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6. 29. 23:12ㆍ야단법석
바른 마음을 가질 때 진리의 소리가 바르게 들린다.
어느 날 밤 부처님이 설법을 끝내고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 이제 시간이 되었으니 그대들은 가서 마지막 필요한 일을 하라.
결코 그것을 잠들기 전에 잊어서는 안 된다.”
부처님의 말은 잠들기 전에 명상하는 것을 잊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날 밤 한 도둑과 창녀가 그곳에 몰래 숨어들었다가 그 소리를 들었다.
부처가 “자 이제 시간이 되었으니 그대들은 가서 마지막 필요한 일을 하라.”
라고 말을 했을 때 그 창녀는 이렇게 생각했다.
“이크!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지금부터 일할 시간인데 가서 일을 시작해야겠다.”
그 도둑 역시 이렇게 생각했다.
“나는 지금 어두운 곳에 숨어 있는데 이 사람은 내가 도둑인지 안다.
잠들기 전에 그 일을 하라고 말하지 않는가? 이 사람은 이상한 사람이다.
빨리 도망쳐야겠다. 지금쯤은 일을 마칠 시간인데.
그렇지 않으면 오늘밤은 잠은 다 잤다.”
수천 명의 비구 비구니들은 명상에 들어갔다.
그리고 창녀는 그녀의 일터로 나갔고,
그 도둑은 자기가 일 할 곳에 찾아갔다.
진리의 소리란 정직하고 바른 마음가짐을 가질 때 바르게 들린다.
그것은 특정인을 위한 것도 아니고 어느 한쪽을 비난하기 위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중생들은 이기적인 마음 때문에 진리를 왜곡하고,
진리를 왜곡함으로써 입으로 왜곡된 말을 늘어놓게 되고,
그릇된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천 가지 만 가지 업을 짓는 것이다.
그럼으로 진리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바른 마음을 가지고,
바른 말을 하고, 바른 행동을 해야만 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팔정도(八正道)를 말씀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십악(十惡)을 멀리하고
십선(十善)을 행하는 그런 마음을 가질 때 진리의 소리가 바르게 들린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경계선을 긋고 측정함으로써 그들 소유의 땅을 쪼갠다.
그러나 모든 것을 싸안고 있는 저 높은 하늘을 쪼갤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나인 하늘이 이 모든 것을 싸안고 있다.
그 하늘은 내 것도 아니고, 네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은 만인의 하늘이지 나만의 하늘이 아니다.
진리란 그렇다. 하늘과 같은 것이다.
진리를 깨닫지 못한 사람은 이기적인 사람이요, 무지한 사람이다.
무지하기 때문에 하나인 진리를 자기본위로 입맛대로 해석하고 따른다.
가를 수 없는 하늘을 둘로 가르고 셋으로 가르고 있다.
그래서 우열이 있고, 시비선악이 있게 되는 것이다.
진리란 보편타당한 것이요, 객관적인 것이 되어야 하는데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
한쪽을 보면 다른 쪽을 생각하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의 이기적인 마음은 항상 두 가지 결론을 택한다.
좋지 않으면 싫은 것이고, 옳지 않으면 그른 것이라고 결론 내린다.
그래서 갈등이 생기고 갈등은 투쟁은 낳는다.
우리들이 확신을 갖고 또 좋아하는 것들은
모두가 우리들의 주관적인 마음에 기인 된 것이다.
비록 이것들이 사회적으로 그 권위가 인정되고,
논리적으로 모순 없이 잘 추론된 것이라 할지라도
이것이 진리의 기준이 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이들은 어느 것이나 그와 상반된 견해가 따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상반된 배후에는 개인적 이기심 내지 집단적 이기심이
깔려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와 <너>로 갈라지고, 사회적 갈등이 일고,
문명 간의 충돌이 야기되는 것이다. 일례를 보자.
사람들은 폭력을 싫어한다. 더욱이 살인을 싫어하고 증오한다.
그러나 살인자들은 죽여야 한다고 사형 제도를 고집한다.
내 생명은 애걸복걸하면서도
남의 생명은 정의의 실현으로 단호히 처단해야한다고 외친다.
또 사람들은 평화를 갈구한다.
평화를 갈구하기 때문에 전쟁을 일으키고 남의 나라를 정복하려고 애쓴다.
