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12. 28. 23:23ㆍ야단법석
<도봉산 오봉의 소나무>
삶과 구도
우리들 중생 삶이란 아무리 현명해도 살아가기 위해서는 일을 피할 수 없고,
자식을 두지 않을 수 없으며, 가족을 지키며 생활하기 위해서는 부와 권력을 바라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몸과 입으로 그리고 마음으로 부처님이 이르신 10악업을 짓게 되는 것이 바로 우리들 중생이 삶인 것이다.
물론 그 악업이 모두가 그 나름대로 정당한 이유가 있게 마련이다.
도둑이 도둑질 하는데도 이유가 있고, 강도가 살인을 하는데도 이유가 있다.
먹고살기 위해서, 또는 자식을 위하고,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 등등.
그러나 그것은 항상 지나보면 후회가 남는다.
풀리지 않는 한(恨)이 남게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진실로 정당한 진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진리를 안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험한 산을 오르는 것과 같다.
때로는 암벽을 기어 올라가야 하고, 낭떠러지를 건너 뛸 수 있는 용기도 있어야 한다.
높은 산을 올라갈 때 언제나 거기 위험이 뒤따른다.
그러나 평지를 다니는 사람은 절대로 떨어질 염려가 없다.
사람의 삶과 동물의 삶이 그래서 다른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타락할 수 있지만 동물은 타락할 수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동물에게는 사람과 같은 의식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물들은 죄를 지을 수 없다. 죄를 짓기 위해서는 일종의 자각성(自覺性)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배반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그럴 수 있는 내적 자유가 필요하다.
나쁜 짓을 하기 위해서는 거기 일종의 성장능력이 필요하다. 일종의 파워가 필요하다.
인간만이, 오직 인간만이 좋은 일도 할 수 있고 나쁜 일도 할 수 있다. 모험도 할 수 있고 타락도 할 수 있다.
그럼으로 죄인과 성자는 다르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다.
죄악이 가능하기 때문에 또한 성자 또한 가능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감악산의 소나무>
무엇이 불자(佛子)인가? 누가 부처님의 자식인가?
아무 것에도 점령당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야말로 진짜 불자다.
이것이 진짜 종교인과 가짜 종교인의 기준이다.
무엇인가에 정복되지 않으면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사람,
그런 사람은 그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두려워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남을 해하는 악업(惡業)을 짓지 않더라도 일상의 삶 속에서도 그 자신을 회피하는 방법을 찾게 된다.
그는 무엇인가를 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가 하는 일은 모두 신경질적이다.
그를 방안에 혼자 놔두면 그는 신문을 읽던가. 핸드폰으로 잡담을 늘여놓거나,
음악을 틀어놓고 괜시리 유리창을 열고 닫고 할 것이다.
아니면 가구의 위치를 바꾸어 본다던가. TV를 볼 것이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면 그는 곧장 잠에 떨어져버릴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일상의 삶 속에서 결코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체 깨어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깨어서 불꽃과 같이 앉아 있을 수 있고, 어떤 행동에도 지배되지 않은 채 깊은 침묵 속에 앉아 있을 수 있으며,
자신의 존재를 체험하며 지금 여기를 체험하며 앉아 있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의 삶은 달라 질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이 삶에서 전혀 다른 바이브레이션이 일어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앨버트 슈바이처는 이를 <삶을 위한 숭배>라고 불렀다.
이것이 바로 종교적인 사람의 길이다.
분노를 삭이는 길이며, 어리석음과 애욕과 탐욕의 불길에서 벗어나는 길이며
진리를 향한 길이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종교적인 사람은 종교적인 형식화를 원치 않는 사람이다.
남에게 보이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살기 때문이다.
그럼으로 그가 하는 일은 무엇이든지 기도가 되고 명상이 되는 것이다.
이는 쉬운 것이 아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먼저 마음의 평정이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받아드리는 초원처럼 모든 것에 연민을 가지는 마음이 있어야 하고,
좋은 것에는 축복을 보내는 마음이 있어야 하고,
부정적인 것을 감로로 바꾸는 마음의 전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세상사 일이란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분명한 두 가지 것이 있다.
과거는 지나간 것이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럼으로 지나간 과거사로 현재를 망치 필요가 없고,
오지 않는 미래 때문에 지금 고통을 받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현재다. 이 순간은 머물지 않는 순간이지만 마음은 그렇지 못하다.
그럼으로 지금 바로 이 순간을 번뇌와 고통으로 가슴앓이하지 않고 즐겁고 행복한 마음을 지니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이 깨어있어야 한다.
미움과 질투, 원한과 복수심에 불타는 그 마음에서 벗어나 있어야 한다.
그 길을 일깨워 주고자
일찍이 달마대사가 <이입사행>이란 가르침으로 이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운악산 미륵바위의 소나무들> 삶과 구도의 길은 다르지 않다. 삶이 구도요, 구도가 삶이 되어야 한다. 삶이 그대를 괴롭히고 핍박할 때는 보원(報怨)하는 마음으로 살자. 전생에 진 빚을 갚는다고 생각하며 살자. 삶이 그대에게 더러움을 강요할 때는 초원과 같은 마음으로 살자. 모든 것을 수용하고 거두어 드리는 대초원과 같은 마음으로 살자. 세상은 복잡하다고 말을 하지만 세상사 일은 단순하다. 복잡한 것은 다름 아닌 내 마음임을 자각하며 살자. 무엇인가에 집착하고 분별하는 마음을 잘라버리자. 마음에 따라 붙는 꼬리를 잘라내면 자유로워진다. 꼬리달린 올챙이는 물속에서만 갇혀 살지만 꼬리 벗은 올챙이는 개구리가 되어 물 밖에서도 자유롭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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