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存)

2009. 5. 2. 02:21야단법석

 

(삼각산 승가사의 마애불)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存)

 

부처님이 이 땅에 태어나실 때『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存)』이라고 외쳤다고 합니다.

이 말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이 세상 하늘과 땅에서 내가 오로지 있을 뿐이다" 라는 의미입니다.

세속적인 의미로 본다면“내가 최고요, 유일자다”라고 하는 의미가 됩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하신 이 말은 그런 오만한 뜻을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상대적인 의미와 절대적인 의미의 두 가지 뜻이 숨어 있습니다.

 

상대적인 의미에서 본다면 삼라만상 모두가 나를 중심으로 의미를 가지고 있으면서

내가 그 중심의 핵에 해당된다는 의미입니다.

비유하자면 씨앗의 핵이 병들어 있으면 아름다운 꽃과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고,

씨앗의 핵이 건강하면 아름다운 꽃과 좋은 열매를 갖는 것과 같이,

삼라만상의 중심에 서있는 내가 바르고 정직하고 기쁘면,

따라서 세상이 바르고, 화목하고, 즐겁지만은

만약 내가 괴롭고, 슬프고, 바르지 못하다면 세상이 괴롭고, 슬프고, 바르지 못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모든 것의 중심에 내가 위치하고 있음으로 “나”는 유일한 존재이며,

 또한 중심에 서있는 “나”는 무엇에 의하여 좌우되는 존재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에는 간과되어서는 안 되는 또 다른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중심의 핵에 서 있는 “나”의 본성은 청정하고 모든 고통과 번뇌를 여읜 참된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럼으로 그 중심에 서 있는 내가 청정하고 희열의 불꽃이기 때문에

이를 통하여 세상의 빛이 될 수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일예로서 가정의 경우를 들어봅시다. 집안의 가장(家長)은 가족의 중심이 됩니다.

 따라서 가장이 고통스럽고 괴로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 집안사람 모두가 괴롭고 불편해 질 것입니다.

반대로 가장이 항상 즐거운 마음으로 희망에 차있다면 그 집안의 가족도 또한 희망과 기쁨이 넘칠 것입니다.

그럼으로 세상살이를 함에 있어서 내가 기쁜 마음을 가지면 세상이 밝게 보일 것이며,

내가 어두운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세상은 따라서 어둡게 보일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흔히들 이렇게 말합니다.

『세속을 살아가는 중생은 부딪치는 것마다 고통인데 어떻게 매일 기쁜 마음을 가질 수 있겠는가?

현실은 괴롭고 고통스러운데 기쁜 마음을 가지라는 것은 세속을 등진 이들이거나,

아니면 전혀 세속을 알지 못하는 자들의 헛소리에 불과한 허무맹랑한 소리에 불과한 것이다.』라고.

 

그러나 이는 진실로 어리석은 말입니다. 세상의 일은 근본적으로 괴로운 것도 슬픈 것도 아닙니다.

내 욕망이 있기 때문에, 그 욕망이 충족되지 않았기 때문에 분노가 일어나고, 고통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욕망이 살아지면 사실 세상의 일은 슬픈 것도, 기쁜 것도 없는 것입니다.

문제는 내 욕망이지 세상의 일은 아닙니다.

그럼으로 같은 일을 하드라도 마음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즐거움과 괴로움이 교차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가난한 넝마장수 두 분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매일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쓰다버린 종이와 라면박스 같은 종이상자를 주어서

 그것을 팔아 생계를 꾸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양복을 잘 차려입고 외제승용차를 끌고 다니는 한 청년을 보고 혼자 말로 이렇게 한탄을 했습니다.

『누구는 부모 잘 만나서 외제차 타고 다니면서 호의호식하는데 도대체

나는 한 끼 식사를 벌기 위해 이 짓을 하고 살아야 하니 도대체 산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또 다른 신세 한탄이 나오고,

자신의 신세 한탄이 새롭게 나올 때마다 마음은 자꾸 더 우울해졌습니다.

 마음이 그렇게 우울해지자 하던 일조차 하기가 싫어졌습니다.

일을 하지 않으니 하루 한 끼 먹을 식사비도 벌지 못하고

마침내 허기진 몸은 일은 고사하고 이제는 한끼 먹는 것조차 길거리에 구걸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넝마장수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내가 아니면 이 물건들은 모두가 쓰지 못하는 쓰레기 될 것이다.

내가 아니면 누가 이를 치울 것인가? 천직(天職)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이 일로 나는 일을 할 수 있는데 공연히 허망한 마음을 가져 마음을 괴롭힐 것이 무엇이며,

 또 무슨 이익이 되겠는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것인데, 할 수 있을 때 이것이라도 열심히 하자.

 또 내게는 건강한 두발이 있는데 외제 승용차가 무슨 필요가 있을까?

어차피 이 땅에 두고 갈 육체를 호의호식한다고 해서, 좋은 차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이를 가지고 갈 것인가?

