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9. 24. 00:57ㆍ국내 명산과 사찰
소요산 선녀탕에서 칼바위능선으로(2/2)
원효대사의 출생에 대해 살펴보면,
원효대사는 신라 진평왕 39년(617) 압량군 불지촌(현 경산군 압량면 신월동)에서 태어났다. 원효는 법명이고, 속성(俗姓)은 설(薛), 속명은 사(思), 서당(誓幢) 또는 신당(新幢)이며, 별명은 모(毛), 호는 화정(和淨)이다. 아버지는 내말 설담날이며, 태종무열왕의 둘째 사위이고 설총이 그의 아들이다.
별명은 소성거사(小姓居士)이며 이외에도 서곡사미(西谷沙彌), 백부논주(百部論主), 해동법사(海東法師), 해동종주(海東宗主)라 불렸다. 고려시대에는 원효보살, 원효성사(元曉聖師)라 존칭되고, 화쟁국사(和諍國師)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본명은 설사(薛思)이다.
원효는 신라의 귀족으로 본명은 설사(薛思)이다. 신라의 개국공신이자 박혁거세를 추대한 사로 6촌의 촌장 중의 한사람인 설거백 또는 설호진의 후손 으로, 설곡(薛嚳)의 4대손이다.
원효는 잉피공의 손자이자 내마(乃末) 설담날(薛談捺)과 조씨(趙氏)의 둘째 아들로 상주(湘州) 경산현 불지촌(佛地村) 율곡(栗谷)의 사라수밑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할아버지 잉피공의 집이 금성에 있었으므로 금성 사람이라고도 한다. 그의 어머니 조씨가 그를 수태했을 때, 꿈에 유성(流星)이 품속으로 드는 것을 보고 원효를 임신하였으며 만삭(滿朔)이 된 몸으로 압량군(押梁郡)의 남불지촌(南佛地村) 율곡(栗谷) 마을을 지나다가 갑자기 산기가 있어 한 밤나무 아래에서 해산했는데 이 나무를 사라수(娑羅樹)라 부르며, 원효가 태어난 곳의 이 밤나무의 밤은 크기도 크고 굵으며 맛이 특이하여 사라율(裟羅栗)이라 불렀다.
삼국유사에 이르기를 원효가 태어날 그 때 오색구름이 땅을 덮었다 한다.
할아버지 잉피공(仍皮公)은 또는 적대공(赤大公)이라고도 하는데, 고려시대 중기 김부식과 일연이 살던 시대까지도 경주 적대연(赤大淵) 옆에 잉피공의 사당이 존재하고 있었다고 한다. 원효에게는 형제가 몇 명 있었는데, 경주 설씨와 순창 설씨의 족보에는 그의 형 중 1명인 설을신(薛乙臣)의 이름이 현재 전한다.
원효는 후일 유명한 승려가 된 뒤, 자신이 태어난 곳의 집을 희사(喜捨)해서 법당을 세우고 그 이름을 초개사(初開寺)라고 했다. 또 사라수 밤나무 근처에도 법당을 세우고 사라사(裟羅寺)라고 이름했다.
원효는 어려서 서당(誓幢) 또는 신당(新幢)으로 불렸으며, 또 다른 이름은 모(毛)였다. 뒤에 이름을 사(思)로 정하였다. 나면서부터 총명하고 남보다 뛰어났으며, 기억력이 뛰어났다. 그는 일찍이 고향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유교를 가르치는 태학에 입학하였다. 스승을 따라 배울 것이 없었다
어려서부터 부친 담날과 조부 잉피공의 기대를 받으며 화랑으로 활동하였으나, 15세 때 또는 28세 때 어머니 조씨의 죽음에 충격을 받고, 삶과 죽음이 뭔가에 대해 오래 고민하다가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황룡사(黃龍寺)에 들어갈 때 집을 희사하여 초개사(初開寺)를 세우게 했으며, 자신이 태어난 사라수 옆에도 절을 세워 사라사(沙羅寺)라 하였다.
<출처: 위키백과>
<승고승전>에 의하면 원효대사는 17세 출가하여 두 번 당으로 유학을 떠났어나 좌절했다고 한다. 첫 번째는 34세 때 진덕여왕4년(650년) 의상과 함께 당나라 현장법사에게 법을 배우려 떠나려다 요동근처에서 고구려 순라군(국경경비대)에 잡혀 첩자로 오인 받아 좌절되고, 두 번째는 문무왕1년(661년) 다시 의상과 당나라로 유학 가던 중 당항성(지금의 남양) 근처의 한 토막에서 잠을 자다가 목이 말라 바가지에 든 물을 마셨는데 아침에 깨어보니 밤에 마신 그 물이 해골바가지에 담긴 물임을 알고는 토악질을 하다가 한 소식을 했다.밤 중에 목이 말라 마실 때는 감로수처럼 느꼈던 것도 이 마음이요, 아침에 깨어나 밤에 마신 물이 해골에 담긴 물임을 알고 토악질 한 그 마음이나 모두 이 한 마음인데 무엇이 다를까. 하여 한 소식을 깨닫고는 유학을 포기하고 돌아왔다고 한다. 그때 지은 법어가 바로 저 유명한 법어인 것이다.
심생즉종종법생(心生則種種法生)
심멸즉감분불이(心滅則龕墳不二)
삼계유심(三界唯心) 만법유식(萬法唯識)
(마음이 나야 모든 사물과 법이 나는 것이요
마음이 죽으면 곧 해골이나 다름없도다.
삼계가 오직 이 마음 뿐이요, 만법이 오직 아름알이로다.)
원효대사는 86부180여 권을 저술했는데 대부분 유실되고 20부 22권이 현존한다. 그 가운데 <대승기신론소>는 중국에서 <해동소>라 불리울 정도로 회자되고, <금강삼매경론>은 마명과 같은 고승이 아니면 지을 수 없는 논이라하여 지금까지도 극찬을 받고 있다. 원효대사는 신문왕 6년(686)3월 30일 공주 혈사(穴寺)에서 입적하셨다.
대웅전
자재암은 지금 공사중이다. 지금 보이는 이 자재암이란 현판은 몇달전만 하드라도 나한전 바로 옆 요사채에 붙어 있었는데 이 번 공사를 하면서 현판만 지금 보이는 요사채로 옮겨 붙혀져 있다. 과연 이름 그대로 자재암이다. 현판을 어디에 걸든 자재암이 어딜 가겠는가.
몸이 바다에 있으니 물을 찾지 말고
날마다 고개에 오르면서 산을 따로 찾으랴.
꾀꼬리나 제비나 그 소리 비슷하니
지나간 일 돌아올 일 묻지를 말게.
身在海中休覓水(산재해중휴멱수)
自行嶺上莫尋山(자행영상막심산)
鶯吟鷰語渾相似(앵음연어혼상사)
莫問前三與後三(막문전삼여후삼)
~야보선사(冶父禪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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