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마음이 곧 부처다.

2009. 7. 1. 22:52야단법석

 

(감악산의 부처) 

 

이 마음이 곧 부처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산업시대는 두 가지 큰 병을 앓고 있다.

마약과 섹스다.

마약을 하고 섹스를 즐기는 것은 인간의 쾌락추구와

 현실도피성에 직결되어 있다.

복잡하고 고통스러운 이 현실을 잠시 잊기 위해 약물에 의존하고, 육체적 쾌락에 의존하려고 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말하는 현실이란 무엇인가?

현실이란 인간의 이상에 욕망이 결부된 것이다.

현실에서 욕망을 제거해 버리면 현실이 곧 이상이 되는 것이다.

 

물질이란 인간의 욕구와 쾌락충족을 위한 것이다.

현대인의 쾌락은 돈 없이는 즐길 수 없게 되어있다.

매춘도 돈 때문에 성행하고, 폭력과 사기도 돈 때문에 일어난다.

그래서 가진 자도 가지지 못한 자도

모두가 이런 정신적 공해에 시달리고 있다.

그래서 원조교제 등

추악한 스캔들이 신문과 잡지 등 매스컴을 장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욕망이 불러오는 것은 변태적 욕망의 충족이요, 황금만능주의요, 물질지상주의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이런 물질만능주의가 자본주의를 밑 바치고 있는 한 현대인들은 마음에 병이 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람들의 이기적인 마음이란 맑은 하늘을 가리는 구름과 같은 것이다.

갖가지 형상들이 요란하게 하늘을 덮지만 때가 되면 소리 없이 사라지는 무상한 것들이다.

인생이란 것도 마찬가지다.

젊어서 매혹적이고 화려하게 보였든 그 모든 것이 나이가 들면 무상하고 허무하게 느껴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병들고 늙어 가는 이 육신에 허무감을 느끼고,

고독한 영혼의 좌절감을 느껴 어떤 이는 쾌락에 빠지고 되고,

어떤 이는 허무감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이는 자기의 참 마음을 알지 못하고 살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바른 생각을 가지지 못하고, 바른 말을 하지 않고,

바른 행동을 하지 않은 삶 이였기에

그런 것이다. 진정 내 마음이 부처임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도봉산의 부처) 

 

영가(永嘉)스님이 이러시길

「무명(無明)의 실성(實性)이 곧 불성이요,

허깨비 같은 헛된 몸이 바로 법신(法身)이다.

그럼으로 중생이 본래 부처임을 알아야 한다.」 라고 했다.

중생이 본래 부처란 말은 “중생과 부처는 다르지 않다.”는 의미다.

중생의 마음이 곧 부처라는 의미다.

이는 곧 중생의 마음이 없으면 부처도 없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마음이 없이는 부처도 없다는 이 말의 뜻은 부처가 마음에서 나온다는 말이다.

그럼으로 누구든지 부처를 보기 원한다면 부처를 보기 전에 먼저 그 마음을 보아야 한다.

한 번이라도 안에 있는 부처를 보았다면 허망한 마음에 대해서 잊어버리게 될 것이다.

 

만약 그대가 그런 허망한 마음에 대해서 잊어버리지 않으면

그 마음은 그대를 혼란에 빠뜨릴 것이다.

중생심과 불성은 물과 얼음의 관계와 같은 것이다.

탐진치(貪瞋痴) 세 가지 독에 중독되면 그것은 중생심이 되고

세 가지 독에서 벗어나서 순수해 질 때 그것은 불성(佛性)이 된다.

겨울이 되면 물은 얼음이 되고 여름이 되면 얼음은 물이 된다.

얼음을 없애고 나면 더 이상 거기에 물이 남아 있지 않다.

중생의 마음을 제거하면 거기에 불성은 없다.

얼음의 본성이 바로 물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경에 이르길

 「중생은 부처를 해탈시키고 부처는 중생을 해탈시킨다.」고 했다.

그것은 서로 나누어 질 수 없다는 의미다.

고통이 깨어 있음을 만들어 내기에 중생은 부처를 낳는다.

그리고 깨어 있음은 고통을 벗어나게 해주기 때문에

부처는 중생을 해탈시킨다는 의미다.

고통이 없다면 깨어 있음을 만들어 낼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리고 깨어 있음이 없다면 고통을 부정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그대가 미혹되었을 때 부처는 중생을 해탈시킨다.

그대가 깨어 있을 때 중생은 부처를 해탈시킨다.

부처는 스스로 부처가 될 수 없다.

그들은 중생에 의해서 해탈된다.

그래서 모든 부처들은 미혹을 아버지로 삼고 탐욕을 어머니로 삼았다.

미혹과 탐욕은 중생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그대가 미혹되었을 때 그대는 이쪽 언덕에 있다. 그대가 깨어 있을 때 그대는 저쪽 언덕에 있다.

그러나 한 번 그대가 자신의 마음이 텅 빈 것을 알고 그대가 어떤 형체도 없음을 볼 때

그대는 미혹과 깨어 있음을 모두 초월한다.

그리고 그대가 한 번 미혹과 깨어있음을 초월할 때

저쪽 언덕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여래에게는 이쪽 언덕도 저쪽 언덕도 없다. 그는 강물의 중간에도 없다.

