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와 키를리안사진

2009. 1. 22. 23:02붓다의 향기

 

 

분노와 키를리안사진


구소련에서는 첩보활동과 더불어 사진 기술이 고도로 발전해 있었다.

그 중에서 키를리안(kirlian)사진이라는 것이 있다.

이는 피사체인 생물을 전장(電場: 대전체의 전기작용이 존재하고 있는 장소)에 놓음으로써

그것에서 방사하는 빛을 필름에 기록하는 방법에서 발전한 것인데

그것은 사람의 오로라(aurora)를 찍을 수 있는 매우 감광성(感光性)이 뛰어난 필름이다.

 오로라는 흔히 후광(後光)이라고도 부르는 것인데 이는 영기(靈氣)를 말하는 것으로

모든 생물체에서 발산되는 극히 미묘한 빛을 말하는 것이다.

부처님의 배후에 드러나는 후광이나,

예수와 같은 그런 성인의 성화 뒷면에 나타나는 빛을 그린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도 오로라의 일종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런데 소련 과학자들에 의하면 키를리안 사진에 나타난 오로라를 통해서 보면

 6개월 후에 나타날 병을 알아낼 수 있다고 한다.

 6개월 후의 건강 상태가 현재 사진에 나타난다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누구도 6개월 후에 나타날 자신의 병을 의식할 수는 있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의사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분명 병은 발생되고 있다.

겉으로는 보기에는 완전히 건강하게 보일 수도 있었지만 병은 이미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단지 겉으로만 나타나지 않았을 뿐이다. 알지 못하는 것은 아직 몸에도 나타나지 않았고,

 마음으로도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러나 오로라에는 나타나 있다고 한다.


사람들 내면에 있는 가장 미묘한 물질인 이 오로라를 심령과학에서는

아스트랄체(astralbody, 聖氣體, 靈體)라고 부르고 있다.

아스트랄 이라는 말은 <별star>이라는 단어에서부터 유래된 된 것으로

<아스트랄> 이란 <별(star)의 몸> 이라는 뜻이다.

즉 별의 빛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뜻이다. 별을 관찰하여

인간의 운명을 점치는 점성학(astrology)도 같은 어원에서 나온 말이다.


키를리안 사진술은 병을 예측할 수 있는 매우 과학적인 발명이다.

그리고 그 확률은 100%에 달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 사진술로 병을 예언하면 일반사람들은 아무도 믿지 않는다.

의사들이 조사를 해보아도 아무 곳에도 증상이 나타나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의사들이란 단지 육체에 드러난 병만을 조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신과 의사들 또한 알아낼 수가 없다고 한다. 정신과 의사들은 오직 마음만을 진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키를리안 사진술은 아스트랄 체에 있는 아직은 밖으로 표현되지 않은 상태를 진단할 수 있는 기술이다.

그럼으로 아스트랄 체에 내재해 있는 상태에서 병은 고쳐질 수도 있다고 한다.

그러면 병은 결코 발병(發病)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감지할 수 없는 상태에서 병은 존재하다가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이는 병의 조짐을 미리 알면 그 병도 외부적으로 발병되기 전에 예방할 수 있다는 의미가 된다.

이것으로 미루어 볼 때 미래의 세계에서는 이러한 현상이 더욱 발전하여 현실적으로 이용될 수도 있을 것이다.

각 병원마다 아스트랄체를 검사하는 기구가 설치된다면 병이 육체적으로 나타나지 않더라도

오로라의 조짐을 통해서 미래에 발생할 병까지도 완전히 사라지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내면의 존재에서도 이와 똑같은 일이 일어난다. 마음을 다스리면 모든 현상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가령 분노가 일어난다면 분노가 일기 전에 분노가 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분노를 심리적으로 고찰하면 분노는 3단계 과정을 거쳐서 일어난다.


