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景福宮)

2012. 6. 14. 02:11명승지

 

 

 

경복궁(景福宮)

 

1)경복궁의 역사

경복궁은 1395 창건한 조선왕조 제일의 법궁(法宮: 임금님이 사는 궁궐)이다. 북으로는 백악산(지금의 북악산)을 기대어 자리 잡았고 정문인 광화문 앞으로 넓은 육조거리(지금의 세종로) 거리가 펼쳐진 한양(서울)의 중심이었다. 이후 확장과 중건을 거듭하다가 1592년에 임진왜란으로 인해 전소되고 말았다. 그후 경복궁은 270여 년간 복구되지 못하고 방치되다가 1867년에 이르러서야 흥선대원군의 주도로 중건되었다. 중건된 경복궁은 500여 동의 건물들이 미로같이 빼곡히 들어선 웅장한 모습이었다. 궁궐 안에는 왕과 관리들이 정무를 보던 외전과 관청들 왕족과 궁인들의 생활을 위한 내전과 건물들, 휴식을 위한 정원시설들을 조성했다. 또한 왕비의 중궁, 세자의 동궁, 고종이 세운 건청궁 등 크고 작은 궁들이 복잡하게 들어선 궁궐 복합체이기도 하다.

 

 

 

그러나 국권의 상징이었던 경복궁은 일제강점기 때 계획적으로 훼손되었다. 1911년에 경복궁 부지의 소유권은 조선총독부로 넘어갔으며, 1915년에는 조선물산 공진회를 개최한다는 명목으로 주요 전각 몇 채를 제외하고 90% 이상의 전각이 헐렸다. 조선물산공진회를 계기로 일제는 경복궁을 본격적으로 파괴했고 조선총독부 청사를 지어 궁궐 자체를 가려버렸다. 다행히 1990년부터 본격적인 복원사업을 추진해 옛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하고 홍례문 일원을 복원했으며, 2010년에는 광화문이 원형 복원 되었다. 

 

 

2)경복궁의 명칭

경복궁은 조선왕조가 세워지고 3년이 지난 후 완공되었다. 완공한지 며칠 후에 개국공신 정도전은 태조의 명에 따라 경복궁이라는 이름을 비롯하여 강녕전, 영생전, 경성전, 사정전 등

주요 전각의 이름을 지었다. 경복궁(景福宮)의 <景福>이란 말은 시경(詩經)의 주아(周雅)에 나오는 <기취이주(旣醉以酒) 기포이덕 (旣飽以德) 군자만년 (君子萬年) 개이경복(介爾景福)>

<이내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불렀으니 군자만년에 경복일세>라는

글에서 따온 것으로 “새 왕조가 큰 복을 누려 할 것”이라는 의미로 담고 있다. 

 

광화문 천장에 그려진 주작

 

광화문의 수문장

 

광문과 궁궐담장

@광화문: 본 이름은 오문(午門), 세종 때 개명해서 광화문이라 불렀다.

경복궁 바깥을 두른 담장의 길이는 2.404m에 달하고 높이는 5m, 두께는 2m 정도이다. 담장의 사방에는 4대문을 만들고, 1426년(세종8년)에 건춘문(建春文: 동), 광화문(光化門: 남), 영추문(迎秋門: 서), 신무문(神武門: 북) 이라 이름 붙였다. 이는 각각 봄, 여름, 가을, 겨울과 나무, 불, 쇠, 물을 상징하는 것으로 가운데 자리한 근정전을 중심으로 사방을 둘러싸고 있어 전통적인 오행설에서 유래한 명칭이다.

 

 

 

 

(영추문)

 

 

 

광화문을 들어서면 큰북과 흥례문이 먼저 눈에 들어오고 그 뒤편으로 왼쪽은 인왕산, 오른쪽은 북악산이 보인다.

조선 제일의 법전(궁궐)인 근정전에 이르는 길은 광화문, 흥례문, 근정문의 3개의 문이 있다.

