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응(順應)하는 삶이 중도의 삶이다.

2009. 7. 1. 06:57야단법석

 

 

순응(順應)하는 삶이 중도의 삶이다.

 

사람들은 사물의 본질, 부처의 본질을 찾으려고 갖가지 마음을 사용한다.

실체를 찾으려고 마음을 사용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실체를 찾는 데에 마음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깨어 있는 것이다.

말(名字)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해탈을 얻은 사람이다.

감각에 물들지 않는 것은 진리를 따르는 것이다.

그리고 삶과 죽음을 초월하는 것은 육신이라는 자신의 집을 떠나는 것이다.

존재하는 것에서 고통을 받지 않는 것은 도(道)에 이르는 것이며,

망상을 피우지 않는 것이 바로 깨달음이다.

무지에 몰두하지 않는 것이 지혜이며,

괴로움을 당하지 않는 상태가 곧 열반이다.

마음이 일어나지 않음은 피안에 다다른 것이다.

이는 경전에 회자하는 부처의 가르침이요, 선사들의 가르침이다.

 

 

 

치우치지 않은 진리의 빛 속에서 본다면 중생은 성자와 다르지 않다. 경에 이르기를

「치우치지 않은 진리는 중생도 꿰뚫을 수 없고 성자도 행할 수 없다.」고 했다.

치우치지 않은 진리는 오직 보살과 부처만이 행할 수 있다고 한다.

죽음을 삶과 다르게 보거나 정(靜)을 동(動)과 다르게 보는 것은

이미 한쪽으로 치우친 것이다.

치우치지 않는다는 것은 번뇌와 열반의 본성이 똑같은 공(空)이기에

그 둘이 다르지 않음을 보는 것이다.

고통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하거나 열반에 들어갔다거나 성자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열반이라는 망상의 덫에 걸린 것이다.

그러나 보살은 고통의 본질이 공허하다는 사실을 알며 공허함에 머무르기에

항상 열반에 들어 있는 것이라고 경전은 말한다.

조사들의 어록에 이르듯 열반은 삶도 아니고 죽음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 삶과 죽음을 초월하는 것이며 열반이라는 것 자체도 초월하는 것이다.

마음이 움직임을 멈출 때 열반으로 들어간다.

열반은 바로 텅 빈 마음이다. 깨어 있는 마음이다.

무엇을 담고 있지 않은 마음이다.

담고 있는 것이 없기에 고통이 없는 것이다.

 

 

그 어떤 곳에도 안주하지 않을 때 거기에 탐냄도 성냄도 어리석음도 없다.

마음이 하나의 허구이며 실재하는 것은 모두 공한 것임을 아는 사람은

자신의 마음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며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님을 안다.

중생은 마음을 만들어 내고 그것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깨달은 이는 그 마음을 부정하며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보살과 부처는 마음을 만들어 내지도 않으며 부정하지도 않는다.

이것이 바로 마음은 존재하는 것도 아니며,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라는 뜻이다.

이것을 중도라고 부른다.

 

 

어느 젊은 새댁이 운전면허를 따게 되었다.

그래서 중고차 한 대를 뽑아 차의 뒷면에 “초보운전”이라고 딱지를 붙이고

운전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게 웬일인가! 차가 많은 왕복 이차선 도로에서

운전 미숙으로 시동이 꺼지고 말았다. 차는 계속 밀리기 시작했다.

바로 뒤에 따라오던 택시운전사가 열 받아

 “야, 집에 가서 애나 봐!”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 말을 들은 새댁은 충격을 받아 다시는 운전대를 잡지 않겠다고 생각을 했다.

그런데 아주 급한 일이 생겼다.

다시는 자동차를 운전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아주 급한 상황이라서 결국 차를 몰고 나갔다.

그의 차 뒤에는 “초보운전”이란 대신 이렇게 쓰여 있었다.

“지금 애기 보러 가는 중임”

 

 

중생이란 일을 벌일 때마다 그에 합당한 변명을 가지고 있다.

이제는 빈 소리가 되었지만

“처녀가 애를 낳아도 할 말이 있다”는 말처럼

중생은 갖가지 망상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망심심이 천 가지 일에 만 가지 변명을 마음에 준비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을 놓아버리면 마음은 고요해진다.

그대의 내면에서 마음이 일어나지 않을 때 바깥세계도 생겨나지 않는다.

바깥 세계와 마음이 둘 다 사라질 때

그것이야말로 망상심이 사라진 참된 마음이 드러난다.

거기에서 바른 견해가 나온다.

그러한 마음에서 바른 이해가 생긴다.

깨어있는 마음은 둘이 있을 수 없다. 깨어있는 마음은 오로지 하나일 뿐이다.

그래서 선사들은 말한다.

「於事無心하고 於心無事하라」고

일 따라 마음 일으키지 말고 마음 따라 일 만들지 말라는 의미일게다.

 

오로지 하나인 마음에서 나오는 그것이 중도의 마음이다.

<지도론>에 이르듯 비가 오면 우산을 받고 땅이 질면 장화를 신어면 된다.

 

 

중도의 마음은 법에 따라 사는 삶이다.

일을 따르고 사람의 마음을 따르지 않는 삶이다.

뜨거운 오뉴월에 털 코트를 입지 않고, 엄동설한에 모시적삼을 입지 않듯

계절에 따라 적적한 옷을 입는 것처럼 욕망을 피하고 습관적인 행위로부터의 벗어나

순리에 따르는 깨어있는 삶을 사는 것이 중도이다.

 

법에 따라서 사는 방법을 배우는 것은

곧 우주의 자연법칙에 순응해서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盲從하는 삶이 아니라 順緣하는 삶이요,

順從하는 삶이 아니라 感應하는 삶이다.

이것이 중도를 이루는 올바른 삶의 법칙이다.

 

 

올바른 삶의 방식인 중도는

도덕적 행위를 가르쳐 주기를 자처하는 어떤 사람에게 의해서 만들어진 율법이 아니다.

중도적 올바른 행위는 어떤 초자연적인 힘이 두려워서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타당성 때문이다.

올바른 행위는 자기 정화라고 하는 매우 명확한 목표를 향하여

자기 스스로가 행하는 수행이다.

그것이 깨어있음의 의미요, 중도의 의미다.

수학적인 논리나 과학적 지식으로 해명될 수 없는 그런 것이다.

 

「중도의 삶」

부처의 말이라서 해서 선반 위에 올려놓고 바라만 볼 일이 아니다.

 

 @영상: 도락산에서

<흐르는 곡: 기도/김수철작곡(대금연주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