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과 대화엄일승법계도주병서(본문 제11구~20구)

2008. 9. 30. 22:59법성게

 

제4과 대화엄일승법계도주병서(본문 제11구~20구)


『第11句』

無量遠劫 卽一念(무량원겁 즉일념)

0.한량없이 기나긴 시간이 곧 한 순간이고.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작은 티끌이든 일체의 공간이든 간에 일정한 본성을 전재로 한 본체와 형상을 가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역사상 어느 때를 시점으로 잡든 간에 과거, 현재, 미래의 여러 부처들이 처음 발심하여서부터 보현보살의 서원이 表象하는 구도의 길(立普賢願)을 걸어 미래의 궁극에 이르기까지 일연의 역사가 현존의 일시점을 떠나서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따라서 혹은 기침 소리 한번이나 혹은 손가락 한번을 퉁기는 것으로부터 눈썹을 찡그리고 눈을 깜박이는 순간순간이 어느 것이나 여러 부처들의 교화의 순간들과 일치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니 아무렇든간에 말해보라.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것인가.


『現存의 이 자리를 떠나지 않은 채 징명(澄明)한 것,

그렇지만 찾아보았자 틀림없이 잡히는 것이 아닌 것』

(不離當處(분리당처) 常湛然(상담연) 覓卽知君(멱즉지군) 不可見(불가견))


@立普賢願(입보현원): 般若(반야)譯(역) 40화엄에 실려 있는 보현보살의 십대서원. 일체 보살의 行과 願을 대표한다. 1)禮敬諸佛(예경제불) 2)稱讚如來(칭찬여래) 3)廣修供養(광수공양) 4)참회업장(懺悔業障) 5)隨喜功德(수희공덕) 6)請轉法輪(청전법륜) 7)請佛住世(청불주세) 8)常隨佛學(상수불학) 9)恒願衆生(항원중생) 10)普皆廻向(보개회향). 이와같은 수행과 서원을 시간적으로 영원히, 공간적으로 무한히 펼쳐가는 것이다.


@湛然(담연); 징명(澄明), 止水澄心(지수징심)의 경지


『第12句』

一念 卽是無量劫(일념즉시무량겁)

0.한 순간이 곧 한량없는 기나긴 시간이다.


현재의 순간 의식이 일체의 시간을 관철하고 일체의 공간을 편재(遍在)하고 있는 것으로서 일체의 부처들을 형성하여 동시에 중생을 제도하며 일체의 중생을 배열하여 동시에 열반에 들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옛날도 아니고 지금도 아니며 새것도 아니고 지난 것도 아닌 것이니 아뭏든 말해 보라. 한량없는 시간에 대체 일정한 시점이 설정되어 있는 것인지.


『그림자 없는 나무아래 너나 할 것 없이 함께 탄 배.

유리(琉璃)의 궁정 위에 아는 이 누구인가』

(無影樹下(무영수하) 合同船(합동선) 琉璃殿上(유리전상) 無智識(무지식))


@無影樹下는 시간적 계기가 부정된 상태를, 合同船은 공간적 구별이 부정된 상태. 따라서 결국 現存在를 규정하는 범주를 초월한 근원적 동일성의 세계를 표현한 것임. /전등록권5 혜충국사장에서 인용


『第13句』

九世十世 互相卽(구세십세 호상즉)

0.九世와 十世가 상호 不可分離의 것이니.


하나의 순간의식과 기나긴 영원이 시간상 동일하여 상호 제약이 없기 때문에 과거, 현재, 미래가 각각 또 다른 과거 현재 미래를 갖추어 구세를 이루면서도 차별이 없는 一世 속에 융합되어 있는 것이며 존재와 존재가 각각 존속하면서도(法法常住) 상호 삼투(滲透)함에 제약을 받지 않는 동일성 속에 있는 것이다(交徹無碍).


@法法常住(법법상주) 交徹無碍(교철무애): 법법상주는 존재와 존재가 따로따로 독자적으로 성립한 모습(隔法異成)으로서 九世라는 역사적 繼起的(계기적) 시간의 지평에서 존재를 파악한 것. 교철무애는 十世라는 일체적 시간의 地平에서 파악한 존재의 一體性.


『第14句』

仍不雜亂 隔別

(잉불잡란 격별성)

0.그럼으로 복잡하며 혼란한 구별을 이루지 않는다.


