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락산 장암에서 깔닥고개로

2011. 9. 28. 01:14국내 명산과 사찰

 

수락산 장암에서 깔닥고개로

 

날은 맑고 창밖에 이는 바람은 소슬하다. 어제는 여느 때보다도 일찍 잠자리에 들었는데도 9시가 넘어서야 눈이 떠졌다. 몸이 몹시 무겁게 느껴지는 휴일 아침. 그렇다고 멀거니 집에 있기도 그렇다. 수락산에서 장암으로 내려오다 보면 노강서원이라는 곳이 있다. 하산 길을 이 코스로 잡으면 저문 시간대라 별 관심 없이 지금까지는 눈도장만 찌고 그냥 지나쳐왔던 곳이다. 그런데 오늘 문득 그곳이 생각났다. 서원이라는 것이 어떤 곳일까? 괜시리 시답지 않은 호기심이 발동한다. 별 볼일 없으면 석림사나 들렸다가 계곡에서 발만 담구고 오지.. 하는 생각으로 집을 나섰다. 집을 나서니 벌써 11시가 넘었다. 장암역에 이르러 길을 건너 석림사로 향했다. 옛적에는 즐비하게 늘어서서 요란법석을 떨던 노점상들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다. 얼마 걷지 않아 노강서원이 보인다. 노강서원은 석림사 바로 아래에 있다. 배낭에 넣어둔 카메라를 꺼냈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10월 중순까지 보수한다고 일반인의 출입을 막아 놓았다. 혹 뒷문이나 옆문이 있나 싶어 기웃거리는데 관리인인지 아닌지 모를 아낙네들이 둘러 앉아 저지한다. 기분이 엇잖아졌다. 뭐 그리 대단한 것이라고. 혼자 넋두리 하면서 석림사로 향했다. 석림사에 들러 몇 카터 찍고 나오니 오기가 생긴다. 계곡은 물이 말라 바닥이 드러나 있고 메마른 바위들이 몇 탕 끓인 소 뼈다귀처럼 앙상하게 들어나 있다. 여기까지 왔는데, 아직 해가 질려면 시간도 넉넉한데.. 그래 깔닥고개까지만 갔다 오지 하는 생각이.. 등산화 끈을 다시 조이고 길을 나섰다. 산을 오르니 가을 냄새가 난다.

 

 

 

유수락산요(踰水落山腰)

~박태보(朴泰補)~

 

골짜기 길 몇 번 돌아

산봉우리 여기저기 바라보노라.

이끼 낀 바위에는 가을빛 맑고

솔바람 소리 날 저물어 더욱 차구나

해 가린 숲길은 걷기에 좋고

자욱한 안개에 골짜기 벗어나기 어렵네

사람을 만나 길을 물으니

멀리 붉은 구름 끝 가리키네.

 

 

溪路畿回轉(계로기회전)

中峰處處看(중봉처처간)

苔巖秋色淨(태암추색정)

松籟暮聲寒(송뢰모성한)

隱日行林好(은일행림호)

迷煙出谷難(미연출곡난)

逢人問前路(봉인문전로)

遙指赤雲端(요지적운단)

 

 

 

 

박태보(朴泰輔) 설화

모든 불교 경전은 여시아문(如是我聞)으로 시작한다. 여기서 <나>는 아난을 가리킨다. 부처님 생전 그림자처럼 따라 다닌 아난은 다문일인자(多聞一人者)로 칭송된다. 그런데 그 아난은 무척 미모가 준수했던 모양이다. 그 준수함 때문에 능엄경에서 보듯 색난(色難)도 심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모든 승(僧)들이 법복을 입을 때 우측억깨를 가리지 않는데 유독 부처님께서는 아난에게만은 우측까지 가리고 다니라고 했다고 한다.

 

박태보가 노강서원(鷺江書院)에 모셔진 일과 관련 하여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오는데 박태보 역시 슬기로운 뿐만 아니라 얼굴도 준수했던 모양이다. .

어느 날 이 참판이란 집에 심부름하는 여인 하나가 그의 아름다운 모습에 반하여 박태보의 유모에게 이 사실을 알리자, 유모가 그 사정을 딱하게 여겼으나 박태보의 심지가 곧아 차마 청탁의 운도 떼어보지 못하다가 그의 모친에게 이야기를 했다. 그의 모친 역시 그 여인의 짝사랑을 동정하여 남편 서계공(西溪公)에게 아들을 어떻게 좀 달래보라고 청하였다. 그리하여 그 부친이 박태보를 불러 여인에게 한을 남기면 앞으로의 길에 장애가 될 것이라 훈계하였으므로 박태보도 부친의 뜻을 거역하지 못하였다. 집에 불이 나도 다른 것은 몰라도 위패만은 가지고 나와야 했던 당시 시대상을 볼 때 아무리 꼿꼿한 자식이라도 아버지의 하명을 뿌리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 여인을 부친의 권고에 따라 한번 만나 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여인은 그 후로부터 스스로 머리를 쪽지어 출가한 부녀자처럼 하고 다녔다.

