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9. 11. 01:18ㆍ국내 명산과 사찰
주왕산 나들이
9월의 첫 일요일 모처럼 산악회를 이용하여 주왕산으로 나들이 갔다. 추석이 얼마 남지 않아서 그런지 고속도로는 생각보다 그리 혼잡스럽지 않았다. 서울을 벗어날 때만 해도 날이 좋았는데 치악산을 벗어나면서부터 구름이 끼고 흐려지기 시작한다. 주왕산에 이르니 다행히 비는 내리지 않았지만 하늘은 잿빛이다. 산악회 일행은 절골에서 가메봉을 돌아 제3폭포를 생략하고 일폭에서 바로 대전사로 내려오는 코스인데 나는 절골산행을 포기하고 역(逆)으로 대전사에서 주왕암을 거처 제3폭포로 가는 코스를 택했다. 걸음이 느린 탓에 그리고 오늘 하루 느긋하게 즐기기 위해서다. 이번 산악회의 주왕산 코스는 그래서 좋다. 선택의 여지가 있어서.
주왕산을 혹인(或人)은 <전설의 산>이라고 부른다. 산에 얽힌 이야기 꺼리가 많다는 의미 일게다. 천년의 세월이 지났건만 패망한 진나라를 다시 세워보겠다는 야망을 품고 꿈을 키웠던 한 비범한 사나이, 비운(悲運)의 주왕에 대한 이야기가 주왕산의 골마다 계곡마다 봉마다 서려있기 때문이리라.
시황제로 알려진 진시황이 세운 진(秦)나라 때 복야상서(우리나라 이조의 영의정 급에 해당)란 벼슬을 지낸 주의의 8대 후손인 주도(周鍍)라는 사람이 있었다. 주도는 어려서부터 천품이 범상치 않아 다섯 살 때 이미 글을 배웠고 11세에 육도삼략(六韜三略)까지 통달하고 또한 천문지리에도 능했다고 한다. 무릇 똑똑한 자는 패권(覇權)주의에 쉬이 빠지듯 <황하강의 물을 들이마시고 태산을 갈아 뒤엎겠다.>고 주먹을 불끈 쥔 주도, 자칭 후주천왕(後周天王)이라 칭하고 진나라를 회복한다고 당(唐)의 수도 장안을 공격하다가 관군에 패하여 신라로 도망 와서 석병산(石屛山: 주왕산의 옛 이름)에 숨어 살았다. 이에 당나라에서 신라에게 주도를 멸하도록 요청하자 신라는 마일성 장군과 그의 형제들을 보내 주도와 그를 따르는 무리들을 섬멸하였는데 그 후로 주왕이 숨었던 산을 주왕산이라 했다고 한다. 그리고 주도의 맏아들 대전도군(大典道君)의 이름을 따서 절을 지었는데 대전사라고 했다는 설도 있고, 사찰 이름은 나옹화상 혜근(혜근)이 붙였다는 설도 있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신라의 주원왕(周元王)이 여기에 머물렀기 때문에 주왕산이라고도 부른다는 설도 있다. 창건 이후 자세한 연혁은 전하지 않는다.
<주왕산 이름의 유래>
요산요수(樂山樂水)는 선비의 풍류요, 심산유곡(深山幽谷)은 수행자가 즐겨 찾은 도량(道場)이요 은둔자의 피난처다. 주왕산은 풍광이 뛰어나고 계곡이 깊어 은둔자들과 선사들이 이 산에 살았다하여 대둔산이라 했고, 또 바위로 둘러 쌓인 산이라 하여 석병산, 병풍산이라고도 했다. 또 신라선덕 여왕 때 무열왕 계의 김주원이 상대등 김경신(원성왕)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여기에 피신하여 머물렀다고 해서 주방산이라고도 했다. 또한 신라시대 중국 최초 통일천하를 이룩한 진나라 때 복야상서란 벼슬을 지낸 주의라는 사람의 팔대 손(孫) 주도가 진나라를 다시 세우겠다고 군사를 모아서 장안으로 쳐들어갔다가 패하여 도망 다니든 중 신라의 석병산이 깊고 험하다는 소리를 듣고 이곳에 은둔하였다가 신라의 상장군 마일성 장군에게 토벌되었는데 주왕이 머문 산 이라 하여 주왕산이라고 불렀다. 이 석병산이 곧 주왕산의 옛 이름이다. 또한 고려 말의 고승 나옹화상 혜근(懶翁和尙 惠勤1320~1376)선사가 이곳에서 수도할 때 이 산을 주왕산이라 불러 지금까지 주왕산이라 불린다고 한다.