 

(흥례문)

 

(흥례문에서 바라 본 근정문)

근정문에는 좌우의 두개의 문이 있다. 오른쪽은 일화문, 왼쪽 월화문이다. 동반의 문신과 서반의 무신들이 각각 출입하는 문으로 구분되어져 사용되었다고 한다.  

 

 

 

(근정문에서 바라 본 근정전) 

 

근정전은 경복궁의 으뜸 전각인 법전(法殿: 정전(正殿))으로 그 이름은 “천하의 일을 부지런히 하여 잘 다스리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궐 안에서 가장 장엄한 중심 건물로 왕권을 상징하며, 왕의 즉위식이나 문무백관의 조회(朝會), 외국사절의 접견 등 국가적 행사를 치르던 곳이다. 

 

근정전의 마당 즉 조정(朝庭)에 깔려 있는 화강암은 햇빛으로 인한 눈부심을 줄이기 위해 일부러 거칠게 다듬었다. 조정 한 가운데 주변보다 약간 위로 올라 온 길은 어도(御道)라 하여 왕만 다닐 수 있는 길이었다. 어도의 좌우에는 신하들이 직급별로 도열하기 위한 품계석을 세웠다. 근정전의 기둥과 조정의 바닥에 동그란 쇠고리가 박혀있는 것은 왕과 관원들이 햇살이나 비를 가려줄 천막을 치는 데 사용되었다. 

 

 

근정전에서는 한양에 거주하는 모든 문무백관이 참여하는 조회(朝會)를 한 달에 4번을 열었다. 조회에는 미관말직도 관복을 입고 모두 참여하였다. 품계석 앞에 신하들은 자리를 깔고 앉았는 데, 자리는 품계에 따라 표범가죽, 호랑이가죽, 양가죽, 개가죽으로 차별을 두었다.

 

근정전 좌우에 향로가 배치되어 있고 근정전 오르는 월대가 설치되어 있다. 

 

근정전은 2단의 월대(궁궐 전각 밑에 놓인 섬돌) 위에 다시 낮은 기단을 만들고 2층 건물을 올렸는데 안에서 보면 층 구분이 없는 통층이다. 회랑으로 둘러싸고 평평한 돌을 깐 근정전 앞 마당이 바로 조정(朝庭)이다. 남쪽 화랑에 근정문을 두었고 그 바깥에 다시 외행각을 둘러 또 하나의 마당을 조성했으며, 외행각 남쪽에는 흥례문(興禮門)을 내었다. 일제가 조선총독부 건물을 지으면서 근정문 바깥 영역을 철저히 파괴했으나 2001년에 흥례문과 외행각, 영재교 등을 복원하여 제 모습을 되찿았다. 근정전은 국보 제223호, 근정문 및 행각은 보물 제812호 지정되어 있다.

 

 

월대의 구성과 시설물

근정전 월대 위에는 다른 궁궐과는 다르게 난간을 두르고 청룡, 백호. 주작, 현무의 사신(四神)과 12신등을 조각해 놓았다. 이는 근정전의 위상과 법전으로서의 격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동물상은 근정전과 왕실을 지키는 신령스러운 동물들이며 민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해학과 친근함, 인간미가 느껴진다. 기단 좌우측에는 향로가 있다. 이는 청동으로 만든 것으로 근정전에서 국가적인 행사가 있을 때 향을 피우든 의기(儀器)이다. 궁궐의 주요 전각에 널찍하게 생긴 큰 독 <드므>를 설치하고 그 안에 물을 담아 두었다. 하늘의 화마(火魔)가 그 물에 비친 자기 얼굴을 들여다보고 놀라서 도망감으로써 화재 예방을 위한 것이다.

