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남성 곤명기행(11) 금전

2012. 3. 1. 09:06해외여행

 

 

 

운남성 곤명기행(11) 금전

중국의 5대 동전(銅殿:구리로 지은 전각) 중 하나인 곤명의 금전은

1602년 명(明)대에 지어진 도교사원으로

운남성 곤명시 서북쪽 약 8km 정도 떨어진 명봉산(鳴鳳山) 정상에 위치하고 있다.

 

 

 5대 동전은 동 207톤으로 1755년 주조된 북경 의화원의 만수산 보운각,

동 80톤과 금 300kg으로 1416년에 건립된 호북성 무당산의 금전과

동 50톤으로 1602년에 건립된 산서 오태산 동전,

동 20톤으로 1615년 산동 태산에 세워진 동전과

명봉산의 금전을 말한다. 명봉산의 금전은 동 250톤(혹자는 200톤?)으로

높이 6.7미터, 너비 6.2미터로 동전으로서는 최대 금전이라고 한다.

 

 

운남성의 곤명은 차마고도의 길목으로 차로서도 유명하지만 

명봉산은 옛부터 앵무새와 또 공작새가 많았다고 한다.

운남 사람들은 공작새를 봉황으로 알고 봉황이 울음우는 산 곧 명봉산이라 명명했다고 한다.

 금전은 동으로 주조된 것이라서 햇빛을 받으면 황금색을 띄게 됨으로 동와사(銅瓦寺)라고도 부른다.

동와사란 황금빛 구리기와로 지어진 절이란 뜻이다.  


 

금전의 건립설화에는 재미있는 이야기 많다. 1602년 명나라 *만력제(萬曆帝) 때

 운남의 순무(巡撫) 진용빈(陳用賓)이 *팔선(八仙)의 한분인 여동빈(呂洞賓)의 계시를 받고

*도교의 4대 성지중 하나인 무당산의 태화궁(太和宮)을 본떠서

자금성(紫金城)과 금전(金殿)을 세웠는데 1637년 운남의 통치자 목(沐)씨가

금극목(金克木)이란 오행설을 따라 금전의 金이 자신의 성인 목(沐)과 상극이라 하여

태화궁을 명봉산에서 계족산(鷄足山)으로 옮겼다고 한다.

그 후 운남의 번왕(蕃王)으로 임명된 오삼계가 1671년 다시 재건하였다고 한다.

 

 

   (무당산의 금전)

 

@도교의 4대 성지(聖地)는 일명 백악(白岳)이라 불리우는 안휘성(安徽城)의 제운산(齊云山),

 일명 태화산(太和산)으로 불리는 호북성(湖北城)의 무당산(武當山),

운금산(云錦山)이라 불리는 강서성(江西城)의 용호산(龍虎山),

청성산(靑城山) 또는 적성산(赤城山)이라 불리는 사천성(四川城)의 도강언(都江堰),

혹은 곡명산(鵠鳴山)이라 불리는 사천성의 학명산(鶴鳴山)을 말한다.


        (영성문)

오삼계(吳三桂)는 본래 한족(漢族)으로 명나라 말기와 청나라 초기의 장수였다.

그는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와 명이 대치하던 시절 산해관(山海;)을 지키는 명의 장수였지만

 농민반란군으로 명을 멸망시킨 이자성(李自成)을 격퇴하고 청나라 태종에게 투항한 장수다.

청나라 군대는 오삼계를 길잡이로 산해관내로 들어왔고

이 공로로 후에 평서왕(平西王:藩王)으로 봉해져 운남(云南)을 관리하는 통치자가 되었다.

이른바 운남은 한족(漢族) 오삼계가 다스리는 독자적인 지방정권이 된 것이다.

그러나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가 안정을 찾자 제4대 황제 강희제(고종)에 이르러

한족(漢族)과 몽고족들을 탄압하는 정책을 폈는데

이에 불안을 느낀 오삼계는 운남에서 명나라를 다시 건국한다는 명분을 세워

군사를 이끌고 쿠데타를 일으켰다.

 

              괴성루(魁星樓.

                     (괴성루의 괴(魁)는 귀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음뜸, 최고를 나타내는 말이다.

                     성(星)을 별을 의미한다. 따라서 음뜸인 별 곧 태극성을 의미한다.

