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요산 선녀탕에서 칼바위능선으로(1/2)

2011. 9. 22. 23:26국내 명산과 사찰

소요산 선녀탕에서 칼바위 능선으로(1/2)

 

 

소요산은 서울 근교라 전철로 당일 코스로 움직이기 좋은 산행코스 중 하나다. 산도 그리 높지 않고 볼거리도 많고. 누가 소요산의 백미(白眉)를 꼽으라 한다면 나는 주저없이 3곳을 들 수 있다. 하나는 일주문 주변의 단풍이고 나머지 둘은 선녀탕과 칼바위능선이다. 금년 단풍은 10월 중순 깨나 들것 같다고 하니 단풍구경은 이르고 오늘은 날씨도 우중충 하니 계절과 관계없는 선녀탕과 칼바위 능선만 느긋하게 돌아보기로 했다. 통상적으로는 공주봉으로 해서 하백운대 코스로 종주하지만 오늘은 일주문에서 자재암을 거쳐 선녀탕 상백운대로 올라 칼바위능선으로 그리고 유턴하여 상백운대로 해서 중백운대 하백운대를 거처 자재암으로 다시 내려오는 코스를 잡았다. 느린 내 걸음으로 짐작컨대 대략 4~5시간은 족히 걸릴듯하다.

 

 

일주문을 지나 조금만 걸으면 속리교가 있고 그 다리 왼쪽으로 원효폭포가 나타나고 우측으로는 원효굴이 있다. 원효폭포는 장마와 비내림이 그친지 꽤 되어서 그런지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너무 가늘어 마치 요실금 앓는 이 같다고나 할까. 만약 원효대사가 환생하여 이를 보았다면 파안대소(破顔大笑)했을 것이다.

 

 

 

소요산은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와의 얽힌 이야기가 많아 먼저 짚고 넘어가자.

일연이 쓴 <삼국유사>에 의하면 원효대사가 어느 하루 마음이 들떠 <誰許沒柯斧(수허몰가부) 我所支天柱(아소지천주)>라는 노래말을 지어 부르면서 저자거리를 다녔는데 아무도 이 뜻을 아는 이가 없었는데 태종 무열왕이 이를 듣고 <대사가 귀부인을 얻어 슬기로운 아들을 낳고자 하는구나. 나라에 큰 현인이 있으면 이보다 더 좋은 이이 없을 것이다.>(此師殉欲得 貴婦産賢子之謂 爾國有大賢 利莫大焉)라고 하여 과부(寡婦)가 되어 요석궁에 머물고 있는 둘째딸인 요석공주와 연을 맺어 주려고 했다. 하여 궁리(宮吏)를 시켜 원효를 모셔 오도록 했는데 마침 남산 문천교(跤川橋)를 지나는 원효를 만나 무슨 수작을 걸었는지 다리 밑으로 떨어지게 하였다고 한다. 다리밑은 개울물이라 옷이 젖을 수 밖에. 하여 젖은 옷을 말린다는 구실로 요석궁으로 원효대사를 모셔왔다고 한다. 사건은 여기에서 발단된 듯.. 3일간 체류하며 옷을 말렸다고 하는 데. 글쎄 일부러 발을 헛딛어 개울물에 빠진 것인지, 아니면 누가 밀어서 그런지 그건 잘 모르겠고..원효대사가 617에서 태어나 686에 혈사(穴寺)에서 입적했고 태종 무열왕이 654에 등극했으니 그때 나이를 유추해 보면 대략 사십대 초반 쯤 일테니 기력이 그리 쇠진할 나이는 아니였을테니.. 일설로는 설총이 태어난 때가 655년경이니 그때 원효나이 44세 쯤이라고 하는 설도 있지만 .. 여튼 그 노랫말을 직역한다면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내게 주겠느냐? 내 하늘을 받칠 기둥을 깎으리로다.>라는 뜻인데 이를 시세말로 그려본다면 < 내 물건 하나 기찬 것 가지고 있는데 받아 줄 여자가 없다는 뜻> 이 아닌가.

 

그로 말미암아 태어난 이가 바로 중국 한자를 우리말 발음에 맞춘 이두(吏頭)의 창시자이며 이두문학의 창시자인 설총이니 설총은 신라 십현(十賢)의 한 사람이며, 강수(强首), 최치원(崔致遠)과 함께 신라 3문장으로 칭송되는 사람이라고 하는데 만나 본 적이 없어 잘 모르겠다.

족보를 좋아하는 이는 왜 원 아무개가 아니고 성이 설씨냐고 하는데 이는 원효의 출가 전 본명이 설사(薛思)이고 아명(兒名)이 설서당(薛誓幢) 혹은 설신당(薛新幢) 이였기 때문이다. 원효는 법명(法名)이며 신라 귀족으로 신라 개국공신으로 박혁거세를 추대한 사로 6촌(村)의 촌장 중의 한 사람인 설거백 (또는 설호진)의 후손인 설곡의 4대(代) 손(孫)이라고 한다. 한마디로 뼈대있는 손(孫)이란 것이다.

