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경회루

2012. 6. 12. 08:02명승지

 

 

 

경복궁 경회루(慶會樓)

@경복궁 안에 있는 우리나라 최대의 목조누각. 국보 제224호. 외국 사신의 접대와 연회를 베풀던 곳으로 현재의 건물은 1867년(고종 4) 다시 지은 것이다. 처음에는 경복궁의 서북쪽에 연못을 파고 작은 규모로 지었던 것을 1412년(태종 12) 공조판서 박자청(朴子靑)에게 명해 서쪽으로 옮겨 큰 연못을 파고 4각형의 인공섬 위에 더 크게 세웠다. 이때 경회루로 이름지었고, 파낸 흙으로는 침전 뒤편에 아미산을 만들었다.

 

 

 

1429년(세종 11) 중수되었고, 1475년(성종 6) 다시 고칠 때 48개의 석주(石柱)에 구름 속에서 노니는 용을 조각해 조선 3대 장관의 하나로 알려지게 되었다. 1505년(연산군 11)에는 연못 서쪽에 만세산을 만들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불타버렸다가 1865년(고종 2) 경복궁 중건공사 때 다시 짓기 시작해 1867년 완공되었다.

 

 

 

 

경회루는 앞면 7칸, 옆면 5칸의 중층(重層) 건물로 넓이는 931평방미터인 대규모 목조건물이다.

1층은 48개의 돌기둥들만 세우고 비웠으며 2층에 마루를 깔아 연회장으로 이용했다.

마룻바닥은 중앙의 3칸 중궁(中宮) 부분이 가장 높고 그 다음 12칸은 한 뼘 정도 낮고

바깥의 20칸은 한뼘 정도 더 낮은 데 중앙으로 갈수록 높은 품계의 관료들이 앉았다.

 

 

 

 

건축양식은 익공계(翼工系) 양식이며, 팔작지붕으로 된 이 건물은 장대석으로 축조된 기단 위에 서 있다.

아래층은 외주방형과 내주원형으로 된 48개의 민흘림석주가 상층목조부분을 지탱하고 있으며,

바닥에는 방전(方塼)을 깔았고, 우물천장을 아름답게 단청했다.

 

 

 

 

경회루가 갖는 건축적 특징은 평면구조·칸수·기둥수·부재길이 및 창의 수 등에 〈주역〉의 이론을 적용해 신선의 세계를 만들려고 했다는 것이다. 1865년 정학순이 쓴 〈경회루서〉에 건물의 세부에 대한 내용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경회루는 기능의 완전성과 독립주에 의한 아름다운 비례의 건축미를 자랑하며,

더욱이 주변 산봉과 서로 어울려 연못에 반영된 절묘한 경관은 누각 건축의 백미이다.

<출처: 브리태니커>

 

 

 

@경회루는 주역의 원리에 기초하여 지었다는 옛 기록이 있다. 이에 따르면 중앙의 3칸은 천지인(天地人)을, 12칸은 일년 12달을, 20칸 바깥에 있는 24개의 기둥은 24절기를 의미한다. 높낮이 경계 부분에는 들어열개( 위쪽으로 들어 여는 문) 창호가 달려 있어 창호를 내리면 각각 닿힌 방이 된다. 추녀마루에는 우리나라 건물 가운데 가장 많은 11개의 잡상(雜像: 지붕 위 4귀에 여러 가지 신상(神像)을 세겨 넣은 장식기와)이 있다.

재건 당시에는 청동으로 만든 두 마리 용을 연못에 넣어 물과 불을 다스리게 했다 하며,

1997년 준설공사에서 출토하여 국립고궁 박물관에 국보 제224호로 전시되고 있다.

 

 

 

 

                                                      (국보 제 224호 경회루에서 출토된 청룡상/폄)

 

 

 

 

 

 

 

 

 

@흥청망청의 유래

흥에 겨워 즐기거나 돈을 마구 쓰는 모양새를 일컫는 <흥청망청>이라는 말의 유래는 여러 가지 있는데 대부분 연산군, 경회루와 연관이 있다. 연산군은 조선의 아름다운 여성을 선발해 <운평(運平>이라는 기생으로 만들었는데 이들 중 궁궐로 뽑혀 온 기생을 <흥청(興淸)> 이라 하였다. 연산군은 경회루 등에서 흥청들과 함께 유흥을 즐겼고 결국 <맑음을 일어키는> 흥청은 <맑음을 망하게> 하는 망청이 되었다.

그래서 흥청망청이라는 말이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채홍준사(採紅駿使)

조선시대연산군(燕山君) 때 지방에 파견되어 아름다운 여자와 좋은 말을 찾아 내는 일을 담당했던 관리를 일컬어 채홍준사. 채홍사(採紅使)라고도 했다.

그리고 각 도에서 사족(士族)의 나이 어린 처녀를 찾아내 서울로 뽑아 올리는 자는 채청사(採靑使)라고 했다.

 

 

 

 

연산군은 재위기간 동안 사치와 방탕이 매우 심했던 임금으로

전국 각 도와 읍에 채청사(採靑使)·채홍사 등을 보내 미녀와 관기(官妓)들을 뽑아 올리게 했다.

이들을 운평(運平)이라 불렀고, 그 가운데 재예(才藝)와 자색(姿色)이 뛰어난 자로서

왕의 총애를 받는 자를 흥청(興淸)이라 하여 궁궐 안에 거주하게 했다고 한다.

 

 

 

 

이밖에도 매와 개를 뽑는 채응견사(採鷹犬使) 등을 파견하기도 했다.

<해동야언〉에 의하면, 1504년(연산군 10) 여러 도의 크고 작은 고을에서 운평 300명을 뽑아

서울로 데려오게 했는데, 임사홍(任士洪)을 채홍사로 삼았다고 한다.

이후 창기로 얼굴이 예쁜 자는 대궐 안으로 뽑아 들였는데,

처음에는 100명 정도였으나 뒤에는 1만 명이나 되었다.

 

 

 

 

 

 

 

이로 인해 기생들의 칭호를 고쳐 운평이라고 부르고, 대궐 안에 들어온 자는 흥청· 계평(繼平)· 속홍(續紅)이라 했으며, 가까이 모신 자는 지과흥청(地科興淸)이라 하고 왕과 동침한 자는 천과흥청(天科興淸)이라 했다. 크고 작은 각 고을에서는 운평을 미리 뽑아 왕에게 올리는 데 대비했으며, 흥청의 보증인은 호화첨춘(護花添春)이라 했다. 1506년(연산군 12)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연산군이 폐출(廢黜)되면서 폐지되었다.

<출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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