽 모서리에 있는데, 그 이유는 산자락에 자리 잡은 창덕궁의 지리적 특수성 때문이다. 궁궐 정면에는 북악의 매봉이 연결되어 있고, 이곳에는 조선의 가장 신성한 공간인 종묘가 있어 창덕궁의 정문이 들어설 수 없었다. 또 정궁인 경복궁과 위치상 가까우며, 옛부터 대문에서 내당이 직접 보이지 않도록 배치하는 기법과도 관련이 있다.

 

 

 

원래 돈화문에는 종과 북을 매달아 날마다 정오와 인정 때에는 종을 울리고, 파루 때에는 북을 쳤다고 하나 지금은 모두 없어졌다. 지금의 돈화문 밖 모습은 옛 모습과 많이 다르다. 일제 강점기와 해방 이후에 도로가 거듭 포장되면서 우선 돈화문 월대는 그 앞을 지나는 율곡로에 막혀 있는데다, 월대 앞 지반을 높게 돋워 도로를 내는 바람에 월대는 도로면보다 낮아 마치 땅에 파묻힌 모습이다. 창덕궁과 종묘 사이를 가르는 도로는 1912년 일제가 계획하였으나, 종묘가 훼손될 것을 우려한 순종이 반대하여 건설이 미루어졌고, 순종이 세상을 떠나자 곧바로 공사가 강행되어 1932년에 도로가 났다 또 돈화문 양 옆에 궁궐 문을 지키는 관청인 수문장청이 있는 행락이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돌담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원래 궁궐에서 빠져나온 금천의 시냇물이 문 오른쪽 담장을 따라 흘러 나왔으나, 지금은 사라졌다.

 

 

 

 

 

 

 

<금천교>

금천교(禁川橋)는 태종 11년(1411년)에 세워진 것으로 조선 궁궐에 남아있는 다리 가운데 가장 오래된 돌다리이다. 금천교의 금천이란 말은 궁궐을 드나드는 관리들이 맑고 바른 마음으로 나랏일을 살피라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창경궁에 옥천이 있듯 창덕궁의 금천 이름은 금천(錦川)으로, 북영천이다. 마당 한가운데에는 어도가 돈화문을 지나 일직선으로 뻗다가 오른쪽으로 꺾여 궁궐의 두 번째 문인 진선문을 향해 나 있고 마당 가장자리에는 괴목이라 불리는 회화나무와 느티나무가 여기저기 서 있으며 이 앞을 지나면 궁궐 서북쪽에서 남쪽으로 흘러내리는 명당수를 가로지르는 금천교가 있어 진선문으로 이어진다. 금천은 풍수적인 의미로 궁궐의 배산임수를 이루며, 주술적으로는 나쁜 기운이 이 물을 건너지 못하게 하여 궁궐을 보호한다는 바람이 담겨있다. 금천교의 네 모서리에 산예(山猊)라 하여 나쁜 기운을 물리치는 동물들이 조각된 것도 금천의 이러한 상징적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돈화문 주면 마당에서 여러 전각 중 옛 건물로는 돈화문과 금호문, 금천교 정도이다. 진선문과 그 행랑, 내각과 옥당의 행랑, 어도 등은 모두 1991년 이후에 복원한 것이다.

 

 

<진선문>

돈화문 주변 마당 동쪽에 나 있는 진선문으로 들어서면 궁궐의 두 번째 마당이 나온다. 이 곳은 인정전의 바깥 행랑과 더불어 사다리꼴 모양으로 되어 있어, '인정전 외행랑 뜰'이라고도 부른다. 마당의 서쪽 행랑은 첫 번째 마당쪽으로 서향이며, 남쪽 행랑에는 내병조(內兵曺), 호위청(扈衛廳), 상서원(尙瑞院)이 있으며, 동쪽 행랑에는 배설방(排設房)이 있다. 북쪽 행랑은 모두 인정전 마당을 향하고 있으며, 남쪽 행랑의 내병조 역시 남향하고 있어 진선문 쪽에서는 벽만 보인다.