 한 끼의 식사라도 내게 맛있으면 되지 진수성찬이 뭐 그리 중요한가?』

이 사람은 마음을 이렇게 가지자 하는 일이 즐겁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더욱 부지런히 일하게 되고 수입도 늘어나 나중에는 넝마장수의 일도 하지 않아도 되게 되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같은 환경인데도 그 마음을 쓰는 방법에 따라 한 사람은 고통스럽게 삶을 살게 되고,

 다른 한 사람은 즐거운 삶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그 원인이 무엇일까요?

고통을 초래한 자는 자기가 세상의 중심임을 망각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행복을 누리게 된 사람은 모든 것의 중심에 서 있는 사람입니다.

같은 일이라도 이렇게 마음을 갖는 자세에 따라 고통스러운 일도 되었고, 즐거운 일도 됩니다.

그럼으로 세상살이에는 무엇을 하든, 어떤 처지에 있던 자기가 바로 중심이며,

자기가 바로 유일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세속적으로 상대적인 우월감을 가져도 안 되지만,

 또한 상대적인 열등감을 가질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이는 모두 내가 모든 것의 중심임을 망각한 부질없는 허망한 마음의 장난임을 알아야 합니다.

 

여기에 또 다른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한 성당에서 부자와 거지가 동시에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 기도하러 왔습니다.

부자는 주식투자로 10억을 벌아야겠다고 기도하였고,

또 옆자리에 앉은 거지는 한끼 식사를 푸짐히 할 수 있는 1만원만 벌기를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부자는 거지가 하는 기도가 귀에 거슬려 자기 돈 1만원를 주면서 나가라고 소리쳐 좇아냈습니다.

그러자 거지는 즐거운 마음으로 그 돈을 받아지고는 자기의 기도가 받아드려졌다고 생각하고는 소리 없이 사라졌습니다.

 

생각해 봅시다. 세상의 일이란 이와 같습니다.

1만원을 푼돈으로 보느냐 거금으로 보느냐는 주는 쪽이 아니라 받는 쪽이 문제가 됩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환경이나, 사물에 대하여 고통스럽고 불편한 마음을 가지지만

사물이나 환경 그 자체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문제는 환경이나 사물에 대한 우리의 마음가짐이지 환경이나, 사물에 행복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세상의 일이란 오로지 마음먹기에 따라 그 가치가 달라질 뿐

일에 어떠한 절대적 가치가 있기 때문에 좌우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이란, 그 인식의 가치란 단지 인간의 분별에 지나지 않으며,

그 분별이 차이가 나는 것은 곧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욕망의 크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럼으로 경전에 이르길『삼계허망(三界虛妄)이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다.』라고 했습니다.

“욕망의 세계나, 물질의 세계나, 정신의 세계라는 것은 모두가 허망한 것이요,

삼라만상 모두가 내 마음이 지은 그림자에 불과 한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식도락을 즐기는 송(宋)나라 태종(太宗)이 어느 날 대신들을 모두 모아놓고

『먹는 음식 중에서 어떤 음식이 세상에서 가장 희귀하고 맛있는 것인가?』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모든 사람이 갖가지 희귀한 음식이름을 되었지만

다만 재상인 소역간이란 신하는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그래서 황제는 의아심이 생겨서 그에게 다시 질문했습니다.

『모두들 한두 가지 음식이름은 다 데는데 너는 왜 말이 없느냐?

혹시 내가 모르는 특별한 음식이라도 감추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자 그는 말했습니다.

『입에 맞는 것이 가장 맛있는 음식입니다(適口者珍)』

 

『시장이 반찬이다』이란 말이 있듯이 진수성찬이란 얼마나 허기졌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처럼,

 세상의 모든 일은 이렇게 그 마음에 달린 것이지 따로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일은 처음부터 즐거운 것도, 괴로운 것도 아닌 것입니다.

큰 것도 아니고 적은 것도 아닌 것입니다. 다만 허망한 마음이 일어날 때 그기에 보다 큰 욕망이 일어나고,

 그 욕망이 일어나면 그기에 고통이 따라오고, 고통이 번뇌를 낳을 뿐입니다.

그럼으로 그 마음을 쓰는 “나”는 항상 모든 것의 중심에 서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 중심에 서 있는 것은 바로 유일한 “나”이기 때문에

나는 세상 모든 것에 대하여 동요되지 않는 절대적인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일을 할 때도 그 일의 중심에 내가 서있어야 합니다.

모든 일에 내가 중심에 서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달리 말하면 모든 일에 내가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주인은 곧 모든 것에 중심에 서있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임제선사(禪師)의 어록(語錄)에『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入處皆眞)』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행동하는 모든 곳에 주인의식을 가지면,

하는 일마다 모든 것이 진실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모든 일에 “내”가 손님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바로 그 일에 주인이라는 의식을 갖는 것이 바로 모든 것에 “내”가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청량산 응진암)

 

둘째로 절대적인 입장에서 “나”는 나의 본래면목 즉 나의 본성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나의 본성은 인간의 본 성품이며, 우주의 본 성품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느 무엇과도, 어느 누구와도 비교될 수 없고,

무엇에도 걸림도 받지 않는 자유자재한 절대적 유일한 존재인 “나”를 가리킵니다.