주왕산은 강원도의 설악산, 영암의 월출산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암산(岩山)에 속하며, 봉화 청령산과 진안 마이산과 더불어 3대 기암(旗岩)에 속한다. 1976년 12번째로 지정된 주왕산 국립공원은 3개의 폭포와 어우러진 경이로운 풍광을 지닌 관광지로 기암괴석 그리고 다양한 식물이 분포되어 있어 봄에는 신록을 가을에는 단풍을 즐기려는 행락객들로 문전성시를 이루는 영남제일의 명산으로 불린다.
옛전에 아니 몇해전만 해도 보이지 않던 부엉이 조각품이 세워져있다. 왜 하필 부엉이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주왕산과 어울린다. 부엉이는 어두운 밤에, 쓸쓸히 우는 새다. 낮에 우는 부엉이는 없다. 언제나 어둠 속에 부리부리한 두 눈을 뜨고 우는 새. 비운에 간 주왕의 넋을 기림인가..
주왕산과 제3폭포로 가는 갈림길이다. 우측은 주왕산 정상으로, 좌측은 폭포로 가는 길이다.
추석밑이라 그런가, 날이 궂어서 그런가, 행락객이 조촐하다.
▲자하성(주왕산성)
당과의 전쟁에서 패한 주왕이 주왕산으로 숨어들어온 후 당의 요청을 받은 토벌군 신라 군사들을 막기 위해 대전사 동편 주왕암 입구에서 나한봉에 걸쳐 쌓은 돌담으로 길이가 약 12키로(30여리)에 달하였다고 한다. 자하성은 주왕굴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방어할 수 있는 요새로 돌문과 창고 등이 있으며 지금은 성의 형체는 거의 사라지고 성터의 자취만 남아있다.
▲▼주왕암과 주왕굴의 전경
▲가학루
▲ 주왕암
▲ 나한전
▲ 주왕암 뒤편 모습, 주왕굴은 주왕암 뒤편 이 길로 오른다.
▲주왕굴로 가는 철제 다리다. 높지는 않지만 협곡이라서 일당백이 가능한 요새로 보인다.
▲우측 봉이 촛대봉이다. 아래는 줌으로 당겨 본 모습.
<주왕사적 이야기>
주왕산에 얽힌 비전(秘傳)으로는 주왕사사적이란 것이 있다. 이는 대전사를 창건한 통일신라 신대 효공왕과 선덕왕의 국사를 지낸 낭공대사의 기록이라고 한다. 낭공대사는 주왕산의 창동에 작은 암자를 짓고 마당에 가리비조개바위 밑에 주왕사적을 묻어 두었다. 그리고 땅속에 묻힌 채로 오대에 걸처 인계토록 하였다. 주왕사적은 작성된 후 114년이 지난 1034년에 출토되었는데 낭공대사의 뜻에 따라 전달 개봉되었든 것이다. 개봉한 사람은 다만 <재주 없는 사람>으로만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낭공대사(郎空大師)는 흥덕왕7년에서 신덕왕5년(서기916) 생존한 스님으로 낭공대사는 스님의 시호다. 이를 기리는 사적비가 지금 국립중앙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는데 <백월서운탑비>가 바로 그것이다. 김생의 필체가 남아 있는 유일한 비(碑)라고 한다.
주왕사적은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앞부분에 비결 편과 과정 등을 설명한 추가부분이 덧붙여 있다. 비결은 주왕산에서 일어난 사실을 숨기기 위해 중국과 관련된 이야기로 꾸며져 있으며 연대(年代)적으로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많다. 또한 등장인물은 모두 가명을 사용하고 있기에 더욱 그렇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주왕산 풍경이다. 우측 봉이 연화봉이다. 이곳은 주왕이 이 산에 머물 때 아들 대전도군과 딸 백련공주를 다리고 함께 달을 구경하였다는 옛 망월대 터라고 한다.
▲좌측이 연화봉 우측이 병풍바위
▲좌측으로부터 연화봉, 병풍바위 그리고 급수대.
