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空)이란 부정적인 말의 의미

2009. 6. 29. 05:12야단법석

 

 

공(空)이란 부정적인 말의 의미

 

진리는 긍정적인 마음에서 나온다. 그런데 불교는 부정적인 말들이 많이 나온다.

 무아(無我), 무아소(無我所), 무심(無心), 무애(無碍), 공(空), 무(無) - 이런 말들은 부정적인 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의아심을 가지게 된다.

분명 진리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데는 두 가지 길이 있다.

 긍정적인 방법과 부정적인 방법이 그것이다. 붓다는 부정적인 방법을 택했다.

그리고 그 부정적인 말을 강조했다. 그것은 그 나름대로의 분명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긍정적인 방법으로 진리를 설명하고자 한다면 그 긍정적인 언어는 한계를 긋기 때문이다.

긍정적인 모든 언어는 한계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부정적인 언어는 한계성이 없다.

부정적인 것, 그 자체가 이미 한계성을 초월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존재를 일러 <전체>, <신>, <유일자> 라 부른다고 하자.

이름 지을 수 없는 존재, 그 자체를 <전체>, <전지전능자>라 부르는 그 순간

존재 그 자체는 그 이름 속에 갇혀버리게 된다. 한계 너머에 있는 것이 한계 속으로 들어와 갇혀버리게 된다.

<전지전능자>라고 부르는 그 순간 <…이 끝나 버렸다>는 개념이 생긴다.

<…하고 있다>는 동사의 현재형으로서의 ing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게 된다.

삶이란 것도, 진리라는 것도 고정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항상 진행되고 또 진행되어 가는 약동하는 생명과 같은 것이다.

그것의 고정은 죽음과 같은 것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무엇이라고 정의된 것은 진리가 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영원불변하고 전 우주의 근원이요, 궁극적인 실재를 힌두교인 들은 <브라흐만(brahma)>이라고 부른다.

이는 내면의 참다운 자아 즉 ‘아트만’과 동일한 것으로 처음부터 무속성(無屬性)이며 비인격적이었다.

그러나 힌두교인 들은 이를 유일신 사상으로 받들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브라흐만을 찾는다.

이런 유일신 사상에 매혹되어 이를 숭배하는 사람들이 지금도 많다.

그러나 <브라흐만(brahma)> 이라고 부르는 그 순간 그것은 이미 완벽성에 도달해 버린다.

여기, 이제 살아 있는 본질, 그 자체로서의 브라흐만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무속성이고, 비인격적인 것이 신이라고 부르는 그 순간 존재 그 자체는 <신>이라는 명사 속에 한정되어 버린다.

하물며 처음부터 절대자로 숭상되는 유일신을 추앙하는 종교는 더더욱 논할 것이 못된다.

 종교적 이념을 떠나 생각해 보라. 존재 그 자체는 하나의 명사 속에 가두어 두기에는 너무도 넓고 크지 않는가?

그러므로 긍정적인 언어를 통해서는 결코 존재 이 자체를 설명하거나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붓다는 부정적인 방법을 택했다. 붓다는 이를 <수냐(공)>라 불렀다. 절대무(絶對無), 공(空)이라 불렀다.

무(無), 이 말을 들어라. 무(無), 이를 맛보라. 모든 긍정적인 언어들을 <무>라는 이 심연(深淵)으로 밀어 넣어라.

그러면 더 이상 한계성에 갇히지 않을 것이다.

<신이여>라고 부르는 그 순간 거기 한계가 있다.

<신이여> 라고 부르는 그 순간 존재는 <신>이라는 단어 속에 갇혀 버린다.

거대한 바다의 파도는 조그만 커피 잔 속에 갇혀 버린다.

그러나 그것을 <무>라고 부르는 그 순간, 모든 한계는 사라져 버린다.

이런 이유 때문에 붓다는 <무(無, 空)>를 통하여 존재를 설명하려 했든 것이다.

 

그러나 기억하라. 붓다의 <무>는 아무 것도 없다는 허무로서의 <무>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라.

붓다의 <무>는 결코 허무로서의 <무>가 아니다.

허무로서의 <무>가 아니라 빈 거울, 그 상태인 수냐(공)로서의 <무>인 것이다.

때 묻지 않은 거울이 모든 것을 분명히 비추듯 텅 빈 그 마음을 공이라 했다.

고요한 물에는 사물이 비추어지지만 출렁대는 물에는 사물이 비추어지지 않듯

맑고 고요한 그 마음을 일러 무(無)라 했다.