本體라는 것을 想定(상정)하면 複雜(복잡)함이 있게 되고 形相이 있으면 混亂(혼란)함이 있겠지만 본체가 없는 이상 곧 형상도 없는 것이기 때문에 形相的인 것을 초월한 순수한 작용만 남는 것이며 그와 같이 무제약적인 작용을 작용으로 함으로 그 작용에 아무런 한계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과거 현재 미래의 역사적 시간을 전개시킴도 내게 달렸으며 한 순간의식에 수렴(收斂)하는 것도 나에게 있는 것으로서 과거 현재 미래의 三世가 一時이고, 一時가 그와 같은 三世이니 만큼 古代와 다름이 없으면서 다름 아닌 新時代이고 신시대와 다르지 아니하면서 바로 古代에 해당하여 일체로서의 지속일 뿐 거기에 옛날과 지금의 간격이 있는 것이 아니다.


『달마가 전한 의의 끊겼는가 여겼더니 복숭아꽃 예대로 봄바람에 피었네.』

(將謂少林消息斷(장위소림소식단) 桃花 依舊笑春風(도화의구소춘풍))


@一法元無萬法空(일법원무만법공) 個中那許悟圓通(개중나허오원통)

將謂少林消息斷(장위소림소식단) 桃花依舊笑春風)(도하의구소춘풍)/芙容楷선사의 게송.

 

@소림의 소식은 달마의 종지.


『第15句』

初發心時 便正覺(초발심시 변정각)

0.처음 발심한 때가 그대로 正覺이고.


眞性이 생멸함이 없는 것으로서 일정한 본성(自性)이 없으며 상황에 따른 전변(轉變)(緣起)도 없으며 對象的 관계를 초월한다는 것을 철저하게 인식함으로써 그러한 확신을 가지고 발심하고 수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처음 발심할 당시에 이미 그 전개과정으로서의 果報(과보)가 성취되어 있는 것이니 이른바 善財(선재)라는 소년이 존재세계(法界)를 떠나지 않은 채 百餘(백여)의 성을 편력하여(不離法界遍歷百城) 구도하고 처음 발심한 때를 경과하지 아니한 채 최종의 단계인 미륵보살의 전각에 올랐다고 함이 바야흐로 참말(事實)인 것이다.


『長安의 좋은 풍류란 것 말도 말게. 有利한 점이 있는가 했더니

그게 밑지는 것이더군.』

( 休論長安好風流(휴장안호풍류) 어니  得便宜是落便宜(득편의시락편의))


@不離法界遍歷百城(불리법계편력백성) 운운; 선재소년(하엄경 입법계품의 주인공인 善財)이 문수보살의 어드바이스에 따라 현인들을 歷訪(역방)한 구도의 여행은 공간적으로 百餘의 성을 이동한 것이지만 본질적으로 하나의 존재세계라는 입장에서는 그와같은 공간적 의미가 부정된다. 義相이 @간다는 것이 본처에 가는 것이요, 이르렀다는 것이 떠난 자리에 이르는 것이다 (和尙所云(화상소운). 行行本處(행행본처). 至至發處(지지발처). 蓋此意也(개차의야)이라고 함도 이를 말한 것이다.

 

@得便宜是落便宜(득편의시락편의): 어떤 점이 유리하다고 하여 반드시 좋은 것이 아니고 결국 그게 그거라는 의미.

 

『第16句』

生死 涅槃 常共和(생사열반 상공화)

0.생사의 윤회와 열반의 고요함이 늘 和合하여 있다.


생사에 의하여 바뀌는 생존형태란 무엇인가 하면 이것이야 말로 보현보살이 그 서원을 실천하는 영역인 것이며 열반이란 무엇인가 하면 오히려 이것이야 말로 삶의 意義를 상실한 타율적 세계로 전락한 것이니(具縛輪廻) 어쨌든 간에 말해보라. 열반과 윤회라는 것이 전혀 별개의 것인지.


『근원적 無知의 본 바탕이 바로 부처의 본성이며

헛개비 같은 肉身이야 말로 진리의 현현인 것.』

(無明實性(무명실성) 卽佛性(즉불성) 幻化空身(환화공신) 卽法身(즉법신))


@生死涅槃常共和: 生死는 因果에 의하여 결정된 생존양식, 열반은 불을 불어서 끄듯이 타율적인 생존양상이 止息(지식)된 상태. 근원적 자유를 가리킨다. 共和는 共存和合

 

@具縛輪廻(구박윤회): 윤회는 分段生死(분단생사). 인과적으로 결정되는 생존양식의 변화. 그와 같은 생존양식에는 천, 인 아수라, 축생, 아귀, 지옥의 三善道와 三惡道가 있다. 어느 것이든 자유의지에 의한 것이 아닌 것으로서 보살의 원력에 의한 變易生死(변역생사)와 구별하는 의미에서 구박(무자유)윤회를 말한다.