▲급수대 밑이다. 이 소로를 따라 제일폭포로 간다. 아래는 급수대를 밑에서 바라본 모습
<주왕산의 기암과 암벽>
주왕산의 절경을 이루는 암석들은 화산의 분화구에서 폭발한 뜨거운 화산재가 지면을 따라 흘러내리다가 쌓여 굳어진 <회류응회암 fallout and ash-flow tuff(화산암류)>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한다. 이런 회류응회암은 침식에 약하기 때문에 풍화차이에 따라 수직절벽이나 계단모양의 지형, 폭포 등을 만들어 내게 된다. 주왕산을 형성한 화산활동은 지금으로부터 약 7천만 년 전으로 추정되고 지질학적으로는 중생대 백악기 후기인데 이때가 바로 한반도에 공룡들이 떼 지어 살던 시기이다. 낙석위험지역으로 지정된 구간이나 상부의 급수대, 주왕산의 제일폭포등은 주상절리와 회류경계에 의하여 만들어진 선물이다.
▲학소교다. 주왕천 개울물은 말라지만.. 그래도 아름다운 자태를 지니고 있다. 주변에 시루봉과 급수대가 있다.
▲▼시루봉
시루봉은 그 생김새가 떡을 찌는 시루와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측면에서 바라보면 마치 사람의 옆모습처럼 보이기도 한다. 설악의 귀면봉이나 크로마뇽인을 닮았나...시루봉에는 옛날 어느 겨울에 한 도사가 이 바위 위에서 도를 닦고 있을 때 신선이 와서 불을 지퍼 주었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으며 바위 밑에서 불을 피우면 그 연기가 바위 전체를 감싸면서 봉우리 위로 치솟는다고 한다.
▼ 닮았다 생각하니 매화산 귀면봉이 생각난다.
▲학소대(鶴巢臺)
하늘을 찌를 듯 솟은 절벽위에 청학(靑鶴)과 백학(白鶴) 한 쌍이 둥지(巢)를 짓고 살았다 하여 학소대라 불린다. 어느 옛날 백학이 사냥꾼에게 잡혀 짝을 잃은 청학은 날마다 바위 주변을 배회하다가 자취를 감추었다는 슬픈 사연이 전해오고 있다. 지금 학은 간데없고 그들의 보금자리만 절벽위에 남아 옛 주인을 그리워하고 있다.
▲▼학소대의 주변과 정상풍경을 담아 보았다.
▲제1폭포
▲제1폭포 상층부다. 폭호의 형상이 등선폭포의 선녀탕과 흡사하다.
▲ 등선폭포의 선녀탕 ▼ 제1폭포의 상단의 풍경
▲제3폭포
제3폭포는 두 줄기의 낙수형상으로 쌍폭 또는 용폭이라 하며 주왕산 자연폭포 중에서 최대의 크기와 웅장미를 나타내 주고 있다. 2단 폭포인 제3폭포는 1단 폭포에 의한 침식형인 폭호가 존재하고 전제적인 낙수차는 10미터 내외로 형성되고 있으며 유량에 따라 폭포의 웅장함이 다르게 나타난다.
제3폭포의 상층부다. 이를 보면 내연산 관음폭포가 생각난다.
▲내연산 관음폭포
이제 제2폭포로 간다. 제2폭포는 제3폭포보다 수량이 적어 그 웅장미가 많이 떨어진다.
▲제2폭포
호의 모습이 설악의 선녀탕을 생각나게 한다. 제2폭포의 바위는 설악의 선녀탕과는 달리 돌이 물러서 색감과 그 강건미에서는 다소 떨어지지만 그 변화는 훨씬 더 뛰어나다. 유량이 좀더 많았으면 좋으려만..
▲설악의 12선녀탕
▲급수대(汲水臺)
신라 37대 왕인 선덕왕(善德王)이 후손이 없어 무열왕(제29대 왕)의 6대 손(孫)인 김주원(金周元)을 38대 왕으로 추대하였으나 때마침 그가 왕도(王道)인 경주에서 200리나 떨어진 곳에 있었고 금성으로 돌아오던 중 홍수로 알천(閼川)강이 범람하여 건너올 수 없게 되자 대신들이 이는 하늘의 뜻이라 하여 상대등(上大等) 김경신(金敬信)을 왕으로 추대하였다. 그리하여 김주원은 왕위를 양보하고 이곳 주왕산으로 피신하여 대궐을 건립하였는데 당시 산위에는 샘이 없었으므로 계곡의 물을 퍼 올려 식수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그 후로 이곳을 급수대라고 불리었다고 한다.