 

세월은 흘러 박태보는 벼슬길에 나아가 응교(應敎: 홍문관 정 4품직) 까지 올랐지만 여인은 그의 기억에서 차츰 멀어졌다. 숙종 15년(1689) 중전에 대한 장희빈의 끈질긴 모함이 성공하여 왕이 중전을 폐비하려 하자, 직언(直言)을 잘 하던 박태보는 이 소식을 듣고 붓을 들어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갖은 국문을 당한 뒤 진도(珍島)로 귀양을 가게 된다. 그러나 귀양지로 가는 길에 국문시 입은 장독(杖毒)과 화상 (火傷)이 심해 금부도사의 배려로 친구집이 있는 노량진에 머물렀다. 이때 어느 여인이 와서 박태보를 한번 뵈옵기를 청하였는데 그 방문객이 바로 전일에 박태보를 사모하여 혼례식도 올리지 않고 출가한 부녀자처럼 쪽을 지고 다니던 그 여인이었다. 박태보는 아몰아몰 멀어져가는 정신을 간신히 수습하여 겨우 손을 들어 여인의 손을 한번 꽉 잡은 다음 그만 저 세상 사람이 되었다. 여인은 시신앞에서 통곡을 하다가 일어나 나갔다. 그 후 인현왕후가 복위되고 노강서원이 완성되던 날, 그 여인은 소복을 입고 서원 뒤 서까래에 목을 매어달아 죽었다고 한다. 후일 사람들이 만시(挽詩)를 지어 그를 애도했다고 한다.

 

처지를 바꾸었더라면 응당 육신이 되었으리

易地君應爲六臣(역지군응위육신)

영연 사람이 죽은 뒤에 영좌를 보신 처소가 어찌 또 노량 물가런고

靈筵何又露粱濱(영연하우노량진)

하늘도 역시 묻히기를 원하는 뜻을 알아

皇天亦識願埋義 (황천역식원매의)

짐짓 충성된 혼으로 육신과 이웃을 만들었네

故遺忠魂與作隣(고유충혼여작린)

<기사유문>

 

@육신은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죽은 사육신을 의미하며 사육신의 묘 또한 노량진에 있다.

 

@서계 박세당(西溪 朴世堂1629~1703). 조선시대 후기 실학자로 현종1년(1660)에 과거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갔으나 40세에 관직에서 물러나 학문과 후진 양성에 몰두한 분으로 저서로서는 <색경>이 있다.

 

석림사(石林寺)의 내력

이조 현종(1671년) 석현화상(錫賢화상)과 그의 제자 치흠(致欽)이 수락산 자락에 석림암(石林庵)을 지었는데 암자의 이름은 서계(西溪)박세당(朴世堂)이 지었다고 한다. 1678년 대홍수로 암자는 유실되고 조정에서 매월당(梅月堂: 김시습)을 뫼시는 청절사(淸節祠)를 세우고 그 옆에 축원당(祝願堂)으로 석림암을 세웠지만 영조 21년(1745) 다시 홍수로 유실 된 것을 익명의 스님이 복원하여 석림사(石林寺)로 개칭하여 오늘날에 이른다고 한다.

 

                                                                   <범종각>

 

 

석림사의 대웅전 현판은 한글로 쓰여져 있다. 

 

지장보살이 가을 하늘 아래 장엄하게 서 있다.  

 

이제 산을 오른다. 

 수락산은 도봉산과 같이 이런 알바위들이 많다.

 

 

망원으로 댕겨보니 바위위에서 젊은 연인들이 인증샷을 찍는 모양이다. 

 

 

정상 앞에 있는 솔이다. 수락산 정상을 들리면 왠지 이 솔에 눈이 간다. 

 

 

 

 

 

 

 

 

정상 앞의 바위등인데 요렇게 보니 하마같기도 하다. 

사십대는 족히 됨즉한 아낙네가 겁도 없이 바위를 오르려고 한다. 

수락산 정상이다. 아래는 다른 각도에서 본 모습. 

 

 

 

 

철모바위다. 이 각도에서는 철모같지 않다. 독수리바위 쪽에서 보면 이렇다. 

철모바위의 뒤모습 

정상에는 늘 태극기가 꽂혀있다. 독립운동하는 것도 아닌데.. 

수락산의 풍광은 여기가 백미인 것다. 

종바위가 있는 쪽이다. 망원으로 본 풍경이다. 

 산을 내려오면서 올려다 본 철모바위의 모습이다.

 

 

 

 배낭바위로 불리는 바위인데 이상하리 만큼 늘 그 밑둥지 지킴에 눈이 간다.

 

누애바위라 하면 어떨까. 어찌 보면 팽긴같기도 하고 

 

 

바위의 절리 틈에 서 있는 이 솔, 볼 적마다 매력을 느낀다. 

 

참 멋진 솔인데 쇠밧줄에 가려... 아쉽다. 이 좋은 풍광을. 

일몰의 독수리바위다.  여린 석양빛이 차가운 바위에 향수를 자아낸다.

 

 

 

 

 

 

배낭바위의 뒤모습

 

  

 

 

 

 

물개바위 

 

 

 

山行/송익필

가노라면 쉬는 것 잊어버리고

쉬노라면 가는 것 잊어버리고

솔 그늘에 말 세우니 맑은 물 소리

뒤에 오던 사람들 내 앞을 가네

머무는 곳 서로 다른 데

다툴 것 뭐 있는가.

 

山行忘坐坐忘行(산행만좌좌망행)

歇馬松陰聽水聲(헐마송음청수성)

後我幾人先我去(후아기인선아거)

各歸其止又何爭(각기기지우하쟁)

~송익필( 宋翼弼 중종29(1534)~선조32(1599))~

조선 선조때의 학자, 성리학에 밝음. 저서로는 <구봉집(龜峯集)>이 있음.

자(字)는 운장(雲長), 호(號)는 귀봉(龜峰), 시호(諡號)는 문경(文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