『第17句』

理事冥然 無分別(이사명연 무분별)

0.통일적 본질(理)과 차별적 현상(事)이 확연한 것이 아니어서

분별됨이 없으니.


통일적 본질이라느니 차별적 현상이라느니 하여 비록 여러 가지로 설명하기는 하지만 결국은「매우 깊은 眞性(深眞性)」과「일정한 본성을 지키지 아니한다(不守自性)」는 것에 불과할 따름이다. 眞性에 있어서의 통일적 본질이라는 측면(眞性之理)은 신비한 작용(妙用)의 연속으로 나타나며 진성이 가진 차별적 현상의 측면(眞性之事)은 존재들(法法)의 간단(間斷)없는 상호 융입(融入)으로 나타난 것으로서 東林이 빽빽이 욱어졌음에 대하여 南岳(남악)이 까마득히 높은 것(嵯峨; 차아)은 보현보살의 영역에 대한 문수보살의 面目인 관계를 표상하는 것이고 넝쿨잡고 정상에 올라감에 대하여 병(甁)을 쥐고 연(蓮)을 따는 것은 문수보살의 지혜와 이에 상응하는 보현보살의 신비한 작용이라는 관계가 表象되어 있는 것이다.


상황에 응하여 전변한다(緣起時)는 측면에서는 분명코 일정한 본성이라는 것이 없어(的的無性하야) 차별적 현상만이 클로즈 엎되고 일정한 본성이 없는 곳(無性處)에서 쉼업이 전변함으로써(常常緣起하니) 통일적 본질(眞性之理)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니 대체 속속드리 알고 있는가.


『첫째 단계를 성취함으로서 나머지 단계에 예정된 果報까지 완비된 것으로서 물질도 아니고, 정신도 아니며, 수행의 결과도 아닌 無爲世界의 것』

(一地 具足一切地 하대 非色 非心 非行業 이로다)


@冥然은 혼돈chaos의 상태 @妙用은 因果律에 의하여 설명되지 않는 작용.

 

@남악은 行의 영역을, 차아(嵯峨)는 智의 경지

 

@文殊는 智와 目, 普賢은 行과 用. 각각 理와 事를 대표하면서 그것들이 일상적 무관계 속에 실은 관계를 맺고 있는 理事無碍의 의의를 표현한 것으로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緣起時 的的無性 云云: <법계도기총수록>에 「緣起無性. 無性緣起也. 緣起無性. 是理.

無性緣起. 是事. 故云. 冥然無分別. 此是十佛普賢境」 이라고 한데서 온 말.

「的的」은 理의 분명함을, 「常常」은 事의 끊임없음을 표현한 것.

 

@一地는 佛位에 이르는 十地 중의 일지.

 

@色은 물질적 존재, 心은 정신, 行業은 수행의 결과. 非色 非心 非行業은 곧 무위의 세계


『第18句』

十佛普賢 大人境(십불보현 대인경)

0.十位의 부처들의 內密(내밀)한 성취와 이를 表象하는 보현보살에 속한 大人의 경지이다.


대인의 경지를 보고 싶지 않은가.


『마침 어떤 사람이 天台山에서 오더니 난데없이 형산(衡山:남악)에서 떠난다.』

(適有人(적유인)이 從天台來(종천태래) 어늘 却從南岳去(각종남악거)로다.』


@십불보현대인경: 十佛은 총수록(叢髓錄)에 의하면 1.無着佛(安住世間 成正覺故) 2.願佛(出生故) 3.業報佛(信故) 4.持佛(隨順故). 5.化佛(救度故) 6.法界佛(無處不至故) 7.心佛(安住故) 8.三昧佛(無碍無着故) 9.性佛(決定故) 10. 如意佛(普覆故) 이라고 한다. 十佛은 總和로서 一佛. 이 句에서 十佛과 보현이 함께 大人境으로 擧示된 점에 관하여 총수록은 위와같은 십불을 外向的으로 보았을 때 보현인 것이요(佛外向心與普賢心 冥合不分故), 보현을 向內的으로 본것이 다름 아닌 十佛이라고 한다.(以普賢 向內則十佛)

 

@종천태래 각종남악거: 앞 句는 시간적 초월을, 후귀는 공간적 초월을 표현한 것. 浙江省(절강성)의 천태산에서 오는 것이 또한 동시에 湖南省(호남성)의 남악에서 떠나는 것에 해당한다는 것이므로 공간적 구조가 짐짓 무시됨을 알 수 있다.