 

 

 

호위청은 궁중의 호위를 맡아보는 군영으로 인조1년(1623년)에 인조반정을 주도한 공신 세력이 정치적인 목적으로 설치하였다. 상서원은 새보, 발병부, 마패, 절부월 등 각종 증명을 관장하는 기관이었다. 배설방은 전설사에 소속된 관청으로 궐내에서 임금이 주관하는 행사 때 햇볕을 가리기 위해 치는 천막인 차일(遮日)과 휘장을 치는 일을 맡았다.

 

 

 

 

 

 

<인정문>

 

<인정문에서 바라 본 인정전>

인정문(仁政門)을 통해 인정전 마당으로 들어서면 세 단의 월대 위에 서 있는 인정전(仁政殿)이 보인다. 인정전은 태종 5년(1405년)에 창덕궁이 창건되면서 세워졌으나 몇 차례 화재가 일어나 다시 지어졌다. 지금 있는 건물은 순조 3년(1803년)에 불탄 것을 이듬해에 다시 지은 것이다.

 

<인정전>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仁政殿)은 정면 5칸, 측면 4칸의 중층 팔작지붕 건물로, 밖에서 보면 2층이지만 내부는 천장이 높아 통칸으로 트인 1층 건물이다. 인정전은 궁궐에서 으뜸되는 건물로 궁궐의 권위를 나타내는 동시에 의식을 치르는 공간이었으므로, 외관이 주는 상징성에 초점이 맞추어 크고 높고 화려하게 지었다.

 

 

 

내부에는 임금의 자리인 어좌(御座)가 있고, 그 뒤로는 임금이 다스리는 삼라만상을 상징하는 병풍인 일월오봉도가 둘러쳐 있다.어좌 위에는 보개(寶蓋)라 하여 별도의 천장을 설치하여 어좌의 공간적 차별성을 극대화하였다. 또 인정전의 천장 한가운데는 봉황을 조각하여 이곳이 임금의 공간임을 나타내고 있다. 1908년 무렵에 내부에 서양식 가구와 실내 장식이 도입되어 전돌 바닥 대신 서양식 마루를 깔았고 전등이 설치되었다. 또한 각 창과 문에는 커튼이 달려 있다 1405년 처음 지어졌다가 다시 지어졌다. 이 후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1610년 중건하였으나, 인정전의 월대를 오르는 계단 중간에는 답도(踏道)라 하여 평평한 돌에 도드라지게 문양을 새겨 장식을 하였다. 답도에는 구름 속을 나는 봉황 한 쌍이 새겨져 있다. 인정전은 월대 위에 서 있으며 봉황이 조각되어 천상의 세계로 묘사되는데, 이는 임금의 신성한 권력을 암시한다.

 

 

 

인정전 내부의 바닥은 원래 진흙으로 구운 네모난 벽돌이 깔려 있었으나 현재는 쪽마루가 깔려있다 이는 인정전에 설치된 전기, 커튼, 유리창문 등과 더불어 구한말에 들어온 서양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현재 인정전 지붕 용마루에는 구한말부터 대한제국 황실의 문장으로 쓰였던 오얏꽃 문양 다섯 개가 금동으로 용마루를 장식하고 있는데, 원래는 없던 것으로, 언제 설치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인정전 서쪽 행랑에는 향실(香室)과 내삼청(內三廳)이 있다 향실은 궁중 제사에 쓰이는 향과 축문을 담당하던 곳이다.향실이 서쪽 행랑에 있는 것은 인정전 서쪽에 제례 공간인 선원전이 있기 때문이다. 내삼청은 금군삼청(禁軍三廳)이라고도 하며, 임금을 호위하고 궁궐을 수비하던 내금위(內禁衛), 겸사복(兼司僕), 우림위(羽林衛) 삼청을 이른다. 북행랑에는 과거를 담당하는 관청으로 추정되는 관광청(觀光廳)이 있었다. 이곳에 관광청이 있는 것은 인정전 마당이 과거 시험를 보는 장소로 자주 이용되었기 때문이다. 인정전 마당에서는 주로 문과의 전시(殿試)가 거행되었고, 무과의 전시는 후원에 있는 춘당대에서 시행되었다 동행랑에는 악기고(樂器庫), 육선루(六仙樓), 서방색(書房色)이 있으나, 모두 동족을 향하고 있어 인정전 마당을 등지고 있다.