망상의 물결이 사라진, 분별의 물결이 사라진 그 마음을 무(無)라 했다.

 

붓다가 <무>라고 말했을 때 그것은 <형체가 없는 것>, <모양이 아닌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럼으로 <형체가 없는 것>은 존재라고 정의할 수 있다.

모든 것이 그 속에 있으며 그것은 또한 모든 것보다 크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 세상 모든 것들, 모든 개체들을 합쳐 놓은 전체보다 더 크다. 이를 이해해야 한다.

전체는 부분의 합계보다 더 높은 어떤 차원이다.

아름다움이란 사물을 구성하고 있는 구성조직보다 더 높은 어떤 차원이다.

<총계(總計)>는 <전체>가 아니다. 부분의 집합으로서의 <총합계>는 결코 <전체>가 될 수 없다.

<전체>란 부분의 총합계보다 더 높은 어떤 차원이다.

<총합계>보다 더 높은 차원, 이것이 삶의 경험이요 진리에서 느끼는 맛이다.

 

<무>는 <형체가 없음>을 뜻한다고 앞서 말했다.

모든 것을 하나로 합쳐 놓는다 해도 결코 존재 그 자체로 만들 수는 없다.

존재는 부분들의 총합계보다 더 높은 어떤 차원이기 때문이다.

총합계보다 더 높은 차원, 이것이 존재의 아름다움이며, 삶이 가지는 길이다.

그것이 진리를 찾는 의미이며 존재로서의 진리에 사는 삶이

왜 그렇게 형언할 수 없는 기쁨으로 넘치고 있는가 하는 그 이유다.

축제로서의 삶의 의미, 진리의 희열이란 바로 이것이다.

   

무한을 설명하는 데 붓다는 언제나 <무>를 사용했다.

그것은 어떤 것에 대한 특질을 인정한다면 그 특질이 마침내는 결과를 한정시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붓다는 말한다.

부정하라. 제거하라. <이것은 아니다> <저것도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만을 계속하라.

그때 모든 부정과 거부의 뒤에 남아 있는 것이 있을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서의 <없음> 즉 무(無)란 정말 아무 것도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없는 것이 아니라 가득 차 있다는 의미다. 이루 형언할 수 없이 충만해 있다는 의미다.

이 형언할 수 없는 충만이 <무>라는 부정적인 언어를 통해서 설명되어지고 있는 것이다.

 

너무나 설명적이고 논리적인 카테고리만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분석적인 것밖에 모르고 있다.

분석적인 이것이 그들에게 있어서는 언제나 문제점이다.

문제점은 존재, 그 자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분석적인 그들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그들의 마음에는 전체를 전체 그대로 볼 수 있는 통일성이 결여(缺如)되어 있기 때문이다.

 

통일성의 결여는 어디서 오는가? 그것은 진리에 대한 믿음의 결여에서 온다.

진리는 항상 전체적이다. 분석된 부분이 아니라 통일된 전체이다.

그럼으로 진리에 대한 믿음이 없는 자는 항상 부분을 보게 된다. 부분을 보는 자는 항상 논리적이 되고,

분석적이 되고, 어떤 카테고리에 집착하게 된다. 그것이 분별하는 마음이요, 망상심이요, 이기적인 마음이다.

잎과 줄기 열매에 집착하여 이를 즐기는 자는 나무는 볼 수 있지만 숲은 보지 못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지식과 알음알이로, 이기적인 마음으로, 논리적으로 분석하는 자는 진리에 대한 의심이 생기고,

의심이 생기면 믿음이 약하기 때문에 진리란 숲 전체를 보지 못한다.

진정한 숲을 보기 위해서는 진리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화엄경>에 이르기를 “진리에 대한 믿음(信)이 도의 근원이요,

공덕의 어머니로서 모든 선의 뿌리(善根)를 길러낸다”고 했다.

 

진리에 이르는 길은 두 가지가 있다.

믿음을 가지고 가는 길과 그렇지 못한 경우다.

그 수행의 차이는 어떻게 다른가?

원숭이 새끼를 보라. 새끼 원숭이는 엄마 원숭이가 돌아다닐 때는 엄마에게 꼭 매달린다.

그러나 고양이 새끼는 그렇지 않다. 고양이 새끼는 가련하게 혼자 울기만 한다.

그러면 엄마 고양이가 새끼의 울음소리를 듣고 와서 뒷덜미를 물고 간다.