구도자는 강물의 흐름 중간에 있다.

중생은 이쪽 언덕에 있다. 그리고 저쪽 언덕에는 불성이 있다.

 

(불곡산의 부처) 

 

깨어있는 마음은 중생심을 벗어난 마음이다.

그것을 일러 초월(超越)했다고 말한다.

그럼으로 이기적인 마음, 세속적인 삶을 위해서 초월을 포기한 사람들은

아무리 많은 모습으로 나타나더라도 모두 중생일 뿐이다.

부처란 좋고 나쁜 운명에서 자유를 얻은 사람이다.

따라서 그런 능력으로 인해서 그는 업에 얽매이지 않았다.

어떤 종류의 업이라고 해도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부처는 그것을 초월했다. 천상이나 지옥이 그에게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만일 그대가 이런 확신이 없다면 행동해서는 안 된다.

한 번 그대가 행동하면 그대는 생사의 바퀴 속에 빠져 후회하게 될 것이다.

이 마음을 이해한다면 그대는 행위 없는 행동을 해야 한다.

오직 그때만이 그대는 여래의 안목으로 사물을 보게 된다.

‘행위 없는 행동’이란 습관적이고 타성적인, 이기적인

그대의 마음에서 나오는 모든 것을 말한다.

‘여래의 안목’이란 곧 그대의 깨어있는 무심이요, 정직한 마음을 말한다.

 

그러나 그대가 처음 그대의 참 마음을 만날 때 그대의 의식은 잘 집중되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마치 꿈이나 환상을 보는 것처럼 느낄 것이다.

그러나 그대는 이 모든 장면들이 다른 곳에서가 아닌 모두

그대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임을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만일 그대가 태양보다 더 밝은 빛을 본다면 그대 속에 남아 있던

집착은 갑자기 끝나버릴 것이다. 그리고 마음이란 실체가 드러날 것이다.

깨달음의 시작은 그렇게 나타난다. 그러므로 이것은 그대만이 아는 것이다.

그대는 이것을 다른 사람에게 설명할 수 없다.

그대가 밤의 어둠 속에서 걷고 서고 앉고 눕고 하던 모든 일상적인 일들이

어느 날 번갯불이 스치듯 불현듯 그 의미가 새롭게 자각될 때

놀라움을 느낄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신비한 것도, 기이한 것도 아닌 것이다.

그것은 그대의 마음이 자신을 드러내는 것일 뿐이다.

 

만일 그대가 자신의 본성을 보았다면

그대는 더 이상 경전을 읽거나 염불을 할 필요도 없게 된다.

그 단계가 되면 학식이나 지식 따위는 한낱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만다.

마음을 본 자라면 그것들은 그대의 각성을 가리는 구름일 뿐이다.

경전의 교리조차 그대의 마음을 가리는 것이 될 뿐이다.

그럼으로 한번 그대가 자신의 마음을 본 이상

교리에 집착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북한산 국녕사의 부처)

 

중생에서 벗어나서 부처로 가기 위해서는 이기적인 마음으로 짓는

모든 업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그대의 각성을 기르고 삶이 가져 다 주는 것을 받아 들여야 한다.

그것이 수용의 의미요, 조사들이 말한 평상심의 의미다.

 

중생이 그들의 본성을 보게 되면 모든 집착이 끝나 버린다.

각성은 더 이상 감추어진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대는 지금 당장에만 그것을 발견할 수 있다. 오직 지금뿐이다.

그대가 도를 진정으로 찾고 싶다면, 진정으로 부처를 보기 원한다면

어떤 것도 붙잡지 말라.

한 번 그대가 업에서 벗어나 그대의 각성을 기르기 시작하면 모든 집착은 저절로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참된 이해가 자연스럽게 찾아온다. 그대는 아무런 노력도 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광신자는 부처가 말한 뜻을 이해 할 수 없다.

앞에서 예시한 바와 같이 창녀와 도둑들은 그들이 더욱 애쓸수록 성현의 본뜻에서 더욱 멀어진다.

설령 그들이 하루 종일 염불을 하고 경전을 독송한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신성한 본성에 대해서 그들은 여전히 장님이다.

국자가 국속을 드나들지만 국자는 국 맛을 느끼지는 못하듯, 본성을 깨닫지 못한 그들에게는

결코 생사의 바퀴에서 벗어나는 도리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부처는 한가한 사람이다. 그는 복과 명성을 좇아서 뛰어다니지 않는다.

삼독의 바람을 따라 가지 않는다.

결국에는 사라져 버릴 것들이 뭐 그리 좋겠는가?

부처란 곧 그대의 마음이다. 그 마음은 본래 무엇을 쫓아 움직이지 않았다.

그 마음은 한가한 것이다. 그래서 깨달은 이를 일러 일숙각선사는

 “한가도인(閑暇道人)”이라고 했다.

 

깨어있는 마음은 한가한 마음이다.

무엇을 구하지 않기에 무애한 것이다.

무애한 그 마음이 바로 부처다.

그것은 밖이 아니라 그대 안에 있는 것이다.

그대의 본래 마음이 바로 부처이기 때문이다.

 

(소요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