 

 

 

인정전과 인정전 마당(조정)은 의식을 위한 공간이다. 외국 사신의 접견, 신하들의 조하(朝賀), 세자 책봉식, 왕실의 큰 잔치 등이 이곳에서 열렸다.인정전 마당에서 의례를 거행할 때는 차일을 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마당에 미리 쇠고리를 묻어 두어 여기에 줄을 묶어 쉽게 차일을 칠 수 있도록 하였다 차일은 천으로 되어 있었는데, 주로 인정전 월대 위에 설치하여 의례의 주관자인 임금과 왕실 가족이 햇볕과 비를 맞지 않도록 하였다 또 차일 밖의 공간과 구별하여 행사 공간에 위계를 부여하는 역할도 하였다 

 

 

인정문을 통해 들어온 어도는 인정전 마당에서 삼도로 바뀌어 월대로 이어지며, 마당 나머지 부분은 모두 자연석으로 된 박석(薄石)을 깔았다. 삼도 옆으로는 정조가 재위 1년(1777년)에 세운 품계석(品階石)이 두 줄로 세워져 있어 문신과 무신을 구분하며, 이 곳이 위계와 권위를 상징하는 엄숙한 공간임을 보여준다. 인정전 마당의 박석은 일제 강점기에 철거되어 잔디밭이 되었다가, 최근에 화강암을 가공한 박석을 깔아 옛 모습을 재현한 것이다. 인정전의 마당을 이루는 건물 중 인정전과 인정문만 원래 있던 것으로, 1910년대에 일제가 주위 행랑과 함께 일본식을 가미하여 변형한 것을 1988년에 원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인정전 외행랑으로 둘러싸인 두 번째 마당은 극도로 단순화되고 절제된 공간이다. 첫 번째 마당에서 이어진 어도가 진선문을 지나 두 번째 마당을 가로지르고 있다. 이러한 공간적 절제 덕분에 마당을 가로지르는 어도의 방향성이 더욱 강조된다. 이 마당은 북쪽의 인정문을 통하여 궁궐의 으뜸 공간인 인정전 마당으로 이어지고, 또한 동쪽 숙장문을 통해 궁궐의 깊숙한 영역으로 이어지는 전이의 공간이다.

이곳 두 번째 마당은 그 모양이 정형화된 직사각형이 아니라, 사다리꼴 모양으로 되어 있다진선문이 있는 서쪽 행랑은 길고, 숙장문이 있는 동쪽 행랑은 그보다 짧다 이렇듯 건축 구조를 대칭적이고 반듯하게 세우는 일반적인 궁궐 건축과 달리 마당 모양이 사다리꼴을 이룬 까닭은, 동쪽 숙장문 쪽 바로 뒤에 종묘에 이르는 산맥이 뻗어 있어, 이곳으로 더 넓힐 수 없기 때문으로 보인다.

 

 

<숙장문>

 

 

 

 

<선정전>

선정전(宣政殿)은 임금의 일상적인 집무 공간으로 쓰인 곳으로, 인정전 바로 동쪽에서 인정전과 나란히 남향하고 있다. 임금은 여기서 신하들과 나랏일을 의논하고 학문을 토론하며, 신하나 유생, 종친을 불러 시험을 치르기도 하였으며, 중국과 일본의 사신을 만나기도 하였다 또 왕비나 왕족들과 크고 작은 연회를 열기도 하였다. 선정전은 인조 반정 때 불에 탄 뒤 인경궁의 편전인 광정전을 옮겨 지은 전각으로 지붕은 푸른색 유리 기와를 덮었는데, 궁궐에 유일하게 현존하는 청기와 지붕이다.