                    그 태극성이 임하는 곳은 태화궁이라는 의미다. 옥황상제의 거소라는 의미가 된다.)

 

전쟁이나 자연 재앙이 몰아칠 때는 동서고금을 물론하고

종교적인 또는 주술적인 것에 매달리는 것이 상례이다.

우리나라도 몽고가 침입할 때 고려가 8만대장경을 편찬하듯

오삼계는 도교의 신선으로 추앙받는 진무대체(眞武大帝)에게

자신의 군대를 보호해 줄 것을 기원하기 위해

1671년 명봉산에 금전을 새로 축조하였는데 그 금전이 지금의 명봉산의 금전이라고 한다.

주요 건물은 일천문, 이천문, 삼천문, 자금성, 금전, 종루, 괴성루 등이 있다.


 

오삼계의 난(亂)에는 평남왕 상가희(平南王;可喜)와 정남왕 경정충(靖南王 耿精忠)이 호응하였는데

 청나라 역사에서는 이를 가리켜 "삼번의 반란(三藩之亂)"이라고 한다.

이 반란은 운남 주민들을 잔혹하게 학대하고, 잦은 전쟁으로 혼란에 빠져 3년 만에 실패했다.


 

@ 팔선(八仙)은 8명의 신선으로 종리, 장과로, 한상자, 이철괴. 조국구, 여동빈, 남채화, 하선고를 의미한다.

@만력제(萬曆帝)는 명나라 제13대 황제(재위 1572~1620)인 신종(神宗)을 말하며

우리나라 임진왜란 당시 이여송장군을 내세워 파병을 도운 명의 황제다.

신종은 10세 등극했는데 나이 어린 탓에 은사인 재상 장거정(張居正)이 정치를 주관했다.

그는 어린 나이로 등극한 황제에게 너무나 검소한 살림을 강조하고 또 엄격하여 철혈재상이라고 불리었다.

그러던 장거정이 황제 등극 후 10년 만에 죽자 황제는 억눌림에서 해방되어 재물을 밝히기 시작했다고 한다.

윗물이 그러니 아랫물도 그렇게 되어 이로 인한 매관매직이 성행했으며,

설상가상으로 조선이 임진왜란 으로 핍박 받을 때 국내적으로 누루하치의 후금국과 대치하면서도

조선에 파병정책을 실시한 결과 패망의 길을 재촉한 명의 황제로 역사에 기록되는 인물이다.

잃는 것이 있으면 얻는 것이 있듯 명의 도움을 받은 조선에서는

숙종29년(1703)에 우암 송시열의 유지로 그의 제자들이 사당을 세웠는데 그것이 만동묘(萬東廟)인 것이다.

만동묘는 조선에 구원병을 보낸 명나라 신종(神宗)과 마지막 황제 의종(毅宗)황제을 모시는 사당이며

충북 괴산군 청천명 화양리에 위치한다. 만동묘는 한때 도산서원과 더불어 명성으로 떨쳤으나

흥선대원군이 서원철폐를 지시할 때 효시로 헐려버리고 지금은 묘정비만 존재하고 있다.

 

@만동묘의 만동(萬東)은 <만절필동(萬折必東)>의 약자로 만 번을 굽이치고 꺾어져도

반드시 동으로 간다는 의미인데 원래는 선조대왕이 명나라 황하는 반드시 동쪽의 황해로 흘러들어가

조선을 감싼다고 하는 대중화에 대한 보은의 글귀로 지어졌다고 한다.

 지극한 모화사상(慕華思想)의 발로(?)라고 보아야할까... 

 

 

 무당산의 금전을 모방한 봉명산의 금전인데 그안에 모셔진 진무대제의 형상과 비교하면 모습이 영 딴판이다.

일설로는 봉명산의 진무대제는 오삼계의 얼굴로 바꾸었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가.

                 무당산 금전에 모셔진 진무대제의 형상 


              진무대제가 사용했다는 뇌신전에 전시된 칠성보검


             한 중국인 할머니가 손으로 금전의 천정을 보라고 가리키는데 사람에 밀려서 넘 흔들렸다.  

                    두마리 용이 구름 위에 노는 형상인데 금으로 도금되어 있었다.

