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경궁 나들이

2012. 6. 23. 01:00명승지

창경궁 나들이

 

 

 

창경궁(昌慶宮)

 

창경궁은 1395년에 창건한 조선왕조 제일의 법궁(法宮:임금이 사는 궁궐)인 경복궁과, 1405년 (태종5년) 창건된 창덕궁에 이어 세 번째로 지어진 조선시대의 궁궐로 성종14년 1483년에 건축한 궁궐이다. 창경궁은 서쪽으로 창덕궁과 붙어 있고 남쪽으로 종묘와 통하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조선 시대에는 창덕궁과 함께 동궐(東闕)이라고 하였는데,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 붙어 있으면서 서로 보완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창경궁은 원래 이름은 수강궁으로 1418년 세종이 즉위하면서 상왕인 태종을 모시기 위해 지은 수강궁(壽康宮)이 있던 곳이다. 성종 14년(1483년)에 대왕대비인 세조의 비 정희왕후 윤씨, 성종의 생모 소혜왕후 한씨, 예종의 계비 안순왕후 한씨를 모시기 위하여 수강궁을 확장하여 세운 별궁이 바로 창경궁이다.

 

조선왕조는 건국 초기부터 경복궁을 법궁으로, 창덕궁을 보조 궁궐로 사용하는 양궐(兩闕)체제로 이어왔다. 그러나 역대 왕들은 경복궁보다는 창덕궁에 거처하는 것을 더 좋아하였고, 왕실가족이 늘어나면서 차츰 창덕궁의 생활공간도 비좁아졌다. 이에 성종이 왕실의 웃 어른인 세분의 대비가 편히 지낼 수 있도록 창덕궁 이웃에 마련한 궁궐이 창경궁이다.

 

 

 

@성종은 세조의 맏아들인 의경세자(20세에 요절, 덕종으로 추존됨)의 둘째 아들로 작은 아버지인 예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분이다. 제위 당시 13세로 나이가 어려 성년이 될 때까지 할머니인 세조 비 정희왕후의 수렴청정을 받았다. 창경궁은 왕실의 웃어른으로 할머니 세조비 정희왕후, 어머니인 덕종 비 소혜왕후, 작은 어머니인 예종비 안순왕후 등 세분 대비를 모시게 되었는데 효심 깊은 성종이 이들을 위해 마련한 궁궐이 창경궁인 것이다.

 

창경궁은 왕이 정사를 돌보기 위해 지은 것이 아니라 생활 공간을 넓힐 목적으로 세워졌고, 또한 애초 궁궐로서 계획된 것이 아니라 태종이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 준 뒤 살았던 수강궁에 몇몇 전각을 보태어 세운 궁궐이다. 따라서 전각의 수가 많지 않고 규모가 아담하다. 공간의 구조와 배치도 경복궁처럼 평지에서 일직선의 축을 이루도록 구획된 것이 아니라 창덕궁처럼 높고 낮은 지세를 거스르지 않고 언덕과 평지를 따라가며 터를 잡아 필요한 전각을 지었기에 좀 더 자유로운 분위기다.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위해 지은 자경전도 언덕에 지어졌다.

 

창경궁의 특색은 조선시대 다른 궁궐과 주요 전각들이 남향으로 지어진 것과 달리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다. 창경궁의 정문인 흥화문과 정전인 명정전은 동쪽을 향하고, 관청건물이 궐내각사와 내전의 주요 전각들은 남쪽으로 향하고 있다. 창경궁이 위치한 지형이 남서북쪽이 구릉이고, 동쪽이 평지인 지세라서 이를 거스리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짐작된다.

 

 

 

 

 

창경궁은 왕실가족의 생활공간으로 발전해온 궁궐이기 때문에 내전이 외전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넓은 것도

창경궁의 특색이다. 창경궁은 숙종이 인현왕후를 저주한 장희빈을 처형한 일과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인 일 등 크고 작은 궁중 비극이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홍화문(弘化門)

@ 홍화문은 창경궁의 정문으로 조선 성종 15년(1484)에 지은 건물이다. 임진왜란(1592) 때 불에 타, 광해군 8년(1616)에 다시 지었고 지금 있는 건물은 그 뒤로도 여러 차례 수리하였다. 대한민국 보물제384호로 지정되어 있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의 2층 건물로 동쪽을 향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며, 지붕은 앞쪽에서 볼 때 사다리꼴을 한 우진각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아래층은 기둥 사이마다 2짝씩 문짝을 달아 사람이 드나들게 하였으며 위층은 마루를 깔고 앞뒤 벽면에 조그만 널문들을 달아 여닫을 수 있게 만들었다. 지붕 꼭대기 양끝의 조각과 부드럽게 굽어 내린 내림마루 부분의 조각상이 건물의 위엄을 한층 더 돋구고 있다. 여러 차례의 수리와 단청으로 고유의 아름다움을 잃었지만, 창경궁·창덕궁과 같은 건물과 함께 17세기 초반 목조건축의 연구자료로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건물이다.