원숭이 새끼는 자칫 엄마 원숭이를 잡은 손을 놓치게 되면 떨어져서 다칠 우려가 있다.

떨어지고 안 떨어지고는 새끼 자신의 힘의 강도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양이 새끼의 경우는 이런 위험이 전혀 없다.

엄마 고양이가 그 자신의 뒷덜미를 물고 안전하게 목적지에 데리고 가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지식과 분별로서 찾아가는 독립적인 수행의 길과

불타를 믿고 진리의 소리에 믿음을 가지고 이에 의지하여 전적으로 내맡기는 신앙의 길과의 차이다.

어두운 길을 홀로 가는 자와 등불을 가지고 가는 자와의 차이다.

 

물고기의 성품은 물을 의지하듯이 사람들의 성품은 오직 오욕락(五慾樂)에 의지하여 이기심을 낸다.

그럼으로 이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바른 진리에 대한 바른 믿음이 필요하다.

그래서 경은 믿음의 4 가지 길을 말하고 있다.

먼저 법을 믿고, 다음에 부처를 믿으며, 나중에 대중 및 계율을 믿는 것이다. 이는 지도론에 나오는 이야기다.

비유하면 사람이 중병에 걸려 약을 먹는 것과 같아서 만일 병이 나으면 약(法)이 묘한 것을 믿고,

그 약이 묘한 것은 반드시 의사(부처님)에게 달렸기에 곧 의사(부처님)를 믿는다.

그런데 의사(부처님)가 묘하고 약이 좋더라도 병자를 잘 보살피는 사람(대중)이 필요하다.

그럼으로 병자를 보살피는 사람(대중)을 믿게 한다.

계율이란 약의 복용방법과 같은 것이다.

 같은 병을 치료하는 약이라 할지라도 식사 전에 먹어야 하는 약과 식사 후에 먹는 약이 있듯

일에 따라 선후가 있고 경중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모든 진리는 부처 이전에 이미 있었다.

그러나 진리의 위대함과 오묘함을 체감하는 자만이 진심으로 부처를 믿게 된다.

진정으로 부처를 믿는 자는 부처님의 말씀을 의심 없이 따르게 된다.

자기의 소리를 내지 않고 진리의 소리를 믿는 바른 마음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모든 경전은 “여시아문(如是我聞)”으로 시작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런 이유에 기인한 것이다.

 

진정한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마치 어머니가 애기를 낳는 것과 같이 고통스러운 것이다.

 열 달이 차야 산모가 분만하듯 그것은 갑자기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구도의 긴 과정 속에서 성취되기 때문이다.

진리에 대한 진정한 믿음을 가진다는 것은 곧 계속해서 새롭게 태어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산모가 출산에서 고통을 느끼듯 그 순간은 고통이지만

그 고통 뒤에 새로운 생명이 태어난다는 것을 지켜보고 그 사실을 받아들이면서 환영할 때 고통은 아름다운 것이 된다.

 바로 그 고통을 통해서 사람은 성장하고 믿음에 확신을 가지게 때문이다.

성장을 통해서, 사랑을 통해서 사람은 성장하는 것이다. 고통이 없는 성장은 일찍이 존재한 일이 없다.

그럼으로 진리에 대한 믿음을 갖고 가는 구도자의 길은, 보살행은 아름답지만 고통스러운 길이다.

 

진리를 아는 것은 기나긴 여행이다.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

 진리가 내려올 수 있기 전에 그대는 진리를 싣고 갈 수레가 되어야 하며

 찾아 올 그 손님을 위해 완전히 빈 그릇이 되어야 한다.

그대가 비어 있을 때만이 손님을 맞을 주인이 될 수 있다.

이기적인 마음, 분별하는 마음을 비울 때 그대는 그대 마음의 진정한 주인이 된다.

 

믿음을 가져라. 진리에 대한 믿음을 가져라.

성인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진실한 마음을 가져라.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진리를 구하는 그대의 마음에 달려있다.

구하는 자의 마음이 올바르지 않으면 바른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모래밭에 씨를 뿌려 곡식의 열매를 얻고자 하는 것과 같다.

비린내 나는 생선을 만진 손으로 꽃을 만진들 손에서는 꽃향기 대신 비린내만 날뿐이다.

이기심을 버리고, 의심을 버리고, 분별하지 않는 마음이 되어라.

그것이 공(空)한 마음이요, 무심이다. 그것이 진실한 마음이요, 바른 마음이다.

그것이 진리를 향한 수행의 지름길이다.

 

@영상: 도락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