분노는 먼저 아스트랄 속에 나타난다. 관심을 기우려 주의하면 분노의 폭풍이 다가 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아직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지만 문을 두드리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분노를 일으킬 때를 생각해 보라. 분노가 일어날 경우 열이 오르고 얼굴은 붉어지고 눈은 충렬되고

심장의 고동은 점차 격해지지 않던가? 그 처음 조짐은 마치 문을 두드리는 노크소리와 같다.

그러나 그 노크 소리는 매우 작다. 그러나 들을 수 있다. 단지 주의해야만 할뿐이다.

 주의하지 않을 때 그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그대의 내면에는 소음이 연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침묵을 지킬 수만 있다면 분노가 와 닿기 전에 분노를 느낄 수가 있을 것이다.

 그때는 분노를 다루기가 아주 쉽다.


두 번째 단계는 분노에 사로잡힐 때이다. 그때는 분노를 밖으로 밀어내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이미 분노에 사로잡혀 그것을 조정할 주체가 없어져버리기 때문이다.

화를 낼 때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분노만이 있을 뿐이다.

그대는 완전히 소유 당한 상태에 있다. 단 한순간만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속에서 그대는 그대 자신을 잃는다.

분노가 그대를 감싸 안는다. 그때 그대는 후회할 일을 한다.

그러나 어쩔 수가 없다. 이미 그 분노를 조종할 주체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 번째 단계는 분노가 사라져버렸을 때이다. 그때서야 자신을 되찾고 후회한다.

그리고 왜 자기가 화를 냈는지를 변명할 구실을 찾고 상대방을 찾아가서 용서를 구한다.

이것이 세 번째 단계이다. 이 세 번째 단계에 와서는 다시는 화를 내지 않겠다고 스스로 맹세한다.

항상 그렇게 한다. 그러나 그 맹세는 쉽게 깨져버린다. 무기력하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이 세 번째 단계에 와서는 스스로 현명하다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현명한 것이다.

그 현명함이란 무엇인가? 고통을 겪은 후에야 생각하는 어리석음이 아니겠는가?


분노가 찾아올 때 이미 깨달아야 한다.

 키를리안 사진으로 그 드러난 오로라를 읽듯이 그 조짐을 읽어야 한다.

 그러나 일단 분노가 들어오면 분노를 다시 쫓아내는 일은 힘들다.

그러나 분노가 찾아 올 때 깨어 있으면 어느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다.

분노를 바라보기만 하라. 그러면 그것을 스스로 증발해 버릴 것이다.

이미 소유된 상태에 있으면 분노를 다시 돌려보내기가 무척 힘이 든다. 불가능하다.

그러나 분노에 사로 잡혀 있는 상태에서라도 분노를 지켜보고 있으면

그것은 단지 그대 안에서 끓어오르기만 하다가 다시 진공 속으로 사라져버린다.

 그때는 다른 사람에게 전혀 피해를 입히지 않게 된다. 단지 그대 자신이 해를 입을 뿐이다.

그러나 첫 번째 단계에서 깨어있게 되면 해를 입는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된다.

그대도 해를 입지 않는다. 탐욕과 어리석음의 병도 이와 마찬가지다. 탐진치,

이 삼독의 병 또한 마음이 6근(根)의 경계에 의해 오염된 병인 것이다.

그럼으로 병의 조짐을 미리 알면 치료할 수 있듯이

자기 마음의 움직이는 근원을 깨달은 자는 행복을 얻을 것이고,

자기 마음의 움직임을 깨닫지 못하고 따라 움직이는 자는 고통과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져

끝없는 윤회의 질곡을 밟아 갈 것이다.


                <2003년 5월 천성산 용주사 사보에서>


'붓다의 향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무위(無爲)와 무소유(無所有)의 삶  (0) 2009.09.02
살림한번 차려볼까요?  (0) 2009.08.28
애욕과 분노  (0) 2008.09.09
시심마(是甚麽)(5)  (0) 2008.06.12
무엇이 경계인가  (0) 2008.03.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