 

 

 

@창경궁에는 여러문이 있는데 동쪽 문은 홍화문(弘化門)이라 하며 겹처마로서 정문이며, 성임이 현판 글씨를 썼다. 북쪽의 곁문을 청양문(靑陽門)이라 하는데, 그 안이 춘당대(春塘臺)로 후원(後苑)이다. 홍화문의 남쪽을 선인문(宣仁門)이라 하는데, 옛날 이름은 서린문이며 곧 동궁(東宮)의 정문으로 조정 신하들이 모두 여기로 출입하고, 대관은 반드시 정문을 경유한다. 북쪽을 통화문(通化門)이라 하는데, 서쪽이 바로 창덕궁의 건양문(建陽門)이다. 통화문의 동북쪽을 월근문(月覲門)이라 하는데, 곧 청양문의 내동문(內東門)이다. 정종(正宗) 3년에 세웠는데 함춘원(含春苑)의 유근문과 마주 서 있다. 매달 초하루에 경모궁(景慕宮)에 전배(展拜)할 때에 반드시 이 문을 경유하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한 것이다. 또 그 북쪽을 집춘문(集春門)이라 하는데, 곧 춘당대 후원의 동문으로서 태학(太學) 서쪽 반교(泮橋)와 제일 가깝다. 역대 임금들이 태학으로 거둥할 때에 매양 보련(步輦)을 타고 이 문을 경유하여 나갔다.

 

 

명정문

홍화문을 들어서면 가로질러 흐르는 옥천을 건너는 옥천교(玉川橋)가 있다. 다리를 지나면 명정문 (明政門)이 있다명정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정전인 명정전이 있고 그 앞에는 자연석을 깐 넓은 마당이 있으며, 가운데 좌우로 품계석(品階石)이 놓여 있다. 이 부분은 사방이 행랑으로 둘러싸여 있다. 명정문(明政門)은 창경궁의 정전인 명정전의 출입문으로 흥화문과 같이 동향을 하고 있는데, 명정전으로 이어지는 동서 중심축 선상에 정확하게 놓이지 않고, 남쪽으로 약 1.2m 벗어나 있다. 문의 좌우에 연결된 동행각을 명정문에 맞추어 배치하였기 때문에 행각으로 둘러싸인 명정전 앞뜰은 반듯한 사각형이 아니라, 약간 기울어진 모습을 하고 있다. 행각은 2칸 폭의 복랑이며, 경복궁의 행랑에 비해 높이가 낮다.

 

 

옥천교

창경궁 금천 위에 놓은 다리이다. 대한민국 보물 제386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창건 당시의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모든 궁궐 마당에는 시냇물이 흐른다. 법전이 있는 궁궐의 안족과 외부의 공간을 구분하는 역할을 하며, 궁궐 뒤의 산과 짝을 이루어 좋은 운을 불러들이는 길지가 되라고 궁궐 앞쪽에 일부러 낸 물길이다.

이를 '금천'이라 부른다. 창경궁의 금천은 옥천이라 부른다. 그래서 이 옥천에 놓인 다리가 '옥천교'이다.

 

 

 명정전(明政殿)

 

명정전은 정사를 돌보는 창경궁의 정전이다. 대한민국 국보 제226호로 지정되어 있다. 정전은 성종 15년(1484년)에 창건되었다가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것을 광해군 8년(1616년)에 중건한 건물로 현존하는 조선시대 궁궐의 정전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다. 2단의 월대 위에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지붕 건물로 지어, 중층인 경복궁이나 창덕궁의 정전보다 격식이 낮다. 특이한 점으로는 건물 뒤쪽에 퇴칸 형식의 월랑을 두고 있으며, 건물 내부의 앞쪽으로 고주를 세우고 뒷부분 기둥은 모두 생략하였고, 정면 양 협칸의 벽면 하부를 전복돌로 쌓아 점을 들 수 있다. 명정전은 뒤쪽 터가 높게 경사져 있어, 뒤를 제외한 세 면에만 경사지에 맞추어 월대를 조성하였고, 지세에 흐름을 맞추었기 때문에 정문인 명정문의 중심과 축이 일치하지 않는다.