인정전과 같이 의식을 위한 공간을 '정전'이라 하고, 선정전처럼 일상 업무를 위한 공간을 편전(便殿)이라 하였다. 정전인 인정전에 비하여 선정전은 건물이나 마당의 규모가 매우 작다. 다만 지붕을 청기와로 덮어 다른 건물과 구분했을 따름이다. 

 

 

선정전은 특이하게도 정면에 지붕, 기둥만 있고 벽체는 없는 복도가 붙어있어 인정전으로 이어진다. 선정전 앞에 돌출된 전면 복도는 선정전이 혼전(魂殿)으로 쓰인 것과 관련이 있다 선정전은 순조 즉위년(1800년)에 정조의 혼전으로 쓰인 이래 순조, 헌종, 철종 등 역대 임금의 혼전으로 쓰였다. 그리하여 선정전에도 혼전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전면에 정자각(丁字閣)이 세워졌다. 순조 이후 선정전이 혼전으로 빈번하게 쓰이자, 편전의 기능을 잃고 침전 권역에 있는 희정당이 편전으로 쓰이게 되었다. 

 

 

 

선정전 바닥에는 지금은 마루가 깔려 있으나, 원래 방전(方 專+瓦)이라 하여 네모난 벽돌이 깔려있었다. 선정전 바닥이 언제 마루로 변했는지는 아직까지 알려진 기록이 없다.

 

 

 

 

선정전 바로 앞에는 선전관청(宣傳官廳)과 장방(長房)이 자리 잡고 있는 마당이 동서로 길게 붙어 있었다. 선전관청에 근무하는 선전관은 숙직을 하면서 임금을 측근에서 호위하고 임금이 긴급하게 군사 지휘관을 소집하거나 군사를 동원할 때 연락을 담당하였다. 장방은 임금을 가까이서 모시는 내시를 일컫는 말로, 이들이 있던 곳도 장방이라고 하였다.

 

 

 

선전관청 남쪽으로 인정전 동쪽 행각에 붙어 남북으로 나란히 마당이 두 개 있다.선전관청 바로 아래 마당에는 우사(右史)와 당후(堂后)가 있으며 마당 중간에는 문서고(文書庫)가 있다. 우사와 당후는 임금을 중심으로 조정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기록하는 사관을 일컫는 말로, 사관이 머물던 곳이다. 사관은 임금 가까이에서 날마다 일어나는 모든 사실을 기록하여 실록을 편찬하는 자료가 되는 사초(史草)를 남겼다. 사초는 기록의 객관성을 확보하고 사관의 독립성을 보장하기위하여 비록 임금이라도볼 수 없도록 금하였다. 우사와 당후에서는 임금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사건을 날마다 기록하여 사초를 쓰는 곳이었으므로, 계속 생산되는 사초를 보관하고자 옆에 문서고를 세웠다. 

 

 

우사와 당후가 있는 마당의 바로 남쪽 마당을 중심으로 은대(銀臺)와 상서성(尙書省), 육선루와 악기고, 대청(臺廳)이 사방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은대와 상서성은 도승지를 비롯하여 임금의 명령을 받드는 일을 담당하던 승정원의 다른 이름이다. 육선루는 승정원의 다락이다 육선루와 나란한 누마루에는 악기고가 있었는데, 인정전 마당에서 행사가 있을 때 장악원(掌樂院) 악사들이 손쉽게 악기를 꺼내 쓸 수 있도록 배려하여 이곳에 보관한 것이다 대청은 사헌부와 사간원 관리들이 임금의 옳고 그름을 아뢸 일이 있을 때 모이던 곳이었다 우사, 당후, 은대, 대청이 있는 마당 오른쪽에는 장방, 궁방(弓房), 주원(廚院), 공상청(供上廳), 서리방(書吏房), 정청(政廳), 대은원(戴恩院), 등촉방(燈燭房), 사알방(司謁房), 소주방, 내반원(內班院) 등이 각자 작은 마당을 이루고 있다. 주원은 사옹원(司甕院)의 다른 이름으로 왕의 식사와 궐내 음식 공급 등을 담당하였다.