『第19句』

能仁 海印三昧中(능인해인삼매중)

0.석가모니부처의 해인삼매 가운데서.


眞性 가운데서 비록 여러 갈래로 통일적 본질(理)과 차별적 현상(事)이 현현한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일정한 본성이 있는지 여부를 추구해 보면 실은 아무것도 얻어지는 것이 없는 이상 본성으로서의 부처라든가 현상으로서의 중생이라는 것도 다름 아닌 眞性 중의 光影일 뿐으로서 성불할 부처라는 것도 없으며 제도할 중생이랄 것도 없는 것이다.

 

마치 염부(閻浮)의 바다 가운데에 있는 연부주의 山河大地와 초목삼림(草木森林)이 그 실체를 추구할 때 아무것도 얻어지는 것이 없는 이상 그와 같은 山河의 모습들이 다름 아닌 大海의 光影으로서 찾아볼만한 어떤 본성이나 취할만한 무슨 形相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大海일 따름인 것과 마찬가지로 十位의 부처들에게 속하는 內密(내밀)한 오증(悟證)이라는 것도 단지 이와 같을 뿐이다.


@能仁: 의상의 圖記 및 총수록(叢髓錄)에는 「能仁」이「能人」으로 되어있다. 能仁은 석가를, 能人은 敎化를 받는 사람에 대응하여 교화를 주는 주체로서의 佛을 말한다. 어느 경우든 의미상 차이는 별로 없기 때문에 예부터 互用한 것으로 보인다.


『第20句』

飜出如意 不思議(번출여의 부사의)

0.如意珠와 같은 神秘한 事象이 演出된다.


바다에 일체의 사물이 투영되듯이 모든 존재의 본질이 현현(顯現)되는 海印三昧. 거기에서 일어나는 존재의 본질(法)을 어떻게 形容할 것인가. 본성도 아니고 形相도 아니며 통일적 본질(理)도 아니고 차별적 현상(事)도 아니며 부처도 아니고 중생도 아니며 진실도 아니며 가상(假像)도 아닌 것으로 일체의 차별적 관념이 부정된다.

 

그리고 그와 같은 본질이 向外的으로 표현된 수행의 영역에 있어서도 그것은 본성이면서 다름 아닌 形相이고 통일적 본질이면서 다름아닌 차별적 현상이고 부처이면서 다름아닌 중생이고 眞實이면서 다름 아닌 假像인 것으로서 한 가지 音聲(一音)으로 설명하되 듣는 자의 부류에 따라 각각 다른 내용이며 부류에 따라 다른 내용이면서 한 가지 음성(一音) 속에 남김없이 수렴(收斂)되어 중생의 여러 가지 마음에 상응하여 중생의 가지가지 본성을 설명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인식능력의 범위 밖의 일이며 思惟의 한계를 넘는 것이기 때문에「여의주와 같은 신비한 事象」이라고 하는 것이니 알겠는가.


『밤은 고요하고 물은 찬데 고기 낚이지 않아도 그만.

빈 배 가득히 싣고 돌아오느니 밝은 달빛일 뿐.』

(夜靜水寒(야정수한)에 魚不食(어불식) 하니

滿船空載月明歸(만선공재월명귀)로다』


@번출여의부사의: 도기(圖記)나 총수록에는 飜出이 繁出로 되어 있다. 如意는 如意寶珠, 不思議는 不可思議事. 飜出은 演出의 뜻.

 

@천척사륜직하수(千尺絲綸直下垂)  일파재동만판수(一派纔動萬派隨)

야정수한어불식(夜靜水寒魚不食)  만성공재월명귀(滿船空載月明歸)/야보/금강경오가해

 

@득수반지미족기(得樹攀枝未足奇) 현애철수장부아(懸崖徹手丈夫兒)

수한야냉어난멱(水寒夜冷魚難覓) 류득공선재월귀(留得空船載月歸)/야보/금강경오가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