 

 

 

 

 

 

 

 

영춘헌이다. 영춘헌은 정조의 집무실이었으며 정조가 이곳에서 승하한 곳이기도 하다.

 

 

 

 

 

 

 

<통명전>

보물 제818호로 지정된 통명전은 창경궁에 있는 왕과 왕비의 침전 겸 연회용 건물이다. 명정전 서북쪽 궁궐 안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 잡았는데, 동쪽에 있는 환경전과 함께 남향하고 있다. 창경궁 창건 때인 1484년에 지은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타고, 1616년에 재건하였으나, 다시 정조 14년(1790년)에 불에 타 소실되었다. 지금의 건물은 순조 34년(1834년) 창경궁의 전각 대부분을 재건할 때 지은 것으로, 건물은 정면 7칸, 측면 4칸 규모인데 정면 5칸, 측면 2칸을 감싸며 퇴칸이 설치된 형식을 하고 있다.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창덕궁 대조전과 같이 용마루가 없다.

 

동궐도에는 이 건물이 터만 남은 것으로 보아 순조33년 이전에 불탄것으로 보이며 숙종때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모해하기위해 통명전 뜰에다가 저주하는 물건을 심어다놓았다 발각되어 죽임을 당했다는 비사가 있는 전각이다.

  

 

통명전 월대에 설치된 드므

 

 

 

 

통명전 좌측에 마련된 연못, 가물어서 그런지 물이 없다. 

 

양화당(養和堂)

양화당은 왕비의 생활 공간으로 1484년(성종 15년)에 지어졌다. 임진왜란과 이괄의 난, 병자호란으로 인해 불에 탄 것을 매번 다시 지었으며 1830년(순조 30년) 또다시 불에 탄 것을 1843년에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였다가 이듬해 돌아와서 이곳에 거처하기도 하였으며, 1878년(고종 15년) 철종의 아내 철인왕후가 이곳에서 승하하였다. 현판은 순조의 글씨라고 한다.

양화당은 정면 6칸, 측면 4칸 규모의 단층집으로 네 귀에 모두 추녀를 단 팔작지붕을 얹었고

처마를 받치는 공포는 새 날개 모양의 익공 양식이다.

 

 

양화당 뒤편의 굴뚝

 

 

 

 

 

환경전

환경전은 왕의 침전이다. 침전에는 용마루를 올리지 않는데 환경전에는 용마루가 있다. 또한 중종이 여기 환경전에서 훙서하였다고 한다.

 

 

경춘전

경춘전은 원래 대비전으로 쓰인 건물이라고 한다. 정조,헌종이 이 곳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또한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승하한 곳이기도 하다.

 

 

 

 

 

 

 

 

 

 

 

 

함인정

@함인정은 원래 연산군때 지은 인양전이 있던 터이나 임진왜란 때 불타버렸다. 인조가 인조반정후 인왕산 밑에 인경궁을 헐어다가 옮겨지었다. 함인정 부근은 마당이 넓어 임금이 신하들을 접견하는 장소로 많이 사용되었다. 원래 함인정은 전면 열린 공간이 아니었다. 3면은 막힌 공간이었다.

함인정과 환경전 사이에 공묵합이라는 전각이 있었으나 소실되어서 현재는 없다.

 

 

 

 

 

 

 

 

 

 

 

 

 

문정전

문정전은 왕이 일상 업무를 보던 곳이다. 창경궁의 편전인 문정전은 명정전의 오른쪽인 남쪽으로 명정전과 직교하며 서 있다. 여기서 사도세자의 임오화변이 시작되었다. 실제로 죽은 곳은 선인문 쪽이라 한다. 원래 12칸이었으나 복원 때 9칸으로 복원하였다. 동궐도에서 보면 문정전 주변에 회랑이 쳐져있다. 

 

 

 

 

숭문당

문정전 뒤에 위치하고 있다. 숭문당은 임금의 경연이 있었던 곳으로, 왕이 태학생들을 접견하여 주연을 베풀었던 곳이다. 나랏일을 논의하기도 하였다. 영조가 현판의 글을 직접 썼다.

숭문당 밖으로는 내전의 전각들이 전개된다. 숭문당의 서북쪽으로 함인정이 있고, 그 좌우로는 담이 둘러져있다. 이 담 뒤편으로 환경전·경춘전 등의 침전이 있고, 그 북쪽으로 내전의 정전인 통명전이 있다. 환경전에서 통명전으로 이르는 일대는 왕과 왕비가 기거하던 곳으로, 다른 공간에 비해 상대적으로 격식이 높게 잘 다듬어져 있다.

 

 

 문정전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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