 

 

궁방은 활과 화살촉, 등촉방은 등불과 촛불을 관장하는 관청으로 내시부(內侍府)에 속한다. 사알방은 액정서에 소속된 정6품 잡직 관원으로 항상 임금 곁에 있으면서 임금의 명령을 전달하고 신하들이 임금을 알현하는 것에 관한 일을 사알(司謁)하는 곳 이었다. 서리방은 궁궐 내 각 기관의 하급 관리인 서리(書吏)가 머물던 곳으로, 이들은 문서 처리, 기록, 연락 등 행정 실무를 맡아보았다. 정청은 이조의 당상관 및 병조판서 등 문무관을 선발하는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궁중에서 사무를 보던 곳이다.

 

 

소주방은 임금의 식사를 비롯한 궐내의 더운 음식을 만드는 곳이다. 내반원은 환관들의 관청인 내시부의 다른 이름으로, 궐내 음식물 감독, 명령 전달, 궁문 수직, 청소 등의 임무를 맡았다. 궁궐의 자질구레한 일을 담당했던 이런 기관들이 임금의 집무 공간인 선정전에 조밀하게 모인 까닭은 임금의 거처를 여러 겹의 마당과 건물과 에워싸기 위해서 였다. 이는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임금을 보호 하는 동시에 임금의 편의와 관련된 이들의 역할이 고려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관청이 있는 전각이 모두 없어지고 빈 땅으로 남아 선정전이 외부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현재 이곳에는 선정전만 원래대로 남아있고 선정전 앞의 정자각과 선정문 그리고 선정전을 홑겹으로 둘러싸고 있는 담장은 모두 최근에 복원된 것이다.

어차고(御車庫)는 숙장문 동쪽으로 작은 동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으며, 구한말 순종이 타던 신식 자동차를 보관하는 차고였다 현재 어차는 국립고궁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원래 이 건물은 비변사의 부속기관인 빈청(賓廳)으로, 건물의 이름은 비궁당(匪躬堂)이었는데 대신들과 비변사의 당상관들이 임금을 만나기 전에 대기하는 곳이었다 비궁당 뒤에는 측간(厠間)이라 하여 화장실이 있었으며, 동쪽과 남쪽에는 동산이 둘러싸고 서쪽과 북쪽에는 담장을 둘렀다. 그러나 한일병합이후 어차고로 개조되었다가 현재는 카페로 변했다. 차량은 경복궁 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있다.

 

 

 

@창덕궁의 역사

 

창덕궁은 태종 5년(1405년) 경복궁에 이어 두 번째로 세워진 조선의 궁궐이다. 1392년 태조 이성계가 개경에 있던 고려 궁궐 수창궁에서 왕위에 올라 조선을 건국한 뒤, 재위 3년(1394년)에 수도를 한양으로 옮기고 이듬해에 조선의 법궁으로 경복궁을 세웠다. 그러나 건국 직후 왕위 계승권을 둘러싼 왕자와 공신 세력 사이의 갈등으로 왕자의 난이 두 차례나 일어나 경복궁의 지위는 흔들리게 되었다. 이방원이 옹립한 정종은 권력 투쟁이 벌어지는 와중에 재위 2년(1400년)에 한양의 지세가 좋지 않다며 도읍을 다시 개경으로 옮겼다. 그 뒤 정종에게서 양위받은 태종이 재위 5년(1405년)에 다시 한양으로 환도하면서, 정궁인 경복궁을 비워두고 경복궁 동쪽 향고동에 궁궐을 새로 지어 '창덕궁'이라 이름지었다. 1408년 태조는 이 궁에서 죽었다. 태종 11년(1411년)에 진선문과 금천교, 이듬해에 돈화문에 이어 여러 전각이 차례로 들어서면서 창덕궁은 점차 궁궐의 모습을 갖추어갔다.