▲대전사로 내려오면서 올려다 본 급수대의 또 다른 모습
<삼국사기신라본기>에 따르면 왕위를 양보한 김주원은 후환이 두려워 하슬라(何瑟羅:일명 河西)로 피신했는데 그곳에서 2년 후 하서주도독으로 임명되어 명주군왕(冥州君王)으로 지냈다고 한다. 하슬라는 황하의 서쪽 지방을 말하는데 지금의 섬서, 강숙, 몽고의 악이다사, 액제눌이 지역을 모두 포함한 곳이라 한다. 이로 보아 김주원이 머물었다는 이야기는 조금 의심이 들지만 민담(民談)은 어디까지나 민담. 전설(傳說)은 어디까지나 전설일 뿐. 시시비비를 논하지 않는 것이라 관례라...
<삼국사기>에 의하면 김주원은 선덕왕이 죽자 무열왕계의 왕족 중 가장 유력한 왕위계승자로 지명되었는데 김경신(金敬信:원성왕)의 정변으로 왕위를 빼앗겼다. 김헌창은 신라 헌덕왕 14년 (822)에 아버지 김주원이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 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킨 것이 김헌창의 난이다. 처음 웅천주(熊川州 :지금의 공주)에서 난을 일으켜 완산주, 청주 사벌주 등을 장악하고 나라이름을 장안(長安), 연호를 경운(慶雲)으로 하였다가 결국 관군에 패하여 웅천주에서 자살하였다고 전한다. 나의 얕은 소견으로는 주왕사적을 쓴 숨은 의도가 김헌창의 난을 빗대어 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주방천의 물은 1급청정수라고 한다. 언제 보아도 맑다. 금년은 비도 많이 내렸건만 여긴 가물었나 보다. 수량이 너무 빈약하다.
가매봉을 돌고 내려오는 산악회팀들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한다. 이제 나도 대전사를 들려 하산해야 되나 보다.
▲▼대전사
대전사는 672년 신라 문무왕 12년에 의상조사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주왕사 사적에 의하면 신라 말 892년 진성여왕6년에 낭공대사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낭공대사는 통일신라 때 효공왕과 선덕여왕 2대에 걸처 국사를 지낸 스님이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02호 보불 제1570호 지정되어 있고, 현존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타 조선현종(1672) 때 중창되었다. 대웅전격인 보광전은 화강석 기단 위에 전면 3칸, 측면 3칸의 구조로 천장은 우물 정(井)모양으로 되어있다. 또 <신증 동국여지승람>에는 주방사(周房寺)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 유정이 승군을 훈련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부속암자로는 백련암(白蓮庵)과 주왕암(周王庵)이 있다. 백련암은 주왕의 딸 이름에서 유래하고 주왕암은 주왕에서 유래한다.
▲기암(旗岩)
대전사 뒤편 비석처럼 우뚝 선 이 바위는 주왕이 신라의 마장군과 대적할 때 신라 군사를 속이려고 정상에 깃발을 세우고 산능선을 볏짚을 둘러 군량미를 쌓아둔 것처럼 위장했다는 설이 있고, 이를 점령한 마장군이 산 정상에 대장기(大將旗)를 세웠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자세히 보면 정상 바위 중간 한 부분이 떨어져 있는데 이는 마장군이 쏜 화살로 인한 것이라고 한다. 정상에는 70평 정도의 평지가 있고 여기에 묘를 쓰면 후손에 황후장상같은 인걸(人傑) 나온다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어느 해부터인가 마을에 가뭄이 극심하여 마을 사람들이 정상에 올라가 보았더니 묘가 있어 이를 다른 곳으로 옮겼더니 이후로 비가 내리고 가뭄이 들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 대전사는 새 전각을 짓는 공사 중이라 곳곳이 파헤쳐지고 흙더미로 둘러보기가 어수선 하다. 보광전 앞 삼청석탑은 각면에 사천왕상과 범천 제석천이 부조되어 있다.
심외무법(心外無法)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마음 밖에 법이 없고 모든 것은 마음이 지은 바라. 그렇다면 그 마음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며, 또한 무엇이란 말인가.
사대(四大)가 공(空)하고 오온(五蘊)이 주인이 없는데 무엇을 일러 마음이라 할건가..
주방천 물이 맑으니
버들치가 모여든다.
해는 저물었고 회색의 어둠이 내려앉았다. 귀경길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스쳐가는 창밖의 풍경을 담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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