 

요건 해탈문이라고 하는데 최근에 세운 것 같고.. 앞의 시로 돌아가서..

<몰가부(沒柯斧)>란 말은 자루 없는 도끼란 뜻이다. 우리의 몸뚱아리 중 하나를 비유하는 말인데 설명하지 않아도 눈치 빠른 이는 알테니 생략하고.. 선사(禪師)들은 이런 유(類) 의 말을 많이 사용한다. 그 하나의 일례로 무봉대(無縫袋) 피대(皮袋)란 말이 있다. 꿰맨 곳이 없는 가죽포대라는 뜻이다. 응아 하고 태어난 이 중생은 들어갈 곳은 들어가고 나올 곳은 나오고, 찢어질 곳은 찢어지고 뚫린 곳은 뚫렸지만 어느 한 곳도 꿰민 자국이 없다. 그래서 꿰맨 곳이 없는 가죽포대란 말로 이 육신을 일컫는 말이다. 일례(一例)를 든다면.

 

                             

            자재암에서 입적한 추담선사(秋潭禪師1898~1978)의 부도탑과 공적비

   

                                   <태고보우선사 임종게>

人生命若水泡空(인생명약수포공)

八十餘年春夢中(팔십여년춘몽중)

臨終如今放皮袋(임종여금방피대)

一輪紅日下西峰(일륜홍일하서봉)

 

사람의 목숨은 물거품처럼 빈 것이어서

팔십여년이 봄날 꿈속 같았네.

죽음에 다달아 이제 가죽푸대 버리노니

수레바퀴 붉은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네.

 

 

원효굴에서 좌측으로 난 길을 오르면 첫 봉(峰)을 공주봉이라 하는데 이는 요석공주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한다. 요석공주를 위한 행궁터의 사적도 있다고 하는데 난 보지는 못했다. 원효굴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추담선사의 부도탑이 있고 자재암이 나온다. 자재암은 온통 원효와 요석공주의 이야기로 얽혀 있다. 자재암은 원효대사 개산(開山)하여 산은 소요산이라 하고 절은 자재암으로 했으니 원효대사가 얽힐 것은 당연한데 여기에 요석공주와의 러브스토리(?)가 양념으로 가미된 것이 아닌가 하는.. 그래서 소요산의 이야기꺼리가 풍성해진 것도 사실. 3일간에 만리장성을 쌓고 훌훌히 떠난 원효대사를 찾아 엄마 찾아 삼만리가 아니라 원효대사 찾아 삼천리를 다닌 그 열부(烈婦)의 심정이 이곳 동두천 소요산까지 불러왔다는 이야기인데..

 

비슷한 이야기로 경북 의성군 금석면 탑리에 오층석탑이 있는 빙계계곡에도 원효대사가 수행을 한 적이 있는데 이곳도 요석공주가 찾아 갔다고 한다. 경주에서 의성까지는 거리가 그리 멀지 않으니 그런대로 이해가 가지만 그 당시 도로 사정을 생각한다면 지금처럼 KTX도 고속버스도 없던 그 시절에 이 먼 경기도 동두천까지 찾어 온 요석공주의 그 애틋함과 사모의 정이 오죽 깊었을까. 당시 신라는 여인내들이 여러 사내를 만나는 것이 다반사였다고 하는 데 일편단심(一片丹心)이라..알다가도 모를 것이 여자의 마음이라더니, 허.. 참.

 

 

 

독성암(獨聖岩): 바위 밑의 토암이 나한전임으로 독성암(獨聖岩)으로 한 것같다. 절에서 독성각(獨聖閣), 독성암(獨聖庵) 등으로 불리는 이 말은 사원(寺院)에서 홀로 있는 성자상(聖者像)을 안치(安置)한 당자(堂字)를 일컫는 말인데 독성(獨聖)의 개념은 도교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불교에서는 나반존자(那畔尊者)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나반존자는 옛날 존자(尊者)로서 천태산에서 홀로 도를 닦아 연각(緣覺)을 성취하였으므로 독성(獨聖)이라 불렀다. 독성은 소승불교에서 최고의 경지에 이른 이 즉 아라한을 의미한다. 대승의 보살과 부처의 개념이다. 일반 아라한과 구별하기 위해 부처님은 대아라한이라고 한다.

 

           옥류폭포다. 지난 폭우로 지반이 문너져 떨어진 석등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다. 

                        선녀탕 가는 길은 초입부터 거친 바위너들길이다. 

 

 

 

 

 

 

 

 

 

              선녀탕의 선녀폭포에도 물은 말랐다. 유량이 많았으면 멋질텐데...

 

                  상백운대를 지나 칼바위능선으로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