 

 

<보춘정>

창덕궁은 500여 년 조선 역사에서 가장 오랫동안 임금이 거처한 궁궐이었다 공식적으로 조선의 법궁은 경복궁이었으나, 조선 초기부터 여러 임금이 경복궁을 기피하여 창덕궁이 그 자리를 대신할 때가 많았다 특히 태종은 왕위를 위해 이복동생을 죽인 곳인데다, 자신의 정적 정도전이 주동하여 건설한 경복궁을 꺼림칙하게 여겼다.

 

 

 

창덕궁의 위상은 임진왜란으로 더욱 확고해졌다. 선조 25년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서울에 있던 모든 궁궐이 불타버리자, 선조 38년(1605년)부터 재건 준비를 시작하여 광해군 원년(1609년) 10월에 인정전 등 주요 전각이 거의 복구되었으며, 이때 공사가 완벽하지는 않았는지 이듬해 2월부터 다시 공사가 진행되어 9월에 완료되었다. 이후 역대 왕들은 창덕궁에서 주로 정무를 보게 된다. 인조반정으로 궁궐 대부분이 소실되자 인조 25년 1647년에 재건하였는데 인조는 후원에 여러 정자와 연못을 함께 조성하였다. 숙종 30년(1704년) 12월에 대보단이 조성되었으며, 정조는 인정전에 품계석을 세우고 후원에 부용지를 중심으로 부용정, 주합루, 서향각을 세우고, 국내외 서적을 보관하기 위하여 열고관, 개유와, 서고를 지었다.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는 의두합과 연경당을 지어 오늘날의 후원 모습을 마무리하였으며, 헌종은 짧은 재위 기간 동안 낙선재, 석복헌, 수강재를 건설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선 말기에는 서구의 문물을 도입하면서 창덕궁에서도 서양식의 전등이나 차고가 설치되기도 하였다. 1907년 에는 순종이 고종의 퇴위 후 이곳으로 이어하여 황궁이 되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돈화문 앞에 도로가 생겨 창덕궁과 종묘가 갈라졌으며, 주요 전각 외의 여러 건물이 대부분 헐리는 등 궁궐이 크게 훼손되었다. 1912년부터는 창덕궁의 후원과 아울러 인정전(仁政殿) 등의 중심부와 낙선재(樂善齋) 등이 창경궁과 함께 일반에 공개되었다. 1917년에는 대조전과 희정당 같은 핵심 전각이 소실되었으며, 이 곳을 재건하기 위하여 1918년에 조선총독부와 이왕직에서는 경복궁 교태전, 강녕전과 그 앞의 행각을 헐어다 창덕궁으로 개조·이건하였다. 1921년에 일제는 대보단을 없애고 그 자리에 신 선원전을 지었다.

해방 이후에도 창덕궁은 한동안 그대로 방치되었으며, 주변에는 민가와 학교, 대형 건물이 들어섰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복원 작업이 진행되었으며, 1997년에는 조형미와 주변환경과의 조화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현재 창덕궁은 크게 인정전과 선정전을 중심으로 한 치조(治朝) 영역, 희정당과 대조전을 중심으로 한 침전 영역, 동쪽의 낙선재 영역, 그리고 북쪽 언덕 너머 후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창덕궁은 북쪽으로 산을 등지고 14만 5천여 평의 산자락에 자리 잡았으며, 북쪽 응봉의 지형에 따라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과 정전인 인정전, 편전인 선정전 등 각 건물이 일정한 체계 없이 자유롭게 배치되어 있어 평지에 세운 경복궁과 대비된다. 그러나 언뜻 보아 무질서해 보이는 창덕궁의 건물 배치는 주변 구릉의 높낮이 뿐 아니라 그 곡선과도 조화를 잘 이루고 있으며, 풍수 사상에 따라 뒤에는 북악산 매봉이 있고 앞으로는 금천이 흘러 배산임수를 이루고 있다. 또 궁궐의 앞쪽에는 공적인 공간을 두고 뒤쪽에는 사적인 공간을 두는 전조후침(前朝後寢)의 원칙에 따라 궁궐 앞에는 공적인 공간으로 궁궐의 으뜸 건물인 인정전, 임금의 집무실인 선정전, 임금을 보좌하는 여러 관청인 궐내각사(闕內各司)가 자리잡고 있고, 뒷부분에는 임금과 왕실의 사적인 공간인 임금과 왕비의 처소가 있다.