 

 

 

근정(勤政)이란 말은 부지런히 정사를 보라는 의미로 정도전이 지었다고 한다. 근정전에는 3개의 문이 있는데 황제는 5개의 문을 둔다고 한다. 태조 4년 왕자의 난으로 정종은 옛 서울 송도로 천도했다가 제3대 태종이방원이 권좌에 오르자 다시 경복궁으로 천도했다. 임진왜란 때 불타버려 273년간 폐허로 있었는데 왕실의 권위를 세운다는 명목으로 대원군 당백전까지 팔아가며 7년간 공사 끝에 재건했다. 일제시대에는 조선총독부를 짓는다는 명목으로 근정정 주변의 정각들이 철거 되어 현제는 근정전 사정전 경회루 수정전, 제수각, 집월재 등 10여채가 남아있다.

 

 

 

 

 

 

 

                                                근정전을 여러 각도에서 담아 보았다.

 

 

 

 

 

 

 

 

       위용을 자랑하면서 물흐르듯 아름답고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곡선미 그것이 한국적인 고궁의 멋이 아닐까

 

                       근정정 담 넘으로  보이는 속리산 법주사 팔상전을 모방했다는 국립고궁박물관  

 

 

근정전 처마 밑을 보면 그물이 걸려 있는데 이를 <부시>라고 한다. 이 그물은 최근에 설치한 것이 아니라 새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 옛날부터 사용하던 것이다. 새의 배설물은 미관상으로 좋지 않지만 강한 산성이어서 목조건물인 궁궐에 나쁜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화랑이나 궐담 등 그물을 치기 어려운 곳에는 오지창을 꽂아 새들이 앉는 것을 막았다.

 

 

 

근정전화랑이다. 근정전 화랑은 남쪽으로 갈수록 넓어 보인다. 또 근정전의 마당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일정한 경사를 이루고 있다. 이는 비가 올 경우 배수를 목적으로 그렇게 했다고 한다. 선조의 지혜가 작은 곳 어느 하나 놓치지 않고 곳곳에 베어있다.

 

 

잡상(雜像)의 유래

근정정을 비롯하여 궁궐의 처마와 용마루에 동물형상 등의 조형물을 세워두었는 이를 잡상이라 한다. 잡상(雜像)은 요괴(妖怪)를 물리치고 액운(厄運)을 막기 위해 추녀마루 위에 줄줄이 세워놓은 토우(土偶)인 것이다. 잡상(雜像)의 숫자는 건물 품계에 따라 5, 7, 9, 11개를 설치하며 황제가 있는 건물은 11개, 황태자가 있는 건물은 9개, 제후가 있는 7개를 설치했다. 중국 황제의 칙사에게 다례를 행한 경회루는 11개였다. 

 

 

 

 

 

 

잡상(雜像)의 배열 순서는 대당사부(大唐師父:당나라 현장법사), 손오공(孫行者:손행자), 저팔계((猪八戒):멧돼지), 사오정(獅畵像:사화상), 이귀박(二鬼朴:뿔이 둘 달린 짐승), 이구룡(二口龍:입이 둘 달린 용), 마화상(馬畵像:말), 삼살보살(三殺菩薩:재앙을 막는 보살), 천산갑(穿山甲:뒤통수에 뿔 달린 짐승), 나토두(羅土頭:나티)이다.

 

 

 

잡상(雜像)의 유래는 당나라 현장법사가 천축국(天竺國:인도)으로 대승불전(大乘佛典)을 구하러 가서 불경을 가지고 무사히 돌아와야 하지만 당나라 장안(長安)을 출발하여 천축국(天竺國)으로 가려면 사막을 지나 산과 강을 건너야 했다. 천축국(天竺國)으로 가는 여행 중에 무려 81번이나 요괴(妖怪)를 만났고 요괴를 만날 때마다 현장법사는 손오공(孫悟空), 저팔계(猪八戒), 사오정(沙悟淨) 등의 도움을 받아 물리치고 무사히 불경을 구해왔다. 당나라 스님 현장법사(玄裝法師)의 서유기(西遊記)의 영물(靈物)들이 액운(厄運)을 막는데 효험이 있다고 소문이 퍼지면서 궁궐건축에서 잡상(雜像)을 채용하였다고 한다. 

