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즉일체(一卽一切) 다즉일(多卽一)

2025. 1. 20. 11:28법성게

「하나는 곧 일체요, 일체는 곧 하나다.」

이는 『신심명』에 나오는 말이다.

같은 의미로 『법성게』는 이를 이렇게 설하고 있다.

<일중일체 다중일(一中一切 多中一)

일즉일체 다즉일(一卽一切 多卽一)>

표현은 다르지만, 그 의미는 동일하다. 같은 의미로

<한 티끌 속에 우주를 머금었고

낱낱의 티끌마다 우주가 다 들었다.

(一微塵中 含十方 一切塵中亦如是)>,

<한없는 시간이 한 생각의 일념이고

찰나의 한 생각이 무량한 겁이다.

(無量遠劫卽一念 一念卽是 無量劫)>

등으로 이어져 있다.

 

이를 이해하기 전에

먼저 우리가 사용하는 <말>에 대한 의미를 경문(經文)을

통해 살펴보자.

 

중생들이 가지고 있는 음성과 언어는

전부 4무애지(無礙智)에 속한다.

언설(言說)이라는 것은 법무애지(法無礙智)에 해당하며,

언설 아닌 것은 의무애지(義無礙智)에 해당하고,

언설로써 분별하고 나누는 것은 사무애지(辭無礙智)에 해당하며,

현상적인 일로 더불어 상응하여 전혀 막힘이 없게 하는 것은

선설무애지(善說無礙智=樂說無礙智)에 해당하는 것이다.

중생들이 가지고 있는 언설은

전부 이 네 가지 법구(法句)에 포함되지만,

진실한 의구(義句)

본래 부동(不動)한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광석보리심론(廣釋菩提心論))

 

여기서 말하는 4가지 무애지(無礙智)의 참 의미는

모든 경문을 이해함에는 말과 글이

세속제(世俗諦)를 말하는 것인지,

승의제(勝義諦)를 말하고 있는지

분명히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세속제란

성품(性品)이 있는 생멸의 도리를 말하는 것이며,

승의제는

진제(眞諦) 즉 이체(理體)의 도리를 말하는 것이다.

전자를 유위(有爲)의 도라고 보면,

후자는 무위(無爲)의 도리를 말하는 것이다.

 

불교의 경전에서는 <무위(無爲)>라는 말이 많이 나오는데

잠시 <무(無)> 자의 의미를 부연하면 이렇다.

경에 의하면

 

일체의 법에는 문자(文字)도 없고 설법할 것도 없으며

문자의 자성까지도 다 여의었기 때문이요,

모든 법은 생겨나는 일도 없고 생겨나는 자성까지도

다 여의었기 때문이며, 모든 법은 나아갈 곳도 없고

바른 것에 나아감도 끊어졌기 때문이요,

모든 법은 나타나는 것도 없고 의지하는 곳도 없어서,

(), (), ()을 초월하여

모든 인연을 여의고, 이름도 없고 언설도 없으며

조작함도 없고 보임도 없어서

허물 있는 눈[] 등의 길에 쌓아 모아둘 것도 없느니라.

그리고 생겨남이 없기에 생각도 여의어서

처소마저도 없으니, 모든 처소까지도 여읜 법은

오직 한 글자뿐이니, 이른바 ()’ 자이다.

본래부터 언설이 없거늘 어찌 언설로 말할 수 있겠느냐?

라고 했다. <대방광사자후경(大方廣師子吼經)>

 

모든 법이란 인연 따라서 생기는 것이니

만약 인연이 없다면 생기는 법도 없을 것이다.

비록 모든 법이 인연을 따라서 생긴다고 하나

그 생()하는 바가 없다, 다시 말해서

인연으로 생()하지만 그 성품 즉 자성(自性)은 없는 것이다.

무자성(無自性)이면 무생(無生)이요 무상(無相)이다.

이와 같이 깨닫는 것을

무생법(無生法)을 깨달은 것이라고 교학에서는 말한다.

이는 곧 모든 법이 마치 허깨비와 같은 것[如幻]이며,

그것은 다만 생각[憶想]

[語言]이 만들어낸 법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생각이나 말이 만들어낸 모든 법은

결국 모두가 공()한 것이다.

()이란 곧 자성이 없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명제에서

<하나가 곧 일체요, 일체가 곧 하나다(一卽一切多卽一)>란 말은

세속제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승의제에서 말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세속제라면 하나가 곧 전체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에 자성이 있다면,

전체라는 것이 성립될 수가 없는 것이다.

<하나>가 자성이 있다면 그 하나는

곧 상()을 가진 존재라는 것인데

존재라는 것은 한 공간을

점유하고 있을 때만 한 존재가 되는데

그 공간에는 하나의 자성을 지닌 존재 외에는

다른 것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가 곧 전체다>라는 의미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자성이 없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자성이 없다는 것은 無相을 말하며,

무자성이기 때문에 화합할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가 없어지면 <>라는 것이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는 곧 <>가 있으므로 <>라는 것이 성립되는 것이다.