 

<희정당>

 

선정전 동쪽으로 내전 일곽이 전개되는데, 임금과 왕비의 생활 공간인 침전이 있는 곳으로 마당과 이를 둘러싸고 있는 집들이 중첩되어 있어 궁궐에서 가장 접근하기 힘든 곳이었다. 선정전 동쪽으로 맨 앞에는 임금의 거처인 희정당(熙政堂)이 있고, 그 뒤쪽으로는 임금과 왕비의 침전인 대조전이 있으며 그 뒤 북서쪽에는 경훈각이 자리 잡고 있다. 희정당 동편에는 성정각(誠正閣) 등 부속 건물이 있으며, 그 동편으로는 담장을 경계로 왕세자의 처소였던 동궁과 창경궁이 접해 있다.

희정당은 선정전과 더불어 임금의 집무 공간이었다. 희정당은 선정전보다 편안한 업무 공간으로, 선정전은 건물의 최고 위계를 나타내는 '전'(殿)인데, 희정당은 그 다음 위계인 '당'(堂)이라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희정당은 네 귀에 모두 추녀를 단 팔작지붕을 얹고 있으며, 처마의 무게를 받치는 공포가 새 날개 모양인 익공(翼工) 양식을 썼다. 임금의 거처답게 거의 담 높이에 이르는 높은 돌기둥 위에 세워져 있어, 이를 에워싸고 있는 주변 행랑과 확연이 구별되었으며, 그리 넓지 않은 마당 한쪽에 하월지(荷月池)라는 네모난 연못이 있고 등을 두어 밤에 마당을 밝힐 수 있게끔 하였다. 희정당 남쪽에는 숙종 13년(1687년)에 세워진 제정각(齊政閣)이 있었다. 여기에 천체를 관측하는 선기옥형(璇璣玉衡)을 설치하고 임금이 천체를 관찰하여 하늘의 도를 본받기에 힘썼다고 한다. 

 

 

 

선정전, 희정당, 낙선재 등 임금의 거처는 외부에서 침입하기 어렵도록 여러 겹의 건물과 마당으로 사방을 에워싼 소위 '구중궁궐'(九重宮闕)의 모습이다. 또 중희당, 연영합 등 세자의 거처는 '동궁(東宮)', 수강재와 같은 대비의 거처는 '동조'(東朝)라 하여 옛 법도에 따라 이들의 처소는 궁궐 동쪽에 두었다. 또 유교 이념에 따라 호사스럽기보다는 검소하고 질박한 궁궐 건축이 돋보인다.

 

 

 

 

 

 

<선평문>

 

<대조전>

 

궁 밖에서 대조전까지 가려면 돈화문과 진선문, 숙장문을 지나 적어도 5개 이상의 문을 더 통과해야만 하였다. 희정당에서 대조전의 정문인 선평문(宣平門)까지는 행랑으로 연결되어 있고, 선평문에서 대조전 월대까지는 어도가 깔려있어 두 건물 사이를 오가는 데 배려하고 있다. 대조전(大造殿)은 왕비의 생활공간이자 임금과 왕비의 침전이었다 대조전은 왕실의 대통을 이을 왕자를 생산하기 위하여 좋은 날을 골라 임금과 왕비가 동침하는 장소였다. 이 곳에서 인종과 효종, 순종을 비롯하여 성종이 승하하였으며, 순조의 세자로 나중에 추존된 익종이 태어난 바 있다.