 

 

 (양의문)

@양의문(兩儀門)과 향오문(嚮五門)

침전으로 가는 양의문은 교태전의 정문이고 향오문은 강녕전의 정문에 해당하다

교태전이라는 이름은 주역의 원리와 닿아 있다. 교태전으로 들어가는 양의문은 왕과 왕비가 만나 잘 교통하여 후손을 많이 낳기를 바라는 뜻을 중전의 침전에 담고자 한 것이다. 강녕전으로 들어가는 향오문은 두짝으로 두껍게 되어 있는데 반하여 여인들이 드나드는 교태전의 양의문은 드나드는데 힘들이지 않고 여닫을 수 있도록 6쪽으로 가볍게 만들어져 있다.

 

                                                                        (향오문)  

 

 

 

 

 

 1917년 창덕궁의 침전이 소실되자 일제는 목재를 조달한다는 명목으로 강녕전과 교태전을 뜯어 창덕궁 회정당과 대조전을 짓는 데 사용했다. 현재의 강녕전과 교태전은 1995년에 복원한 것이다.

 

 

 

 

 

 

전하(殿下)와 중전(中殿)의 어원

왕의 호칭으로 쓰이고 있는 전하(殿下)라는 말은 궁궐의 전각(殿閣)과 관련되어 있다. 전하는 전각 아래 엎드려서 우러러 본다는 극 존칭의 의미로 <~ 전(殿)>에 사는 왕이나 왕비에게 붙이는 것이다. 왕비의 침전은 궁궐 한 가운데 있고 궁중 생활의 중심이 되는 곳이기 때문에 <중궁전(中宮殿)>이라 하고 왕비는 <중전(中殿)>, 세자가 거처하는 곳은 궁궐의 동쪽임으로 <동궁(東宮)>이라 부르는 것도 같은 의미다.

 

 

(강녕전)

강녕전(康寧殿)과 교태전(交泰殿)

왕과 왕비가 일상생활을 하는 곳을 침전(寢殿)이라고 한다. 강녕전은 왕의 침전으로 수(壽), 부(富), 강녕(康寧), 유호덕(攸好德: 덕을 좋아하여 즐겨행하는 일), 고종명(考終命:명대로 살다가 편안히 죽는 것)의 오복에서 가운데에 해당하는 강녕의 의미를 담아 이름 붙여졌다. 왕은 이곳에서 독서와 휴식 등 일상생활뿐 아니라 신하들과 은밀한 정무를 보기도 했다. 우물 정(井)자 모양의 9개의 방을 구성하여 한 가운데 방은 왕이 사용하고

주위의 방에서는 상궁이 숙직을 하였다.

교태전은 경복궁 창건 당시 지어진 것이 아니라 1440년(세종22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은 왕비의 침전으로 궐안의 살림살이를 총 지휘하든 곳이다.

 

 

 

                                                                   (만춘전)

 

 

 

 

 

 흠경각으로 들어가는 문과 주변 전각 전각들, 미로같이 짜여져 있다.

 

 

 

 

 

 

                                                                            (수정전) 

 

                                                                   (사정전)

 

                                                                        천추전

 

 

 

 

 

 

 

                                                                함원전

 

 

 

 

 

 

 

아미산굴뚝에 조각된 문양이다. 교태전 뒤 왕비의 후원이기도 한 아미산 정원은 경회루 연못을 판 흙으로 지었다고 한다. 계단식 화원과 땅 밑으로 연기의 길을 내어 후원으로 뽑아 낸 굴뚝(보물제 811호)의 문양이 아름답다.

 

교태전 뒤 아미산굴뚝이 있는 전각을 돌아 이 문으로 나가면 향원정과 건청궁으로 연결된다.

 

 

 

 

 

 

 

 

풍기대 

 

 

 

 

 

 

 

 

 

 

 

 

 

 연경당

 

영춘문

 

 

 

 

 

 

수정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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