<>가 없으면 <>도 사라지기 때문에

다시 말해 자성이 없다면 <><>가 평등한 것이 된다.

<><>가 존재하는 것은

심의식(心意識)에 의한 분별상이요,

이 분별은 명자상에 불과한 것으로

성품이 없는 무자성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전체(全體)>

비유하자면, 강물 위에 수많은 건물과 교각, 가로등이 비쳐도

서로 장애 됨이 없이 비치듯 자성이 없으므로

하나가 곧 전체와 화합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림자가 겹겹이 겹칠 수 있는 것은

눈으로는 보이지만 실상 즉 자성이 없기 때문이다.

 

무량원겁이 한 찰나다.라는 말이나

작은 한 티끌 속에 우주가 있다.라는 말 또한

하나의 찰나 속에 일체의 찰나가 따라 들어오지 않으면,

겁과 찰나의 분량으로도 화합하지 않는다.

마치 미세한 먼지들이 모여 둥근 덩어리가 되는 가운데

또한 극미량의 아()도 없이 화합할 수 있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하나의 덩어리와 하나의 부분 속에서

저 찰나에 모인 덩어리의 성품[蘊聚性]은 화합하지 않고

스스로 생할 수 없으며 인분(因分)도 없다.

만일 이 중에서 저 부분[]의 성품을 취한다면

곧 자아의 지은 바가 서로 어긋나므로

역시 두 가지 종류는 없다.

만약에 두 부분의 성품이 있다고 한다면

곧 두 종류의 허물이 따라붙는다.”
이와 같은 것을 총체적으로 설명하면,

일체 세속에서 생한 것은 얻는 성품이 있으나,

승의제 중에서는

참으로 생함이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해를 돕고자 비유하자면 올챙이와 개구리와 같다.

세속제로 보면 올챙이와 개구리가 다르지만,

승의제로 보면 올챙이가 곧 개구리다.

자성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올챙이가 자성이 있다면 올챙이는 올챙이가 될 뿐이지

절대로 개구리가 될 수 없다.

두 개의 자성이 개구리에게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에서

모든 생()의 성품이 있는 것은 모두가 세속을 말한다

승의제 중의 생()은 자성이 없다.

자성이 없는 가운데서 만약 의혹이 일어나면,

그것을 바로 실제로 세속의 뜻을 일으킨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인연으로 생한 것은 자성이 없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부자합집경(父子合集經)에서는
저 일체의 법은 모두 다 평등하고 삼세 또한 평등하다.

과거 일체법은 자성(自性)이 여의었고

나아가 현재의 일체법 또한 자성이 여의었다.”라고 했고,

 

상액경(象腋經)에서는
일체의 성품은 생()함을 얻을 수 없다.

()함이 없는 성품 가운데서 어리석은 사람은

그 생()함이 있다고 집착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일즉일체(一卽一切)>

<무량원겁(無量遠劫) 즉일념(卽一念)>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

이러한 일체 분별상을 지어내는

모든 유()의 색상(色相)을 자세하게 관찰하면,

자체가 실재하지 않기 때문에 상대의 장애가 없으며,

그 식() 또한 실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식의 자상(自相)을 여의기 때문에 

저 색이 식()을 여의고 존재한다고 설하지 않는다.

또한 다시 식()의 자상은 갖가지가 실답지 않으니,

이와 같은 이유로 식()은 실답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며,

()은 마술사[幻士]와 같다고 경에서 말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하나의 성품이든

다수의 성품이든 이 성품이라는 것은 모두 공()이다.

승의제(勝義諦) 중에는 일체의 성품은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다른 한 예를 보자.

신심명지극히 큰 것은 작은 것과 같아서

그 끝과 겉을 볼 수 없다(極大同小 不見邊表)

라는 말이 있다. 지극히 큰 것(極大)이 존재한다면

지극히 작은 것(極小)이 존재할 공간이 있을 수 없다.

극소(極小)라 할지라도 공간을 점유하고 있다면

그만큼 극대(極大)의 공간이 줄어들기 때문에

극대라는 말이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極大, 極小라는 말은

세속제(世俗諦)로 식()의 분별에 의한

명자상에 불과한 것이다.

이는 곧 자성이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명제에서 <>이다, <>,

<부분>이다, <전체>다 라는 것은

세속제(世俗諦)에 의한

()의 분별에 지나지 않는

자성이 없는 명자상에 불과한 것이다.

승의제(勝義諦)에서 보면 자성이 없기 때문에

<>이 곧 <>,

<一念>이 곧 <無量劫>이요,

올챙이가 곧 개구리라고 말 할수 있는 것이다.