테러란 범죄행위요 비이성적인 추악한 행위라고 비난하면서
이를 뿌리 채 뽑아야 한다고 더 큰 테러(전쟁)를 일으킨다.
한쪽은 신의 이름을 외치며 공격하고
다른 한쪽은 신의 이름을 옹호하기 위해 성전(聖戰)을 외치고 있다.
오늘날의 세계란 힘 있는 자의 소리가 정의가 되고,
군사력과 경제력이 정의의 원천이 되고 있다.
미래의 희망은 청소년의 교육에 있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그 교육도 마찬가지로 타락하고 있다.
입시위주의 교육은 인성을 파괴하고, 갈등과 투쟁의식만 불러오고 있다.
명문학군을 찾아가는 바람에 그 학군의 집값은 천정부지로 올라
부동산투기를 조장하고, 학원과 족집게 교사가 판을 치다.
장사꾼 마냥 교사라는 직업도 장사꾼이 되어가고 있다.
그래서 교사가 학생을 체벌하면 그 학생의 부모가 교사를 찾아가
폭행을 서슴지 않는다. 오로지 경쟁에 이겨야만 한다는 입시위주의 교육은
여러 가지 사회악을 조장하고 있다. 배움을 향한 사제 간의 도는 무너지고,
사회는 인성(人性)을 향한 무연(無緣)의 자비교육이 아니라
대학입시와 학군(學群) 등 유연(有緣)의 이기적인 집단에 의한 투쟁과 갈등으로 만연하고 있다.
이런 이야기가 한 때 뉴스에 보도된 적이 있었다.
온 국민이 태풍 ‘루사’의 피해로 슬픔에 젖어있고,
자원봉사와 수재민을 위한 모금활동을 전국적으로 벌리고 있는데,
모 지역의 시장 군수가 골프대회를 개최했다.
골프는 하고 싶은데 세상들의 눈총이 두려웠든지, 아니면 일면의 양심은 있었든지
“수재민 돕기를 위한 골프대회”라 했다.
역사 속에도 이런 아이러니컬한 이야기가 적지 않다.
영국은 본래 해적왕국이었다. 바이킹의 후예들이 세운 왕국이었다.
강력한 선대를 이용하여 주변의 상인들과 남의 나라를 침략하여 노략질로 부자가 된 나라였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그들은 모든 일에 ‘젠틀맨 쉽 (gentlemanship)'을 내세운다.
세계에서 가장 자유로운 나라라고 하는 미국도 마찬가지다.
구라파에서 추방된 갖가지 범죄자들과 일확천금의 꿈을 안고 몰려든 무법자들이 세운 나라가 미국이다.
원주민을 내쫓고 신천지를 발견했다고 요란한 광고로 이룩한 나라가 미국이다.
그런 나라가 지금은 자유와 평화를 내세워 약소국가들을 경제적으로, 군사적으로 주무르고 있다.
평화주의란 이름으로, 정의와 자유로운 국가임을 외치고 있다.
모두가 자신의 입장으로 보면 진리요 정의다.
그러나 상대편에서 보면 그렇지 못하다.
자기의 이기적인 마음이 힘을 바탕으로 자유와 정의와 평화를 외치고 있다.
우리가 말하는 사회적 윤리도덕이란 것도
시간이 지나면 불완전한 것이요, 반쪽에 불과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낙태는 살인행위요, 범죄행위라고 여겼다.
그러나 지금 이를 지지하는 자는 극소에 불과하다.
그것도 대중적인 것이 아니라 결혼하지 않은 일부 성직자들이나
출가한 스님들 내지 홀아비 철학자가 외치는 독백에 그치고 있다.
그나마 신세대 젊은이들로부터 시대에 뒤떨어진 편협된 도덕이상주의자 내지
사이코 정도로 취급되어지는 것이 다행스럽게 여겨질 정도로 되어가고 있다.
인간의 이기적인 마음은 자연현상까지도 변하게 만든다.
태풍을 보자. 사람들은 태풍을 무서워한다.
몇 해 전인가 태풍이 한반도를 비껴가는 바람에 일본 지역은 큰 피해를 입었지만
우리나라는 가뭄 해소에 큰 기여를 한 적이 있다.
오랜 가뭄 탓에 적은 비로서 부족했기 때문에 오히려 큰비를 몰고 오는
태풍을 그렇게 고마워했다.