 

           사람들에게 밀려서 내려와 옆에서 본 금전의 모습

                 금전의 지붕에는 많은 동물형상이 세워져 있다. 도교에서 신성시하는 동물인가?


 

                       사당이 있는 곳은 향의 축제가 열린다. 물론 당연히 구복적이지만..

 

 

석판에 새겨진 24명의 효자효부의 상  중 하나로

이빨이 모두 빠진 시어머니가 먹지를 못하자 수년간을 며누리가

자기 젖을 먹여 효도하는 모습을 나타낸 그림이다.

어느 종교도 마찬가지지만 도교의 사원은 특히 이런 효자효부상을 강조하고 있다.


 

                                                                       

 

          금전 내 박물관에 전시된 오삼계와 그의 애첩 진원원 사진


     오삼계가 즐겨사용했던 대도, 관우의 언월도와 비슷하다.


 

오삼계와 그의 애첩 진원원(陳圓圓 1624~1681)의 이야기가 재미있다.

진원원은 가난한 노점상의 딸로 태어나 7살에 은전 2냥에 기방기녀로 팔려간 진원원은

12세 때 이미 춤과 기악 노래, 기예 등에 뛰어날 뿐만 아니라

미모와 총명까지 갖추어 전국적으로 명기로 알려졌다고 한다.

때에 숭정제의 총애를 받는 전비(田妃)가 황제의 환심을 사기 위해

외척들을 동원해 전국의 미녀들을 뽑아 궁중으로 조달했는데

진원원은 여기에 발탁되어 궁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황실 어의(御醫)들에게 잘못 보였는지 진원원은 색기(色氣)가 너무 강하다 하여

황제의 옥체를 해할 염려가 있다는 간함을 받았다.

이에 황제는 금주(錦州)의 총병관 오삼계의 아버지 오양(吳襄)에게 진원원을 하사했다.

진원원을 하사받은 오양은 자신은 이미 늙었다고 사양하고 그의 아들 오삼계에게 넘겨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진원원은 오삼계의 애첩이 되었다. 


 

명나라 멸망시대 당시 오삼계(1612~1678)는 여진족의 남하를 막고

북경을 진입의 길목의 요새인 산해관(山海關)을 지키고 있었다. 

황제가 죽은 뒤 북경은 이자성에게 점령되었는데 이자성은

오삼계의 아버지 오양과 가족들을 살해하고 이자성의 휘하에 있던 장수 유종민은

오삼계가 북경에 남겨둔 애첩 진원원을 취하자 오삼계는 산해관을 열고

여진족과 함께 이자성을 토벌하여 후금이 명나라를 점령하는데 길잡이가 되었다.

이런 공로로 1657년 평서대장군이 되고 패망한 명나라 신하들이 세운

 남명 저권의 계왕(桂王: 永歷帝)을 추격하여 1659년 운남성을 점령하고

1662년에는 미얀마까지 추격하여 명의 복원을 시도한 계왕을 잡은 공로로 평서친왕(平西親王)으로 봉해졌다.

그러나 후금에서 이름을 청으로 바꾼 청나라 강희제때에 이르러 

한족을 멀리하는 정책이 실행되자 오삼계는 두려움을 느껴 운남 귀주(貴州)의 총관으로서

광동 상가희(尙可喜), 복주(福州)의 경중명(耿仲明)과 함께 청나라에 반기를 들었는데

이를 삼번(三藩)의 난이라고 한다. 1678년 5월 스스로 황제로 오른 오삼계는

반란 5개월 만에 패망했고 그 소식을 들은 애첩 진원원은 오화산 황국사의 비구니가 되었다고 한다.


 

 

 

獨上高樓望八鄕(독상고루망팔향)

墨雲散盡月輪孤(묵운산진월륜고)

茫茫宇宙人無數(망망우주인무수)

幾個男兒是丈夫(기개남아시장부)

 

홀로 높은 누각에 올라 팔방을 바라보니

검은구름 흩어지고 둥근달은 중천에 외롭게 떠있네

망망한 우주에 사람은 많고도 많은데

사내대장부라 할 사람은 몇이나 될꼬.

(위의 이 시는 백세까지 살다가 황학루 3층 누각에서 신선이 되어 올랐다는 여동빈의 시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