 

대조전은 인조 때 재건될 당시 45칸 규모의 건물이었으나, 현재는 정면 9칸, 측면 4칸인 36칸으로 줄었다. 가운데 정면 3칸, 측면 2칸은 통칸으로 하여 거실로 삼았으며, 거실의 동ㆍ서쪽으로 각가 정면 2칸, 측면 2칸을 통칸으로 하여 왕과 왕비의 침실을 두었다 거실의 앞 퇴칸은 월대로 출입하도록 하였고, 뒤 퇴칸은 후원으로 출입할 수 있게 하였으며, 각 침실 측면과 뒷면에는 작은 방을 두어 시종들의 처소로 삼았다. 현재 거실의 바닥은 마루를 깔고 큰 의자를 두었으며, 침실과 작은 방은 온돌로 꾸몄다.

대조전에는 희정당보다 훨씬 넓은 앞마당과 뒷마당이 있다. 대조전의 높고 넓은 월대는 삼면이 모두 화려한 휘장문이 있는 녹색 판장(板牆, 나무판으로 된 담)으로 둘러싸여 있어 왕비의 활동이 외부로 노출되지 않도록 가렸다. 대조전의 뒷마당은 넓고 화려하다. 여기에 징광루와 집상전이 있고, 대석 위에 올려진 세 개의 괴석과 석분에 심은 작은 소나무로 장식되어 있었다. 또 경사지에는 큰 돌을 다듬어 계단식 석축을 쌓고 꽃나무를 심는 화계를 설치하여 궁궐에서 갇혀지내는 왕비의 단조로운 생활을 배려하였다.

 

대조전 뒤쪽으로는 수라간이 위치해 있으며 더 안쪽으로는 2층 건물인 장광루(澄光樓)와 경훈각(景薰閣)이 있다. 그 바로 오른쪽에는 대비의 처소인 집상전(集祥殿)이 있었다. 이 건물들은 광해군 15년(1623년)에 인조반정으로 모두 불탄 뒤 인조 25년(1647년)에 옛 모습으로 다시 지은 것이다. 현재 남아있는 경훈각은 원래 2층 건물로 위쪽 건물은 징광루라고 하였다. 이 건물은 높은 월대 위에 올려 진 이층집으로 청기와로 지붕을 덮어 모습이 화려하였다. 경훈각은 1층이므로 온돌방이 있으나, 징광루는 2층이어서 마루로 되어 있어서, 가을과 겨울에는 온돌로 따듯한 경훈각을 주로 이용하고 봄과 여름에는 시원한 누마루가 있는 징광루를 썼다.

 

순조 33년(1833년)에 까닭 모를 화재로 희정당과 대조전을 비롯하여 징광루, 양심합(養心閤) 등이 불타 재건된 바 있다. 현재의 희정당과 대조전 일대는 원래의 모습이 아니다. 이 구역은 일제강점기였던 1917년에 화재로 불타 1920년에 새로 지었다. 불이 나고 나흘 뒤 이왕직에서는 조선총독부와 협의하여 새 궁전은 "조선식으로 하되 서양식을 참조"하기로 결정하고, 건물을 다시 짓되 경복궁에 있는 여러 전각을 헐어다 짓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강녕전은 희정당으로, 교태전은 대조전으로, 건순각은 흥복헌으로, 만경전은 경훈각으로 옮겨 지어졌다. 당시 화재로 주요 전각 뿐 아니라 궁중의 가구와 집기와 오래된 유물도 모두 소실되었다. 원래 대조전은 지붕이 일자형식이 아닌 솟을지붕 형식이었으며 뒤에 집상전도 있었으나 복원되지 못하였다. 사실상 집상전 자리에 현 대조전이 있다고 볼 수 있다. 현재 뒤에 후원으로 가는 문이 있다. 이 문 뒤에는 잔디밭이 있고 그 한가운데 덕수궁에서 옮겨온 가정당이 홀로 외로이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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