그러나 ‘루사’와 같은 태풍은 엄청난 재해를 가져왔다.
사람이 죽고, 가옥이 파손되고, 도로가 끊어지고, 논밭이 물이 잠기고
도시가 물바다를 이루었다.
태풍은 좋아하는 사람을 위한 천사도 아니고
미운 사람들에게 재앙을 가져다주는 악마도 아니다.
태풍은 무서운 것도 고마운 것도 아니다.
그것은 단지 소금을 먹은 자가 갈증을 느끼듯
자연현상에 불과한 하나의 사건일 뿐이다.
그런데 왜 이런 무서운 재앙이 일어나는 것인가?
이는 모두가 사람들의 이기적인 마음 때문에 자연의 순리를 거슬렀기 때문이다.
좋은 목재를 구하기 위해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도 않은 지구의 오지 아마존을 비롯하여
세계의 숲을 누비며 밀림을 훼손하고,
산업사회의 견인차 역할을 하는 각종의 화학공장과 자동차가 뿜어낸 매연이
지구의 보호막인 오존층을 파괴함으로써 기상이변을 자초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로 지구의 한쪽은 가뭄으로 시달리고 있는데
다른 쪽은 홍수로 물난리를 겪고 있는 것이다.
주변을 돌아보자.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사람들의 이기심을 채우기 위해 산을 뚫어 터널을 만들고,
산허리를 도려내어 도로를 내고, 산을 깎아 골프장을 짓고,
고급 빌라와 별장, 아파트를 짓는 등 악랄한 정도로 자연을 훼손시켰다.
웅장한 바위산은 채석장(採石場)이 되고, 물이 흘러가야 할 수로는 콘크리트와 산업쓰레기로 흐름이 차단되고,
무분별하게 내다버린 버린 각종 쓰레기와 오물들이 산과 강을 오염시키고 뒤덮고 있는데
어찌 자연인들 가만히 있겠는가?
사람들의 마음이 악랄할수록 자연도 사람들에게 똑같이 되돌려주고 있다.
자연의 재앙은 궁극적으로 따지고 보면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욕망과 이기심 때문인데 사람들은 이를 적은 원인에서 찾고 있다.
인과(因果)의 법칙을 외면하고 오로지 ‘네 탓’만 찾고 있다.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진리는 나를 위한 진리요,
남을 위한, 우리를 위한 진리는 아니다.
내 손가락에 박힌 가시는 죽을병이라고 호들갑 떨면서도
남의 목에 박힌 가시는 대수롭게 여긴지 않듯
참된 진리를 아전인수(我田引水)격으로 자기에게 유리하게
갖은 변명을 늘어놓고 있다.
개인도 국가도 모두가 자기본위로 진리를 왜곡하고 있다.
그래서 이슬람인과 기독교인들은 모두가 자기 종교만이 진리라고 외치면서
끝없는 전쟁을 벌이고 있다.
힘 있는 자의 소리가 진리라고 모두가 부와 명예를 찾는데 열을 올리고 있다.
동양의 문화는 서양의 문화와 갈등을 빚고,
정신문화와 물질문명은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다.
그럼으로 우리가 믿고 확신하고 있는 신념이나 지식을 가지고
그것만이 진리이고 다른 것은 진리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태도는
진실을 수호하는 일이 되지 못한다.
전통과 문화를 주장하는 것도 참된 진리가 아니다.
진리의 소리를 바로 듣기 위해서는 먼저 이기적인 마음이 없어야 한다.
또 다수의 힘을 빌려, 사회적 어떤 권위나 전통에 의지하여
어떤 확정된 결론을 내리기보다는
우리의 마음가짐이 먼저 진실 되고 정직해야 한다.
깨어있는 삶이란 이기적인 마음을 버리고,
전통과 권위적인 것에 매이지 않은 진실 된 정직한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맑은 거울에 사물이 바로 비추듯 맑은 마음이라야 진리의 소리가 바르게 들린다.
그래서 부처님은 ‘무심(無心)’을 가르쳤다.
경계에 동요하지 않는 마음이 무심이기 때문이다.
이기적인 마음, 욕망에 꺼들린 마음이 아니기 때문에 무심이라고 한 것이다.
그것이 바른 마음이요, 참 마음이다.
그 마음으로 진리의 소리를 들을 때 진리의 소리는 바르게 들리게 된다.
@영상; 도락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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