 이는 곧 다름 아닌 “참된 나”즉 진아(眞我)를 말하는 것입니다.

철학이나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절대아(絶對我)”“대아(大我)”라는 말과 같은 맥락에서 말한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말하는 “나”라고 하는 말, “마음” 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모두가 상대적인 말들임으로 이런 상대적인 것을 벗어난 존재가 “절대아”라는 뜻이 됩니다.

 

예컨대 “내 마음”이라고 할 때 이 맘은 곧 “너의 맘”과 다르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나 상대를 벗어난 “참된 나”는 “나”도 벗어나고, “너”도 벗어난 것을 말합니다.

이는 곧 대해탈인, 대자유인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탄생게에서 “유(唯)”라고 하는 말은 “절대적”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나(我))"라고 한 것은 곧 절대적 생명체를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본다면 생명체의 주체는 우리가 알고 있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그런 몸도 아니며, 그런 정신도 아닙니다.

이 둘이 하나이기 때문에 “아”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생명체가 아무것도 걸림이 없다는 말이니 이는 시간과 공간을 벗어나고,

모든 번뇌나 고통에서 벗어난 영원한 모습으로 남아 있는, 즉 상대적인 것을 벗어난 “절대적 나”를 말합니다.

이는 또한 우주의 본체와 같은 성품입니다.

삼라만상의 본래 성품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무엇과 상대적인 것이 아님으로 불교 교학에서는 일심(一心)이니, 법신(法身)이니,

진여(眞如)니, 법성(法性)이니 하고 갖가지 이름을 붙이고 있습니다.

 

번뇌도 깨달음도 모두 이 마음에서 일어납니다. 괴로움도 기쁨도 모두 이 마음에서 일어납니다.

부모도 자식도, 사회도 국가도 모두 이 마음이 있기 때문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마음이 머무는 곳은 곧 이 육신이며, 이 육신이 바로 절대아가 깃들고 있는 장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상천하에 오직 내가 있을 뿐이라고 한 것입니다.

 또한 하늘과 땅 사이에 오직 내가 있다는 것은 모든 것에 걸림이 없다는 본체를 가리키는 말이 됩니다.

오직 하나뿐인 것은 상대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걸릴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무애(無碍)한 것입니다. 하나 뿐인 것은 선악을 벗어나 절대적으로 청정한 것입니다.

 깨끗한 것입니다. 이는 추함과 더러움에 상대되는 그런 말이 아닙니다.

이 “절대아”는 청정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 청정한 절대아가 머무는 곳도 또한 청정한 곳이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시간과 공간을 벗어난 몸은 우리가 말하는 상식적인 그런 몸이 아니기 때문에

몸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지만 이는 바로 지혜의 몸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지혜의 몸을 <반야경>으로 말하면 “반야신(般若身)”이 됩니다.

<여래장경>으로 말하면 진여(眞如)요, 여래장(如來藏)이 됩니다.

 

이를 달리 교학에서는 “법신의 체”라고도 합니다.

이 법신의 체(體)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중생의 마음이 바로 “법신의 체”라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기신론>에 “대승의 법이 곧 중생심이다”라고 했고,

또 “일법계 대총상 법문체(一法界大總相法門體)”라고 한 것입니다.

여기서 “일법계”의 “일(一)”은 둘에 상대되는 하나가 아니라 절대적인 하나를 말합니다.

 법계는 곧 삼라만상의 가리킵니다. 대총상이란 일미평등(一味平等)한 것을 뜻합니다.

 법문의 체란 곧 삼라만상의 본원인 궁극적 실체라는 뜻입니다.

이는 모두 중생심의 근원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 중생심의 근원이 바로 영원불멸의 존재이며, 지혜의 빛이며,

상대적이 아닌 절대적인 궁극에 청정한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모두 중생의 마음인 근본자리가 바로 불성(佛性)이며,

이 불성을 지닌 중생은 본래 유일한 존재이며, 해탈인 이며, 자유인임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이란 바로 이점을 밝혀주는 진리의 말씀인 것입니다.

부처님이 이 땅에 육신을 가지고 태어나 외친 탄생게는

 모든 중생들에게 이런 불성의 의미를 알리기 위함인 것입니다.

이런 불성을 깨달은 자가 어찌 세속(世俗)의 작은 재물이나 명예에 얽매여 고통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삼각산 도선사에 오르다 보면 이런 글귀가 새겨진 두 석주(石柱)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삼일수심천재보(三日修心千載寶)

 백년탐물일조진(百年貪物日朝塵)』

삼일 동안 닦은 마음은 천냥의 보배가치를 지니지만

백년동안 탐한 물건 하루 아침의 티끌이란 의미입니다.

 

오늘은 부처님 오신날입니다.

삼일이 길다면 오늘 이 하루만이라도 그런 날이 되길 기원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